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 김좌진은 만주 길림으로 피신한 직후인 1918년경 [[대종교]]에 입교했으며, 1919년 3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39명 중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또한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에 가담하였고, 대한정의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군정서로 변모했을 때 총사령직을 맡았다. 참모장은 [[나중소]], 연성대장은 [[이범석]], 보병대대장은 [[김규식 (1882년)|김규식]], 부관은 김옥현( 金玉玄), 중군장교엔 [[이민화]], 김훈(金勳), 백종렬, 한건원 등이 맡았다. 김좌진은 1920년 2월초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 교재를 지급받아 서대파 십리평 산림지대에 병영을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사관연성소 총책임은 자신이 맡았고, 교관으로는 이범석, 김규식 등이 훈련을 담당했다. 사관연성소는 역사, 군사학, 병기사용법, 부대지휘법 등을 교육하였는데, 특히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역사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엄격한 군기와 규율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 결과 1920년 9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교성대를 조직했다. 한편, 김좌진은 국내비밀결사인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을 지원했다. 광복단결사대는 광복회에서 활동했던 [[한훈]]이 임시정부의 지원하에 1920년 4월 모병과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고, 암살단은 김동순, [[김상옥]] 등이 1920년 경찰서 파괴, 조선인 순사 및 친일조선인 처단, 조선인관리 퇴직강요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두 단체는 미국 의원단이 조선에 방한할 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제 관리들을 처단하고 폭탄을 이용해 관공서와 경찰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에 몸을 담기도 했던 김동순에게 무길를 제공했으며, 한훈 역시 거사에 사용할 무기를 대한군정서의 최우송으로부터 제공받았다. 김좌진은 주비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주비단은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만주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를 통한 활동도 전개했는데, 그 연결고리는 김좌진이었다. 김좌진과 주비단의 연락은 주비단원으로 활동했던 김동진(김좌진의 친동생), 김성진(金聲鎭. 김좌진의 종질(從姪))․김준한(金畯漢: 김좌진의 9촌), 김시현(金始顯)이 맡았다. 김시현과 김준한은 1919년 9월 중 김좌진을 만나 권총 등을 수령하여 국내로 반입했으며, 주비단은 군정서 도장과 영수증을 근거로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독립군정서'라고 새겨진 인장을 찍은 사령장을 제작하기도 했다. 주비단 부사령이었던 안종운도 단원 모집시에 "길림에는 군정서도 나왔으므로 독립은 된다"고 할 정도로 김좌진과 주비단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대대와 맞붙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 독립군 섬멸에 실패했다. 대한군정서는 일본군이 곧 보복할 것을 예측하고, 이에 대응할 태세를 갖추었다. 1920년 7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용과 [[안정근]]이 연변에서 독립군 각 부대를 설득했을 때, 김좌진이 이에 호응하여 연합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홍범도 부대는 최진동 부대와 이탈하여 8월부터 명월구를 거쳐 어랑촌으로 이동하였고, 국민회의 [[안무]] 부대와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도 곧 그곳에 도착했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9월 9일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끝난 뒤 서일 총재를 비롯한 일부 유수부대만 남겨놓고 600여 명의 기본 부대를 2개 대대로 나눠서 9월 18일부터 연길현 삼도만 세린하, 장인강을 거쳐 10월 10일경 청산리 어구인 송월평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홍범도의 의용군단, 국민회, 신민단, 한민회, 의민단 등과 함께 기지를 세워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10월 2일 '훈춘 사건'을 계기로 10월 12일 조선 주둔 19사단 37연단장 아즈마 소장이 영솔하는 73연대 3개 대대 기병 27연대의 2개 중대, 기관총 6개, 보병포 2개, 공병 대대 등의 병력을 이끌고 두도구로 침입하였다. 