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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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의 탄생 ===
=== 귀족의 탄생 ===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서는 우두머리는 존재해도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귀족은 고대에도 존재하였으나 [[중국]] 대륙<ref>한족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 이후 혈통에 의해 그 지위를 그냥 보장받는 귀족 계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서민들도 시험이나 추천 등을 통해 관료가 되면 귀족과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지역적으로 보면 중국 대륙 역시도 유목민 귀족에 의하여 귀족 세력이 지배했던 기간이 짧지 않다.</ref> 같은 특이한 지역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는 중세<ref>고대에는 귀족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했던 [[그리스]] 도시들이나 귀족 계층과 평민 계층이 대등한 수준으로 대립했던 [[고대 로마|로마]]가 있다.</ref>에 도달해서야 간신히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에서는 우두머리는 존재해도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귀족은 고대에도 존재하였으나 [[중국]] 대륙<ref>한족의 경우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 이후 혈통에 의해 그 지위를 그냥 보장받는 귀족 계층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서민들도 시험이나 추천 등을 통해 관료가 되면 귀족과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지역적으로 보면 중국 대륙 역시도 유목민 귀족에 의하여 귀족 세력이 지배했던 기간이 짧지 않다.</ref> 같은 특이한 지역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는 중세<ref>고대에는 귀족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했던 [[그리스]] 도시들이나 귀족 계층과 평민 계층이 대등한 수준으로 대립했던 [[고대 로마|로마]]가 있다.</ref>에 도달해서야 간신히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사람들의 인심을 모은 사람들이 귀족<ref>상무적 귀족들로 유명한 게르만족도 게르마니아를 보면 제사장 등이 귀족 취급이었다.</ref>이 되었기에 스스로 탄생한 여성 귀족<ref>고대 일본의 여왕 등.</ref>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여러 원인으로 군사귀족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귀족 가문이 남성 귀족들 위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 역시 시간이 지나며 평민들이 점점 귀족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로마식 귀족제<ref>로마의 귀족들은 시간이 지나며 상당히 유동적이 된다. 본래 로마 귀족들 역시 태생적인 의식이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기에 이를 막지 못했다. 사실 [[동로마제국]]과 같은 로마의 후예들을 과거 서유럽에서 별로 인정을 하지 않던 이유인데 원래 로마인들과 언어까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혈통적으로는 로마인들의 후계자인 이탈리아인들조차 언어가 본래 로마어와는 차이가 있다.</ref>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한니발 바르카|한니발]]과의 전투에서 로마의 평민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은 비참하게 패배하여 세력을 엄청나게 잃었고 [[파비우스]], [[마르켈루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스키피오]]와 같은 로마의 귀족들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느긋하게 한니발을 연구하여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평민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했던 정치, 경제, 군사적 시도와 도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초기에는 사람들의 인심을 모은 사람들이 귀족<ref>상무적 귀족들로 유명한 게르만족도 게르마니아를 보면 제사장 등이 귀족 취급이었다.</ref>이 되었기에 스스로 탄생한 여성 귀족<ref>고대 일본의 여왕 등.</ref>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여러 원인으로 군사귀족들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귀족 가문이 남성 귀족들 위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로마 역시 시간이 지나며 평민들이 점점 귀족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로마식 귀족제<ref>로마의 귀족들은 시간이 지나며 상당히 유동적이 된다. 본래 로마 귀족들 역시 태생적인 의식이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기에 이를 막지 못했다. 사실 [[동로마제국]]과 같은 로마의 후예들을 과거 서유럽에서 별로 인정을 하지 않던 이유인데 원래 로마인들과 언어까지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혈통적으로는 로마인들의 후계자인 이탈리아인들조차 언어가 본래 로마어와는 차이가 있다.</ref>되었다. 예를 들자면, [[한니발 바르카|한니발]]과의 전투에서 로마의 평민들과 그들을 지지했던 귀족들은 비참하게 패배하여 세력을 엄청나게 잃었고 [[파비우스]], [[마르켈루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스키피오]]와 같은 로마의 귀족들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느긋하게 한니발을 연구하여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평민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했던 정치, 경제, 군사적 시도와 도전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스의 아테네에도 귀족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민중들에 비하여 세력이 많이 밀렸고 평민파 귀족인 클레이스테네스에게 혈연 부족을 해체당해서 사실상 망하는 치욕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테네인들은 민중들의 내부적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귀족적 성격<ref>귀족들이 주도하는 게루시아 등의 존재. 사실 스파르타의 1등 시민들도 말이 시민이고 실질적으론 귀족에 가까웠다.