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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마완'''(馬浣)은 [[은나라|은(殷)나라]] 양성인(陽城人)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이다. 은나라 양성군자(陽城君子) 마완⋅마장(馬莊) 부자(父子)는 [[주왕]]의 폭정에 인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경서를 가지고 은거하다가 은나라가 멸망한 뒤에 마장이 [[기자]](箕子)와 더불어 [[고조선]]에 동래(東來)하였다고 한다. | 《마씨대동보》(馬氏大同譜)에 따르면, 시조 '''마완'''(馬浣)은 [[은나라|은(殷)나라]] 양성인(陽城人)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이다. 은나라 양성군자(陽城君子) 마완⋅마장(馬莊) 부자(父子)는 [[주왕]]의 폭정에 인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경서를 가지고 은거하다가 은나라가 멸망한 뒤에 마장이 [[기자]](箕子)와 더불어 [[고조선]]에 동래(東來)하였다고 한다. | ||
'''[[장흥 마씨]]'''(長興馬氏)의 득관 시조(得貫 始祖) '''[[마려]]'''(馬黎)는 [[백제]] 개국공신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70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ref>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마려(馬藜), 오간(烏干) 등 10인이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인도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해 남하해서 [[위례성]]을 도읍으로 백제를 건국하고 온조를 왕으로 받들었다.<ref>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은 마려, 오간(烏干), 전섭(全攝),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이다. 백제 개국공신 중 마려는 마(馬)씨의 시조, 전섭은 전(全)씨의 시조, 조성은 [[직산 조씨]]의 시조이다.</ref>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元勳) 마려에게 좌보(左輔)의 벼슬을 내리고 [[회진면|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려 후손이 세거(世居)하여 대대로 이어 받았다. | '''[[장흥 마씨]]'''(長興馬氏)의 득관 시조(得貫 始祖) '''[[마려]]'''(馬黎)는 [[백제]] 개국공신이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70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ref>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마려(馬藜), 오간(烏干) 등 10인이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인도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를 피해 남하해서 [[위례성]]을 도읍으로 백제를 건국하고 온조를 왕으로 받들었다.<ref> 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은 마려, 오간(烏干), 전섭(全攝),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이다. 백제 개국공신 중 마려는 마(馬)씨의 시조, 전섭은 전(全)씨의 시조, 조성은 [[직산 조씨]]의 시조이다. </ref> 온조왕이 개국원훈(開國元勳) 마려에게 좌보(左輔)의 벼슬을 내리고 [[회진면|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려 후손이 세거(世居)하여 대대로 이어 받았다. | ||
[[회진면|마사량현]](馬斯良縣)은 고려 초에 [[회진면|회령]](會寧)으로 고쳐 불렀는 바 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회령으로 하다가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에 속하게 되니 다시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 [[회진면|마사량현]](馬斯良縣)은 고려 초에 [[회진면|회령]](會寧)으로 고쳐 불렀는 바 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회령으로 하다가 [[인종 (고려)|고려 | ||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에 속하게 되니 다시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 |||
[[고려 | [[문종 (고려)|고려 문종]] 때 마점중(馬占中)의 장남 마현(馬鉉)이 [[목천 마씨]](木川 馬氏)로 갈라지고, 둘째 마혁인(馬赫仁)은 선조의 관향인 [[장흥 마씨]]를 이어갔다. | ||
장흥 마씨(長興馬氏) 기세조 '''마혁인'''(馬赫仁)은 가문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1085년]]([[고려 선종]])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특진(特進)에 이르고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냄으로써 가문에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여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가첩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 장흥 마씨(長興馬氏) 기세조 '''마혁인'''(馬赫仁)은 가문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1085년]]([[선종 (고려)|고려 선종]])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특진(特進)에 이르고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냄으로써 가문에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여 벼슬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가첩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 ||
마혁인의 아들 마엽(馬曄)은 고려조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역임했고, 마혁인의 손자 마의유(馬義裕)는 [[고려 의종]] 때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 마혁인의 아들 마엽(馬曄)은 고려조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역임했고, 마혁인의 손자 마의유(馬義裕)는 [[의종 (고려)|고려 의종]] 때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 ||