또 10월 13일에는 야마다 대좌가 인솔하는 보병 3개 중대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이 이도구를 거쳐 팔가자까지 진입했다. 대한군정서는 이에 맞서 싸울지 퇴각할지를 놓고 논의하다가 [[현천묵]]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후퇴하기로 결의하고, 당초 송월평에 기지를 건설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골을 거쳐 연해주 방면으로 깊숙이 피난하기로 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독립군은 청산리 오지에 위치한 백운평에서 노숙하였다. 다음날인 10월 21일 행군을 재개하였을 때, 일본 야마다지대 3개 중대 주력이 진입하였다. 이들은 백운평에 도착한 뒤 적군이 노숙하고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탐지하였다. 그리하여 야스가와 소좌가 인솔하는 1개 병력을 선두 부대로 추격하여 백운평에서 약 1천 미터 남짓 떨어진 지점에서 김좌진의 부대와 접전하였다. 당시 김좌진은 본부대는 계속 전진하고 적의 추격을 견제할 후속부대를 험준한 벼랑에 배치했다. 야스가와가 인솔하는 1개 중대는 대한군정서 후속부대를 상대로 오전 9시 30분경부터 약 30분간 이어진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측 정보 기록에 따르면, 야마다 지대는 10월 19일 삼도구를 출발할 때 야마다 대좌가 인솔한 부대를 좌익으로 하여 청산리골로 직행하고, 나카무라 소좌가 인솔한 1개 대대를 우익으로 하여 봉밀구골로 들어가게 했다. 나카무라 소좌의 1개 대대는 봉밀구골에서 마적패와 교전한 뒤 20일 청산리골 안의 증봉리 부근에서 본대와 합류하였다. 이후 야마다 지대는 10월 21일 백운평에서 독립군과 9시 반부터 30분간 교전하였고, 오후 2시반까지 추격하여 연해주까지 갔지만, 독립군이 산림을 이용하여 빠져나가서 위치 확인에 실패하고 철군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1921년경 '백운평 전투'에 대해 국무원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인용문2|제1연대장 [[홍범도]]는 기 부하 연대(6중대원)을 인솔하고 완루구 중앙 산록에 점위케 하고, 제2연대장 김좌진은 기 부하 연대(2대대원)을 이도구 좌편 고지에 점위케 하고, 제3연대장 [[최진동]]은 기 부하 연대(6중대원)을 인솔하고 이도구 우편 고지에 점위하야 은폐잠복하엿다가 아 후병이 항전하다가 패배를 가장하여 퇴각하면 적은 반드시 교만한 태도로 추격 수단을 취히리닌 기회를 실하지 말고 사격케 하라 하다.}} 김좌진의 제2연대는 백운평 전투 이후 어랑촌을 경유하여 새로운 탈출로를 모색하려 했다. 이때 천수평에서 숙영중인 일본군 기병부대를 발견하고, 그들이 소수이니 섬멸 후 어랑촌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천수평 전투에서 적 기병대를 격퇴하고 10월 22일 어랑촌으로 진입하려 했지만, 그곳에 야마다 지대 본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신속히 인근 고지를 점령하여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후 일본군 보병대가 몰려왔지만,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이를 저지했다. 하지만 일본군 포병부대가 사격을 가하면서 피해가 누적되었고, 일본군 보병대는 김좌진 부대가 위치한 고지의 바로 옆 고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김좌진 부대는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한편, 홍범도의 제1연대는 어랑촌 인근의 이도구에 주둔했다가 어랑촌 남단의 산악능선을 이용하여 완로구를 경유, 안도현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예상외로 빨리 접근하여 새벽녘에 완로구에 도착하여 수색을 개시하자, 홍범도는 완로구 산야에 매복하였다. 일본군이 접근해오자 기습 공격을 하였지만, 전력 보존을 우선시하였기에 적극적인 공세는 가하지 않고 삼림으로 깊숙이 철수해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쳤다. 이후 완로구를 경유해서 안도현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다시 어랑촌을 지나 천보산 또는 청산리 방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들이 어랑촌에 이르렀을 때,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과 교전하고 있는 상황이 포착되었다. 홍범도는 곧장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일본군은 이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어둠이 깔려서 상호간에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는 그 틈에 철수하기로 했다. 이 10월 22일 어랑촌 전투는 [[청산리 전투]] 중 기징 격렬한 전투였고, 양측간에 일정한 손실이 있었다. 