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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奇, 箕)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 '''기'''(奇, 箕)씨는 한국의 성씨이다. | ||
== | == 기특할 기 奇 == | ||
기( | 기(奇)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4,38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81위이다. 본관은 '''[[행주 기씨|행주]]'''(幸州), 경주, 장성 3본이 있으며, 대본은 '''[[행주 기씨]]'''이다. 행주는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 일대의 옛 지명이다. | ||
'''[[행주 기씨]]'''(幸州 奇氏) 족보에서는, [[기자조선]]을 연 [[기자]](箕子)를 선계조라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1세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마한]]의 금마군(金馬郡:[[전라북도]] [[익산시]]의 옛 이름)으로 옮겼고, 다시 그의 7세손 기훈(箕勳)에 이르러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기우성(箕友誠)은 덕양 기씨(德陽 箕氏:덕양은 행주)의 시조가 되었고, 기우량(箕友諒)은 [[청주 한씨|상당 한씨]](上黨 韓氏:상당은 청주의 옛 지명)의 시조가 되었으며, 기우평(箕友平)은 [[선우씨]](鮮于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대의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기황후]]가 [[원나라]]의 왕후가 되면서 [[기철]] 등 기씨 일가가 [[고려]] 말기 권문세가가 되었다. [[행주 기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 '''[[행주 기씨]]'''(幸州 奇氏) 족보에서는, [[기자조선]]을 연 [[기자]](箕子)를 선계조라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1세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마한]]의 금마군(金馬郡:[[전라북도]] [[익산시]]의 옛 이름)으로 옮겼고, 다시 그의 7세손 기훈(箕勳)에 이르러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기우성(箕友誠)은 덕양 기씨(德陽 箕氏:덕양은 행주)의 시조가 되었고, 기우량(箕友諒)은 [[청주 한씨|상당 한씨]](上黨 韓氏:상당은 청주의 옛 지명)의 시조가 되었으며, 기우평(箕友平)은 [[선우씨]](鮮于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대의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기황후]]가 [[원나라]]의 왕후가 되면서 [[기철]] 등 기씨 일가가 [[고려]] 말기 권문세가가 되었다. [[행주 기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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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기 箕 == | == 키 기 箕 == | ||
'''기'''( | '''기'''(箕)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294명으로 되었다. '''기'''(箕)씨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토성이다. 《[[증보문헌비고]]》, 또는 [[조선 영조|영조]] 때 편찬된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8성 중에는 보이지 않고, [[1930년]] 인구조사 때 처음으로 3가구가 경북 [[포항]], [[인제]], [[덕천]]에 1가구씩 나타났다. 본관은 [[행주]](幸州) 단본으로, 기(箕)씨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고대 중국 주나라 무왕 때 사람인 기자(箕子)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행주 기씨]](幸州 奇氏)와 같은 근원으로 추정된다. | ||
== 중국의 기씨 == | == 중국의 기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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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각주}} | ||
{{ | {{한국의 성씨}} | ||
{{퍼온문서|기 (성씨)|14099334}} | {{퍼온문서|기 (성씨)|14099334}} | ||
[[분류:성씨]] | |||
[[분류:한국인의 성씨]] | [[분류:한국인의 성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