</ref>이 있던 스파르타나 귀족들이 지배하는 마케도니아가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후에 로마에 정복을 당하고도 민주적 전통을 잊지 않았으며 그리스계 역사가였던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영광이 로마 귀족이 아닌 로마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의 이런 태도는 내심 로마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평민파인 마리우스와 대립하던 귀족파인 술라는 그리스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기도 했다. 그래서 본래 로마 귀족들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그리스인들은 그들 문명을 인정<ref>심지어 많은 로마 귀족들에게 우수하다고 생각되었다.</ref>받았음에도 대우<ref>그리스인들은 본래 로마 귀족들이 사라지자 동로마 지역에서는 아예 주류 민족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ref>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강대한 능력을 가졌던 로마의 귀족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ref>납에 의한 중독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ref>로 점점 약해졌다. 여기에 점점 많은 평민들이 정복지로부터 얻은 전리품과 노예로 인하여 무익한 프롤레타리우스<ref>이들은 결국 부도덕한 기생 집단으로 전락했다고 한다.</ref>가 되었고 로마 귀족들은 국가의 몰락을 막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개방적<ref>외부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ref>되었다. 그들은 정복전쟁을 거의 중단하고 국경 방비에 힘을 쓰며, 평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공동아파트, 공동목욕탕, 세제개혁, 곡물의 무상분배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정책으로 힘을 키운 민중이나 군인들은 오히려 귀족들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귀족들과 거의 대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로마 제국인들은 점점 명백하게 귀족들의 힘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고 농민 폭동과 반란군의 출현, 게르만족의 침입과 같은 극심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를 주로 제국에 소속된 게르만인들이 대신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무기력해진 로마 귀족들의 정체성도 점점 사라졌으며 로마 귀족들의 완전한 몰락과 함께 그들이 유지하던 제국은 더는 온전한 모습<ref>태생적 로마 귀족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로마 제국을 유지할 이유가 되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제국을 분할했다. 예를 들어, 하층민 설도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4등분하여 4분 체제를 도입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를 고평가했으나 그의 통치 시기에는 이미 게르만, 페르시아 혹은 이탈리아 등의 다른 정체성들이 탄생하거나 영향을 주고 있었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본래의 로마 제국을 딱히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의 분열은 시간문제였다.</ref>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의 아테네에도 귀족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민주제가 보급되면서 민중들에 비하여 세력이 많이 밀렸다. 나중에는 평민파 귀족인 클레이스테네스에게 혈연 부족을 해체당해서 사실상 망하는 치욕을 겪기도 한다.  
게르만족은 로마가 쇠퇴하는 3세기경부터 점차 로마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샤를마뉴는 로마 교황 레오 3세와 손을 잡고 정당한 후계자가 없음을 이유로 로마 귀족들의 황제가 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명목상으로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래서 이미 망한 자들이긴 하나 정통성이 있던 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서로마 제국인들은 로마 그 자체인 동로마를 무시하기도 했으며 그리스인들의 제국<ref>당시에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ref>으로 멸칭하기도 했다. 게르만 귀족들은 로마 귀족<ref>이들은 상대적으로 태생적 권리가 부족했다.</ref>들이 가지기도 했었던 대농장을 더욱 귀족적으로 발전시켜 장원으로 구성하였다. 게르만 귀족들에겐 영지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그냥 착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중세 농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가 되었고 그들은 귀족들에게 인두세, 상속세, 혼인세 등 온갖 세금을 납부했다. 또한 게르만 귀족은 그들에 대한 재판권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아테네인들은 민중들의 내부적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귀족적 성격<ref>귀족들이 주도하는 게루시아 등의 존재. 사실 스파르타의 1등 시민들도 말이 시민이고 실질적으론 귀족에 가까웠다.</ref>이 있던 스파르타나 귀족들이 지배하는 마케도니아가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후에 로마에 정복을 당하고도 민주적 전통을 잊지 않았으며 그리스계 역사가였던 폴리비우스는 로마의 영광이 로마 귀족이 아닌 로마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압도하는데 실패한 중화권<ref>《[[진서]]》를 보면 [[한나라]] 때까지는 [[천자]]부터가 검을 착용하였으며 관료들까지 심지어 궁중에서도 검을 착용하지 않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시대가 되자 진검 대신 목검을 착용했고 사회에 무예에 대한 경시가 퍼졌다고 한다. [[한반도]] 역시 [[고려]]까지만 해도 귀족이 대놓고 무력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모습이 나온다.</ref>에서도 귀족적인 문화가 잔존했을 때는 귀족이 지배하던 다른 지역들과 비슷한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사무라이]]라는 군사 귀족이 탄생하였으나 그 역할을 하던 귀족이 따로 있었고 사무라이는 본래부터 귀족 출신이 아닌 탓인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위세<ref>사무라이도 원래부터 귀족 태생인 경우는 위세가 강했다.</ref>가 그리 강하지 못하였다. [[에도 막부]]까지 사무라이가 귀족 태생들 앞에서 무례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이묘]](아사노 나가노리)조차 [[할복]]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귀족들의 힘과 권위가 약해지면 사무라이가 귀족을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족 태생인 사무라이들도 있었기에 그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그냥 사무라이 태생인 사무라이들은 [[덴노]](천황)와 구게(공가)가 권력이 없어도 굴복해야 했다. [[신라]]는 [[골품제]]에 의거해 귀족층을 규정했으며 [[고구려]], [[백제]] 역시 고추가, 막리지, 대성팔족, 좌평 등에서 귀족 의식이 나타났다. 