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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의 부설은 1898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본격화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일본은 대륙으로의 군사력 투사에 있어 핵심 병참노선으로 이해 투사에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이 노선의 사전조사를 기 실시하고 있었다. | 경부선의 부설은 1898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본격화되었으나, 그 이전부터 일본은 대륙으로의 군사력 투사에 있어 핵심 병참노선으로 이해 투사에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이 노선의 사전조사를 기 실시하고 있었다. | ||
1892년에 수렵을 위장하여 고노 타카노부(河野天瑞)<ref>1857년생. 1925년 몰. 한문 시인 고노 텟토(河野鉄兜)의 아들. 1883년에 공부성 철도국 입국. 토목기사로 구레 진수부 건설공사 등에 관여하였다.</ref>를 필두로 한 측량반이 노선 측량과 답사에 착수하였다. 당시 답사경로는 낙동강 | 1892년에 수렵을 위장하여 고노 타카노부(河野天瑞)<ref>1857년생. 1925년 몰. 한문 시인 고노 텟토(河野鉄兜)의 아들. 1883년에 공부성 철도국 입국. 토목기사로 구레 진수부 건설공사 등에 관여하였다.</ref>를 필두로 한 측량반이 노선 측량과 답사에 착수하였다. 당시 답사경로는 낙동강 우안을 따라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문의, 청주를 경유하는 240마일의 경로였다고 한다.<ref>{{서적 인용|저자= |제목=한국철도사 |권=제2권 |날짜=1977 |출판사=철도청 |쪽= 9|ISBN= }}</ref> | ||
이후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의해 일본이 강압적으로 철도 부설을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경인선|경인]]과 경부철도의 부설을 위한 절차에 착수한다. 이 해 11월에는 센고쿠 미츠구(仙石貢)<ref>1857년생, 1931년 몰. 철도관료로 1884년 공부성 철도국 입부, 1896년에 퇴직하여 치쿠호 철도, 큐슈철도 사장을 역임. 1914년에 철도원 총재, 이후 철도대신 등을 역임하고, 1929년에 남만주철도 총재 취임.</ref>외 10여명으로 구성된 측량반을 파견하여 부설경로를 결정하기 위한 답사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청주, 영동, 추풍령을 넘어 금산, 인동, 대구, 밀양을 지나 부산에서는 구덕산을 관통하여 부산에 이르는 경로를 계획하였으며, 병행하여 조령, 문경, 상주, 선산을 거치는 루트와 경주, 문경을 통하는 루트를 비교선으로 답사하였다. 이 당시에 지형적으로 내륙산간지를 통과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점이었던 추풍령을 종단하는 루트를 발견하였다. | 이후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일잠정합동조관에 의해 일본이 강압적으로 철도 부설을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경인선|경인]]과 경부철도의 부설을 위한 절차에 착수한다. 이 해 11월에는 센고쿠 미츠구(仙石貢)<ref>1857년생, 1931년 몰. 철도관료로 1884년 공부성 철도국 입부, 1896년에 퇴직하여 치쿠호 철도, 큐슈철도 사장을 역임. 1914년에 철도원 총재, 이후 철도대신 등을 역임하고, 1929년에 남만주철도 총재 취임.</ref>외 10여명으로 구성된 측량반을 파견하여 부설경로를 결정하기 위한 답사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청주, 영동, 추풍령을 넘어 금산, 인동, 대구, 밀양을 지나 부산에서는 구덕산을 관통하여 부산에 이르는 경로를 계획하였으며, 병행하여 조령, 문경, 상주, 선산을 거치는 루트와 경주, 문경을 통하는 루트를 비교선으로 답사하였다. 이 당시에 지형적으로 내륙산간지를 통과하는데 가장 유리한 지점이었던 추풍령을 종단하는 루트를 발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