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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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


아울러 주민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면서, 대한국민으로서, 배달민족으로서 자각해서 그 의무를 다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은 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중국 지방관헌이 대한독립군단 간부들을 체포하려 햇다. 이렇듯 재만동포들의 민족의식 저하 등 주변 요건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독립운동 통합조직을 세우기로 했다. 1925년 1월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에 참석하여 통일방안을 논의하였고, 그해 3월 10일 북간도 영안현 영안성내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김혁이 추대되었고, 김좌진은 위원을 맡았다.
아울러 주민들에게 군자금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면서, 대한국민으로서, 배달민족으로서 자각해서 그 의무를 다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은 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중국 지방관헌이 대한독립군단 간부들을 체포하려 햇다. 이렇듯 재만동포들의 민족의식 저하 등 주변 요건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독립운동 통합조직을 세우기로 했다. 1925년 1월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에 참석하여 통일방안을 논의하였고, 그해 3월 10일 영안형 영안성내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김혁이 추대되었고, 김좌진은 위원을 맡았다.


신민부는 동포들의 자치기구로서의 역할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무장투쟁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였다. 이를 위해 징병제와 군구제 실시, 사관학교 설립 등을 주장했다. 김좌진은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자신이 군사부위원장, 총사령관을 맡고 무장투쟁을 진두지휘했으며, 휘하에 보안대,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 제4대대, 제5대대, 별동대 등을 두었다. 그는 국내로 진공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걸 사명으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신민부 관할 하에 있는 전 지역을 군구제로 편성했다. 즉 관할구역 내의 만 17세 이상, 만 40세 이하의 남자를 군적에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시에 독립군을 수용할 만한 막사가 없었고, 군량도 부족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농한기에 훈련을 받도록 하고, 유사시에 정규군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이 방해를 심하게 해서 군구제 실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신민부는 동포들의 자치기구로서의 역할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무장투쟁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였다. 이를 위해 징병제와 군구제 실시, 사관학교 설립 등을 주장했다. 김좌진은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자신이 군사부위원장, 총사령관을 맡고 무장투쟁을 진두지휘했으며, 휘하에 보안대,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 제4대대, 제5대대, 별동대 등을 두었다. 그는 국내로 진공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걸 사명으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신민부 관할 하에 있는 전 지역을 군구제로 편성했다. 즉 관할구역 내의 만 17세 이상, 만 40세 이하의 남자를 군적에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대오를 편성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시에 독립군을 수용할 만한 막사가 없었고, 군량도 부족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농한기에 훈련을 받도록 하고, 유사시에 정규군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이 방해를 심하게 해서 군구제 실시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김좌진은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위해 지휘관을 양성하려 했다. 북간도 목릉현(穆棱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우고 김혁을 교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부교장을 맡았다. 아울러 둔전지역으로 밀산을 택하고 1926년 5월에 조사관들을 파견했지만, 밀산의 상황이 과거와는 달리 독립운동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아서 계획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김좌진은 여론을 끌여들이기 위해 1926년경 대종교 민족주의 정신으로 '종족, 정신, 산업'의 삼위일체인 '귀일당'을 건립하고 신민부를 지도하게 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신민부 조직은 형식상으로는 3권분립의 자치제 정체를 모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대한군정서 성원의 주축인 중앙부에서 지방총관을 명령식으로 임명하거나, 거기서 파견되어온 자들이 몇 명의 무장대에 호위되어 민중에게서 각종 의무금을 징수하는 통치식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김좌진은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위해 지휘관을 양성하려 했다. 목릉현(穆棱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우고 김혁을 교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부교장을 맡았다. 아울러 둔전지역으로 밀산을 택하고 1926년 5월에 조사관들을 파견했지만, 밀산의 상황이 과거와는 달리 독립운동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아서 계획을 밀어붙이지 못했다. 김좌진은 여론을 끌여들이기 위해 1926년경 대종교 민족주의 정신으로 '종족, 정신, 산업'의 삼위일체인 '귀일당'을 건립하고 신민부를 지도하게 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신민부 조직은 형식상으로는 3권분립의 자치제 정체를 모방하였으나, 실제로는 대한군정서 성원의 주축인 중앙부에서 지방총관을 명령식으로 임명하거나, 거기서 파견되어온 자들이 몇 명의 무장대에 호위되어 민중에게서 각종 의무금을 징수하는 통치식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북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동만주나 남만주에서 살 길이 없어서 북만주로 유랑해온 빈궁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한족 지주의 토지를 소작맡거나 조차하여 농사를 짓지만, 지주에게 소작료나 토지조차로를 납부해야 했고, 지방정부로부터 각종 잡세를 지불해야 했다. 이러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 없어서 겨울을 지내기도 어려웠다. 어떤 지방에서는 마적들에게 의무금을 납부하여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했다. 그러나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러한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매 호당 수전 소상에 합대양 2원, 대상에는 3원, 한전 소상에 1원, 대상에 2원 50전, 상인들은 재산의 20분의 1을 모연금으로 내야 했다. 1925년 10월 총회에서는 매 호당 대양 6원씩 납부하도록 개정되었고,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의단분자', '반동분자'로 취급되어 처벌받거나 심지어 처단당하기도 했다. 이에 한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북만청년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들의 조직적인 반대공작도 심해졌다.