고려와 [[발해]]는 과거 중국식 작위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개조한 후 왕작, [[오등작]], 군호 등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압력과 본격적인 한족식 중화 문물 수용으로 인하여 귀족 문화가 양반 문화<ref>그러나 사실상 주요 양반 가문은 고려 귀족 출신이라 청요직인 3사에는 경화사족이 임용되었고 그보다 못하면 성균관, 그보다 못하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무과의 경우에도 한양 양반 같은 평이하게 좋은 출신은 선전관, 그보다 못한 출신은 수문청에 임용되었다.</ref><ref>경화사족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사대부들이자 지연과 학연에 따라 서울 인근에서 혼맥을 구축하여 정국을 좌우하던 벌열가·세도가의 일원이다.</ref>로 대체되었다. 유목민들 역시 귀족들은 평민들과는 달랐다. [[칭기즈 칸]]에게 피해를 입은 귀족들은 미래에 [[황금씨족]]에게 복수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평민들은 조상이나 [[부모]]가 과거에 무엇을 당하든 내심 관심이 없었던 것<ref>심지어 황금씨족에 대한 동경으로 자민족이나 자국 귀족들의 복수를 방해하기도 했다.</ref>으로 보이며 칭기즈 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서로 다르게 대처<ref>평민 이하의 사람들은 그 집단의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하였으나 귀족들하고 원수가 되면 다 죽여서라도 완전히 끝장을 냈다.</ref><ref>[[여진족]] 귀족들 역시 과거 [[명나라]]의 정벌([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8 네르친스크 조약…중국, 연해주는 지켰지만… - 아틀라스뉴스]) 때 목숨을 살려주는 은혜를 받은 자들은 몽골이나 여진, 만주의 [[누르하치]] 등과 대적하면서 그것을 충분히 갚고 갔다. 물론 원인을 제공한 침략자라서 그런지 진짜로 충성하지는 않았다.</ref>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의 이런 태도는 내심 로마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평민파인 마리우스와 대립하던 귀족파인 술라는 그리스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기도 했다. 그래서 본래 로마 귀족들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그리스인들은 그들 문명을 인정<ref>심지어 많은 로마 귀족들에게 우수하다고 생각되었다.</ref>받았음에도 대우<ref>그리스인들은 본래 로마 귀족들이 사라지자 동로마 지역에서는 아예 주류 민족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ref>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강대한 능력을 가졌던 로마의 귀족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ref>납에 의한 중독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ref>로 점점 약해졌다. 여기에 점점 많은 평민들이 정복지로부터 얻은 전리품과 노예로 인하여 무익한 프롤레타리우스<ref>이들은 결국 부도덕한 기생 집단으로 전락했다고 한다.</ref>가 되었고 로마 귀족들은 국가의 몰락을 막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개방적<ref>외부인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ref>이 되었다.
 
그들은 정복전쟁을 거의 중단하고 국경 방비에 힘을 썼다. 평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공동아파트, 공동목욕탕, 세제개혁, 곡물의 무상분배 등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정책으로 힘을 키운 민중이나 군인들은 오히려 귀족들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귀족들과 거의 대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로마 제국인들은 점점 명백하게 귀족들의 힘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고 농민 폭동과 반란군의 출현, 게르만족의 침입과 같은 극심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를 주로 제국에 소속된 게르만인들이 대신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무기력해진 로마 귀족들의 정체성도 점점 사라졌으며 로마 귀족들의 완전한 몰락과 함께 그들이 유지하던 제국은 더는 온전한 모습<ref>태생적 로마 귀족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로마 제국을 유지할 이유가 되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제국을 분할했다. 예를 들어, 하층민 설도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를 4등분하여 4분 체제를 도입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를 고평가했으나 그의 통치 시기에는 이미 게르만, 페르시아 혹은 이탈리아 등의 다른 정체성들이 탄생하거나 영향을 주고 있었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본래의 로마 제국을 딱히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의 분열은 시간문제였다.</ref>으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로마가 쇠퇴하는 3세기경부터 점차 로마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샤를마뉴는 로마 교황 레오 3세와 손을 잡고 정당한 후계자가 없음을 이유로 로마 귀족들의 황제가 되었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명목상으로 서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래서 이미 망한 자들이긴 하나 정통성이 있던 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서로마 제국인들은 로마 그 자체인 동로마를 무시하기도 했으며 그리스인들의 제국<ref>당시에는 비잔티움 제국이란 용어가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ref>으로 멸칭하기도 했다. 게르만 귀족들은 로마 귀족<ref>이들은 상대적으로 태생적 권리가 부족했다.</ref>들이 가지기도 했었던 대농장을 더욱 귀족적으로 발전시켜 장원으로 구성하였다. 게르만 귀족들에겐 영지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그냥 착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중세 농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가 되었고 그들은 귀족들에게 인두세, 상속세, 혼인세 등 온갖 세금을 납부했다. 또한 게르만 귀족은 그들에 대한 재판권이 있었다.