4세손 [[마희원]](馬希援)은 [[1190년]]([[고려 명종]] 2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議同三司 : 종1품)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1224년]]([[고려 고종]] 11년)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서 몽골 사신 탑고야(嗒古也)를 서경(西京)까지 호송하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185 《고려사》 권22, 고종 11년(1224) 갑신년]</ref> | 4세손 [[마희원]](馬希援)은 [[1190년]]([[명종 (고려)|고려 명종]] 2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議同三司 : 종1품)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1224년]]([[고종 (고려)|고려 고종]] 11년)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서 몽골 사신 탑고야(嗒古也)를 서경(西京)까지 호송하였다.<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185 《고려사》 권22, 고종 11년(1224) 갑신년] </ref> | ||
마희원의 아들 [[마중기]](馬仲奇)는 [[1205년]]([[고려 희종]] 1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159 《고려사》 권21, 희종 원년(1205) 을축년]</ref> 한림학사 승지(承旨)를 지내고 전리 상서(典理尙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최충헌의 도방(都房) 정치에 반대하여 벼슬에 응하지 않다가 최충헌(崔忠獻)이 죽은 후에 사관(仕官)하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 마희원의 아들 [[마중기]](馬仲奇)는 [[1205년]]([[희종 (고려)|고려 희종]] 1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24159 《고려사》 권21, 희종 원년(1205) 을축년]</ref> 한림학사 승지(承旨)를 지내고 전리 상서(典理尙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최충헌의 도방(都房) 정치에 반대하여 벼슬에 응하지 않다가 최충헌(崔忠獻)이 죽은 후에 사관(仕官)하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 ||
마중기의 손자 마지백(馬智伯)은 호부상서, 국자감 제학을 역임했다. 마지백의 증손 마수손(馬壽孫)은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랐으나 조정 간신들의 질투와 간계를 개탄해 벼슬을 던졌다. 그 뒤 장흥 예양강에 내려와 후학으로 여생을 보냈다.<ref>{{뉴스 인용|제목 = 장흥마씨(長興馬氏) 조선 왕조 기틀 마련한 '마천목' 아들 4형제 모두 현달해 4파 이뤄|URL =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55439|출판사 = 새전북일보|저자=정복규|날짜 = 2014-03-04}}</ref> | 마중기의 손자 마지백(馬智伯)은 호부상서, 국자감 제학을 역임했다. 마지백의 증손 마수손(馬壽孫)은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랐으나 조정 간신들의 질투와 간계를 개탄해 벼슬을 던졌다. 그 뒤 장흥 예양강에 내려와 후학으로 여생을 보냈다.<ref>{{뉴스 인용|제목 = 장흥마씨(長興馬氏) 조선 왕조 기틀 마련한 '마천목' 아들 4형제 모두 현달해 4파 이뤄|URL =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55439|출판사 = 새전북일보|저자=정복규|날짜 = 2014-03-04}}</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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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목(馬天牧)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마승 (1393년)|마승]]'''(馬勝)의 문간공파(文簡公派), 마전(馬腆)의 조은공파(釣隱公派), 마반(馬胖)의 현감공파(縣監公派), 마춘(馬椿)의 참판공파(參判公派)의 4파를 이루었다. 마천목의 장남 '''[[마승 (1393년)|마승]]'''(馬勝)은 세종 때 경상도수사와 판안주목사, [[이조]][[참판]],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내며 [[청백리]]로 유명했고, 1457년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ref>[http://uis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uiseong&dataType=01&contents_id=GC05200823 마승 - 의성향토문화백과]</ref>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ga_10909016_001 《세조실록》 31권, 9년(1463 계미 / 명 천순(天順) 7년) 9월 16일(임신) 1번째기사]</ref> | 마천목(馬天牧)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마승 (1393년)|마승]]'''(馬勝)의 문간공파(文簡公派), 마전(馬腆)의 조은공파(釣隱公派), 마반(馬胖)의 현감공파(縣監公派), 마춘(馬椿)의 참판공파(參判公派)의 4파를 이루었다. 마천목의 장남 '''[[마승 (1393년)|마승]]'''(馬勝)은 세종 때 경상도수사와 판안주목사, [[이조]][[참판]], 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지내며 [[청백리]]로 유명했고, 1457년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졌다.<ref>[http://uis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uiseong&dataType=01&contents_id=GC05200823 마승 - 의성향토문화백과]</ref>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ga_10909016_001 《세조실록》 31권, 9년(1463 계미 / 명 천순(天順) 7년) 9월 16일(임신) 1번째기사]</ref> | ||
조은공파 6세손으로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를 역임한 [[마하수]](馬河秀)는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현감공파 6세손 [[마응방]](馬應房)은 진안[[현감]]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 남원 전투에서 전사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연산군]]의 패륜에 항거했던 마숭조(馬崇祖)의 5세손 마윤, 마응훈, 마운종, 마창종 5형제는 의병장으로 진주의 남강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 조은공파 6세손으로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를 역임한 [[마하수]](馬河秀)는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현감공파 6세손 [[마응방]](馬應房)은 진안[[현감]]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 남원 전투에서 전사하여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연산군]]의 패륜에 항거했던 마숭조(馬崇祖)의 5세손 마윤, 마응훈, 마운종, 마창종 5형제는 의병장으로 진주의 남강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 ||
