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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은 근대적 민족주의 · 민본주의 · 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한 개혁 운동으로서, 그 사상적 뿌리는 실학에서부터 발원하여 갑신정변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이후 독립협회 운동으로 뜻이 이어졌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은 한국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갑오개혁은 근대적 민족주의 · 민본주의 · 평등주의 사상에 입각한 개혁 운동으로서, 그 사상적 뿌리는 실학에서부터 발원하여 갑신정변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며 이후 독립협회 운동으로 뜻이 이어졌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갑오개혁은 한국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
갑오개혁 당시 시도된 개혁 정책 가운데 칭제건원, 영은문 철거, 조선협회 설립, 공문서에서의 한글 사용, 의회 설립 등은 1896년 이후 시도된 한글 | 갑오개혁 당시 시도된 개혁 정책 가운데 칭제건원, 영은문 철거, 조선협회 설립, 공문서에서의 한글 사용, 의회 설립 등은 1896년 이후 시도된 한글 <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창립, 칭제운동, 의회 설립 운동 등의 원조를 이룬다. 갑오개혁 정책 가운데 입헌군주제, 내각제, 재정 일원화 등은 군주권 강화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관파천 이후에는 폐기되었으나, 대외적 자주독립 지향, 지방자치제, 교통 · 통신시설의 확충, 근대적 상비군과 경찰제도의 수립, 사법제도의 확립, 능력 본위의 평등사회 지향, 교육제도 정립 등은 이후 근대적 개혁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 ||
갑오개혁의 추진 세력은 출세 지향적이기도 했으나 '이국편민(利國便民)'이라는 애국적 · 애족적 목표를 갖고 개혁에 임하였으며, 조선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외국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또한 특정 이념을 교조주의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점진적 · 개량주의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에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독자적인 경제력이나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비혁명적 정치집단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혁의 추진을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닌다. | 갑오개혁의 추진 세력은 출세 지향적이기도 했으나 '이국편민(利國便民)'이라는 애국적 · 애족적 목표를 갖고 개혁에 임하였으며, 조선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외국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려 했다. 또한 특정 이념을 교조주의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점진적 · 개량주의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에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독자적인 경제력이나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비혁명적 정치집단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혁의 추진을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