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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로 로마노스 4세(1068-1071)가 실각하고 콘스탄티노스 10세(1059-1067)의 아들인 미하일 7세(1071-1078)가 제위에 오르자 비잔티움 제국은 대외적인 여러 위기를 회피하고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시칠리아 노르만 공국에 대한 유화책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기스카르의 딸을 미하일 7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Konstantinos Doukas)와 결혼시켰으며 여러 품계칭호와 공물을 보내주었다. 한동안 로베르 기스카르는 이에 만족했으나 미하일 7세 정권이 국영곡물저장고 정책 등으로 삽질을 여러 번 푸다가 대중봉기로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플 제위에 대한 야심을 기르게 되었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로 로마노스 4세(1068-1071)가 실각하고 콘스탄티노스 10세(1059-1067)의 아들인 미하일 7세(1071-1078)가 제위에 오르자 비잔티움 제국은 대외적인 여러 위기를 회피하고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시칠리아 노르만 공국에 대한 유화책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기스카르의 딸을 미하일 7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Konstantinos Doukas)와 결혼시켰으며 여러 품계칭호와 공물을 보내주었다. 한동안 로베르 기스카르는 이에 만족했으나 미하일 7세 정권이 국영곡물저장고 정책 등으로 삽질을 여러 번 푸다가 대중봉기로 무너지면서 콘스탄티노플 제위에 대한 야심을 기르게 되었다.
이에 108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오늘날 [[알바니아]]에 위치한 [[디라히온]](에피담노스도 불렸으며 두라초라고도 한다. 오늘날은 두러스로 불린다.)에 상륙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 역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던 중앙야전군 2만을 모두 동원하여 디라히온에서 맞서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 서전을 [[두라초 전투]](1081)로 기억하고 있다.
이에 1081년 5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오늘날 [[알바니아]]에 위치한 [[디라히온]](에피담노스도 불렸으며 두라초라고도 한다. 오늘날은 두러스로 불린다.)에 상륙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 역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던 중앙야전군 2만을 모두 동원하여 디라히온에서 맞서게 된다. 역사에서는 이 서전을 [[두라초 전투]](1081)로 기억하고 있다.
===== 콤니노스 개혁 =====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올랐을 때 비잔티움 제국은 여러 측면에서 위기에 빠져 있었다.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위의 항목에서도 보았듯이 전임자인 니키포로스 3세 때까지 계속된 방만한 지출과 지지자를 끌어모으기 위한 무리한 작위-연금제도의 운용 때문에 사실상 국가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실물경제 측면에서도 1053년 이래 지속적으로 기준화폐의 순도절하가 극심해지면서 서로 순도가 다른 11종의 금화들이 난립하여 경제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특히 미하일 7세 시대에 제작된 금 순도 10%대의 악폐들이 그 선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제국정부는 재정적자의 문제로 인하여 한 때 서로 다른 이 금화들을 동일한 환율로 교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국가경제에 심각한 물의를 일으켰다. 알렉시오스 1세가 올랐을 때에는 따라서 이 문제를 즉각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국가를 운용할 재정이 고갈되었던 상황이었기에 알렉시오스는 과감히 작위자들에 대한 연금지불을 영구적으로 정지시켜버렸다. 사실상 디폴트 선언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종교회의를 열어 교회 소유의 보물을 국고로 환수함으로써 만성적인 재정위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돌파하고자 하였다. 종교계에서는 이 제안에 당혹하였으나 국가적 위기임을 감안하여 이를 가납하였다. 이로서 알렉시오스는 당장 국가를 운영할 국고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축인 화폐개혁은 한동안 방치되었다. 1092년에 들어서야 제국 정부는 화폐를 통폐합하는 정책을 시작했으며 17년 동안의 조정 끝에 1109년에 이르러 각 화폐간의 교환율 역시 확정하게 되었다. 화폐개혁을 통해 경제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비잔티움 정부는 11세기 이전의 정부가 적용해왔던 관점을 상당수 바꾸었고 이는 실제로 화폐정책의 현실에서 많은 차이점을 드러냈다. 우선 기준화폐이자 표준금화인 이스타메논 솔리두스(Histamenon Solidus)가 기존에는 90~95%의 순도를 유지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콤니노스 체제 하에서 새로 규정된 표준금화인 이페르피론(Hyperpyron)은 약 85% 정도의 비교적 낮은 순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화폐를 추가지출 없이 보존, 이용하면서도 지방의 더 넓은 시장에서 요구하는 화폐량을 맞출 수 있도록 화폐총량을 늘리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콤니노스 경제체제에서는 더 이상 솔리두스라는 표준금화를 기준화폐로 삼지 않았다. 대신 미하일 7세 치세인 1070년대부터 생산된 저순도 금화(금 순도:2~6%)를 금화의 반열에서 호박금화(Electrum tracea)로 낮추고 이것으로서 국가가 운용하는 주요 화폐로 삼았다. 그렇기에 화폐량이 부족해지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1107년, 알렉시오스는 또한 개혁칙령(Reform edict)을 내려 행정제도, 관직제도 전반을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거대하게 편제되어 있던 기존 행정조직과 관직이 대거 삭제되었다. 본디 존재하였던 체신성(Logotethe of Drome)이 이때 폐지되었고 기타 기능을 공유하였던 여러 관청들의 역할이 각 한군데 씩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각 관청간의 이견을 조절할 수 있는 대 회계관(Megas Logariastes)직이 신설되었고 이 모든 부서들을 최종적으로 조율하는 대 비서관(Megas Logotethes, 사실상 총리직) 역시 신설되었다. 한편 지방행정에서는 9세기 이래로 지역사령관(Strategos, Doux)과 그 기능이 구분되는 판사(Krites)가 파견되었던 것과 달리 콤니노스 체제 아래에서 다시 지역군사령관(Doux)에게 행정, 사법, 군사의 기능을 집중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11세기 및 그 이전보다도 군사령관 자체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어 그 임기가 2, 3년으로 제한됨은 물론 임기가 끝날 때마다 중앙 재정부서의 엄격한 검토를 받게 되었다.
입, 사법의 영역에서도 콤니노스 시대에 들어 체계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12세기에 들어 비잔티움 사회의 도시화, 분업화가 크게 진전하였던 까닭에 법률 관계 사안들의 중요성이 다대하여졌고 이에 따라 다양한 민사법정, 재무법정이 마련되었다. 변호사와 법관들은 1045년에 세워진 법학대학을 통해 배출되었으며 마누일 1세 치세(1143-1180)에 이르기까지 피고, 원고, 변호인, 법조인들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절차와 양식들이 마련되었다. 또한 민형사 소송의 소요기간을 각기 2, 3년으로 제한한다는 옛 법령을 재적용하게 되었고 징세 행정에 대한 행정재판이 제기되는 경우에 피해자들을 배려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 대안적 체제의 부재(1180-1204) ====
==== 대안적 체제의 부재(1180-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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