'''[[목천 마씨]]'''(木川馬氏)의 중시조 '''[[마경수]]'''(馬坰秀)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신정군(新定君)에 봉해졌다. 마경수의 8세손 성리학자 [[마희경]](馬羲慶), 그의 손자로서 《오륜통의》(五倫通義), 《사례비요》(四禮備要)의 저자인 [[마사종]](馬嗣宗)은 학자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로는 마격(馬格), [[마계변]](馬繼卞), [[마맹하]](馬孟河), 마사인(馬思仁), 마지휘(馬之徽), 마한량(馬翰良), [[마현겸]](馬玄謙), [[마유 (조선)|마유]](馬游) 등이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60_187_0127|목천 마씨}}</ref> | '''[[목천 마씨]]'''(木川馬氏)의 중시조 '''[[마경수]]'''(馬坰秀)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신정군(新定君)에 봉해졌다. 마경수의 8세손 성리학자 [[마희경]](馬羲慶), 그의 손자로서 《오륜통의》(五倫通義), 《사례비요》(四禮備要)의 저자인 [[마사종]](馬嗣宗)은 학자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로는 마격(馬格), [[마계변]](馬繼卞), [[마맹하]](馬孟河), 마사인(馬思仁), 마지휘(馬之徽), 마한량(馬翰良), [[마현겸]](馬玄謙), [[마유 (조선)|마유]](馬游) 등이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60_187_0127|목천 마씨}}</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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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 ===중국 === | ||
'''마'''(馬, Ma) 성은 중국 인구 1,000만 ~ 2,000만 명으로 성씨 인구 순위 14위이다. | '''마'''(馬, Ma) 성은 중국 인구 1,000만 ~ 2,000만 명으로 성씨 인구 순위 14위이다. | ||
역사 인물로는 후한의 정치가 [[마원 (후한)|마원]](馬援), [[마등]], 촉한의 장군 [[마초 (촉한)|마초]], [[마대]], [[마량]], [[마속]] 등이 있고, 명나라 제독 [[마삼보]]([[정화 (명나라)|정화]])는 항해가로 유명하다. 현재 [[중화민국]](타이완) 총통이 [[마잉주]](馬英九)다. | 역사 인물로는 후한의 정치가 [[마원 (후한)|마원]](馬援), [[마등]], 촉한의 장군 [[마초 (촉한)|마초]], [[마대]], [[마량]], [[마속]] 등이 있고, 명나라 제독 [[마삼보]]([[정화 (명나라)|정화]])는 항해가로 유명하다. 현재 [[중화민국]](타이완) 총통이 [[마잉주]](馬英九)다. | ||
== 삼 마씨 == | == 삼 마씨 == | ||
'''마'''(麻)씨는 [[중국]] 상곡(上谷)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다. | '''마'''(麻)씨는 [[중국]] 상곡(上谷)에서 계출(系出)된 성씨이다. | ||
마(麻)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 99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영평 마씨|영평]](永平), 열산, [[상곡 마씨|상곡]](上谷) 3본이다. | 마(麻)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조사에서 99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영평 마씨|영평]](永平), 열산, [[상곡 마씨|상곡]](上谷) 3본이다. | ||
* '''[[영평 마씨]]'''(永平 麻氏) 시조 '''[[마난]]'''(麻煖)은 [[고려 태조]] 원년([[918년]]) [[고려의 공신|고려 개국공신]] 이등공신으로 녹훈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902&cid=42953&categoryId=42953 《고려사》 권1 태조 원년]</ref> 2000년 인구는 127가구, 425명이다. | * '''[[영평 마씨]]'''(永平 麻氏) 시조 '''[[마난]]'''(麻煖)은 [[고려 태조]] 원년([[918년]]) [[고려의 공신|고려 개국공신]] 이등공신으로 녹훈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902&cid=42953&categoryId=42953 《고려사》 권1 태조 원년]</ref> 2000년 인구는 127가구, 425명이다. | ||
*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중시조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으로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서 공훈을 세운 '''[[마귀 (명나라)|마귀]]'''(痲貴) 장군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0106&cid=40942&categoryId=33397 마귀 - 두산백과]</ref> [[마귀 (명나라)|마귀]]는 회회국왕 '''마립'''(麻立)의 원손으로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대장군, 병부상서 등을 지내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6천 명을 거느리고 손자 마암(麻巖)과 함께 조선에 원군으로 와서 왜군을 무찌르고 1599년(선조 32년) 3월에 귀국했다. 그 뒤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자 증손인 [[마순상]](麻舜裳)이 조선에 귀화했다. 2000년 인구는 21가구, 63명이다. | * '''[[상곡 마씨]]'''(上谷 麻氏)의 중시조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으로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서 공훈을 세운 '''[[마귀 (명나라)|마귀]]'''(痲貴) 장군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0106&cid=40942&categoryId=33397 마귀 - 두산백과]</ref> [[마귀 (명나라)|마귀]]는 회회국왕 '''마립'''(麻立)의 원손으로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대장군, 병부상서 등을 지내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제독으로 용장 36명, 철기 1천명, 기병 1만6천 명을 거느리고 손자 마암(麻巖)과 함께 조선에 원군으로 와서 왜군을 무찌르고 1599년(선조 32년) 3월에 귀국했다. 그 뒤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자 증손인 [[마순상]](麻舜裳)이 조선에 귀화했다. 2000년 인구는 21가구, 63명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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