당시 북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동만주나 남만주에서 살 길이 없어서 북만주로 유랑해온 빈궁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한족 지주의 토지를 소작맡거나 조차하여 농사를 짓지만, 지주에게 소작료나 토지조차로를 납부해야 했고, 지방정부로부터 각종 잡세를 지불해야 했다. 이러고나면 남는 것이 얼마 없어서 겨울을 지내기도 어려웠다. 어떤 지방에서는 마적들에게 의무금을 납부하여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했다. 그러나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러한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매 호당 수전 소상에 합대양 2원, 대상에는 3원, 한전 소상에 1원, 대상에 2원 50전, 상인들은 재산의 20분의 1을 모연금으로 내야 했다. 1925년 10월 총회에서는 매 호당 대양 6원씩 납부하도록 개정되었고,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하면 '의단분자', '반동분자'로 취급되어 처벌받거나 심지어 처단당하기도 했다. 이에 한인들의 불만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북만청년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들의 조직적인 반대공작도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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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이 타파하고자 한 공산주의 세력은 그와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화요회파 만주총국이었다. 그는 이들이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부추겨 민족분열을 조장하게 하는 것에 깊은 분노와 적의를 품었다. 그는 농촌자치조직 및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후, 재만동포들에 대한 군사훈련과 단기 군사훈련반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퇴치에 노력했다. 이로 인해 화요회파 공산주의자들과 김좌진의 충돌은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만주에서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김좌진이 타파하고자 한 공산주의 세력은 그와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화요회파 만주총국이었다. 그는 이들이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부추겨 민족분열을 조장하게 하는 것에 깊은 분노와 적의를 품었다. 그는 농촌자치조직 및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후, 재만동포들에 대한 군사훈련과 단기 군사훈련반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의 퇴치에 노력했다. 이로 인해 화요회파 공산주의자들과 김좌진의 충돌은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만주에서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 암살 ===
=== 암살 ===
1930년 1월 24일(음력 1929년 12월 24일), 김좌진은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천년회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 사건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파다하다. 첫째는 김좌진이 사생활 문제로 정적에게 암살당했다는 것, 둘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분쟁으로 인해 암살당했다는 것, 셋째는 일제에게 매수된 김봉환이란 자가 조선공산당 회요회에 잠입해 음모를 꾸며 암살했다는 것, 넷째는 김좌진이 일제 형사와 접촉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밀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공산당원이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1930년 1월 24일(음력 1929년 12월 24일), 김좌진은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천년회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 사건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파다하다. 첫째는 김좌진이 사생활 문제로 정적에게 암살당했다는 것, 둘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분쟁으로 인해 암살당했다는 것, 셋째는 일제에게 매수된 김봉환이란 자가 조선공산당 회요회에 잠입해 음모를 꾸며 암살했다는 것, 넷째는 김좌진이 일제 형사와 접촉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밀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공산당원이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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