 
귀족들이 평민들을 압도하는데 실패한 중화권<ref>《[[진서]]》를 보면 [[한나라]] 때까지는 [[천자]]부터가 검을 착용하였으며 관료들까지 심지어 궁중에서도 검을 착용하지 않은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한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시대가 되자 진검 대신 목검을 착용했고 사회에 무예에 대한 경시가 퍼졌다고 한다. [[한반도]] 역시 [[고려]]까지만 해도 귀족이 대놓고 무력으로 타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모습이 나온다.</ref>에서도 귀족적인 문화가 잔존했을 때는 귀족이 지배하던 다른 지역들과 비슷한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사무라이]]라는 군사 귀족이 탄생하였으나 그 역할을 하던 귀족이 따로 있었고 사무라이는 본래부터 귀족 출신이 아닌 탓인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위세<ref>사무라이도 원래부터 귀족 태생인 경우는 위세가 강했다.</ref>가 그리 강하지 못하였다. [[에도 막부]]까지 사무라이가 귀족 태생들 앞에서 무례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이묘]](아사노 나가노리)조차 [[할복]]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귀족들의 힘과 권위가 약해지면 사무라이가 귀족을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귀족 태생인 사무라이들도 있었기에 그들의 세력이 강해지면 그냥 사무라이 태생인 사무라이들은 [[덴노]](천황)와 구게(공가)가 권력이 없어도 굴복해야 했다.  
 
[[신라]]는 [[골품제]]에 의거해 귀족층을 규정했으며 [[고구려]], [[백제]] 역시 고추가, 막리지, 대성팔족, 좌평 등에서 귀족 의식이 나타났다. 고려와 [[발해]]는 과거 중국식 작위를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개조한 후 왕작, [[오등작]], 군호 등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압력과 본격적인 한족식 중화 문물 수용으로 인하여 귀족 문화가 양반 문화<ref>그러나 사실상 주요 양반 가문은 고려 귀족 출신이라 청요직인 3사에는 경화사족이 임용되었고 그보다 못하면 성균관, 그보다 못하면 교서관에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무과의 경우에도 한양 양반 같은 평이하게 좋은 출신은 선전관, 그보다 못한 출신은 수문청에 임용되었다.</ref><ref>경화사족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사대부들이자 지연과 학연에 따라 서울 인근에서 혼맥을 구축하여 정국을 좌우하던 벌열가·세도가의 일원이다.</ref>로 대체되었다.  
 
유목민들 역시 귀족들은 평민들과는 달랐다. [[칭기즈 칸]]에게 피해를 입은 귀족들은 미래에 [[황금씨족]]에게 복수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평민들은 조상이나 [[부모]]가 과거에 무엇을 당하든 내심 관심이 없었던 것<ref>심지어 황금씨족에 대한 동경으로 자민족이나 자국 귀족들의 복수를 방해하기도 했다.</ref>으로 보이며 칭기즈 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서로 다르게 대처<ref>평민 이하의 사람들은 그 집단의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하였으나 귀족들하고 원수가 되면 다 죽여서라도 완전히 끝장을 냈다.</ref><ref>[[여진족]] 귀족들 역시 과거 [[명나라]]의 정벌([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8 네르친스크 조약…중국, 연해주는 지켰지만… - 아틀라스뉴스]) 때 목숨을 살려주는 은혜를 받은 자들은 몽골이나 여진, 만주의 [[누르하치]] 등과 대적하면서 그것을 충분히 갚고 갔다. 물론 원인을 제공한 침략자라서 그런지 진짜로 충성하지는 않았다.</ref>했다.


=== 몰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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