그후 김좌진은 청산리를 거쳐 연해주로 후퇴하였고, 서일이 인솔하는 잔류부대는 서대파 부근과 라자구, 노무주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뒤 본대를 따라갔다. 한편 홍범도 부대는 신속히 천보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안도현으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거기에는 이미 일본군 1개 중대가 길목상에 배치되어 통로를 차단했다. 홍범도는 최대한 전투를 회피한 상태에서 통과하고자 일본군과 접전을 시도했지만, 이미 방어 배치가 되어있는 그들을 돌파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다시 청산리를 경유하여 안도현 방향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이후 고동하곡 인근까지 이동하면서 야마다 지대 추격대의 공격으로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의 포위망이 느슨했기 때문에 청산리에서 빠져나와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의 손실이 전사 60명, 부상 90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손실에 대해서는 초기엔 가노 기병대장 이하 950여 명이 사상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이후에는 1,200~3,000명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본국에 올린 보고서에는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이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와 독립군이 전과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는 주장과 일본군이 피해를 축소하였다는 주장이 현재까지 대립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청산리 전투가 전해졌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20년 10월 28일자 기사에서 김좌진의 청산리 전투에서의 활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인용문2|어로촌 이도구와 봉밀구 서북방 약 팔십리되는 후차창구 부근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인 기병연대의 힘을 합하여 22일 이른 아침부터 어로촌 이도구와 봉밀구의 두 사이되는 방면에 충돌하야 오후 일곱 시 경까지 싸움을 계속한 후 드디어 그들을 뒤편되는 밀림지대안으로 격퇴하였다. 그 싸움에 대한 일본군사의 손해는 전사 하사1, 졸 2, 부상졸 11명 기관총 1 소총 11 검 3 탄약 1200 안총(眼銃) 1 노획하였는데, 음모단의 두목은 김좌진이요, 부하 이삼백 명을 거느렸으며, 그 외에 초적단 칠팔백 명이 그에 참가한 듯 한데, 그의 합계는 일천명 내외인바 음모단의 사상은 다대할 모양이나 아직 알 수 없더라.}} {{인용문2|육군성 발표 두도구 방면에 출동 중인 토벌대는 21일 삼도구 서방지역에서 토비와 충돌되어 격퇴한 바 이 싸움에 아군 전사자가 삼 명이요. 부상자가 사명인데 토비의 사체는 십 명이요 기타 병기 약간을 얻었으며, 또 동 방면에 있는 일부 부대는 22일 밤에 이도구 봉밀구 중간에 서 적단과 전투를 개시하야 아군 전사자는 하사병졸 삼명이요. 부상자가 십일명과 기타 경상자가 있었는데 봉밀구 방면의 적들은 김좌진 일파와 홍범도 일파에 속한 가장 유력한 조선인 음모단이 집중되어 있는 단체이며, 병기는 기관총 기타 최신시기 무기를 가졌고, 병력은 삼천에 나리지 않는다고 하더라.}} 김좌진은 청산리 전투를 치른 후 1920년 말밀산현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연해주로 이동하여 통군서를 조직하여 사령관으로 일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세력이 위축되자 1922년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한 뒤 총사령관을 맡아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을 본거지로 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자들과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의 연합적인 성격을 띈 단체였다. 일본 측 정보기록인 '불령단 관계잡건' 1923년 9월 3일 <김좌진 행동에 관한 건>에 따르면, 김좌진 부대는 1923년 8월경 대한군정서원 400여 명, 무관학교 생도 60명, 연해주로부터 모집한 후보생 120명 등 합계 58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1923년 3월, 김좌진은 결사대원 김순갑(金淳甲)· 한경덕(韓敬德) 등을 국내에 잠입시켜 관공서를 파괴하고 고관을 암살하게 하였다. 또한 1925년 5월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신민부원에게 무기를 제공해 국내로 파견하기도 했으며, [[한창걸]] 등이 김좌진의 명령에 따라 국내 진공을 시도하다 중국관헌에게 마적으로 오인받아 교전 후 무장해제되기도 했다. 1927년 8월에는 국내로 특수공작대를 파견해 작전지도의 작성, 민중공작, 일군경의 주둔 배치 등을 조사했다. 이 작전은 신민부군 장교 이중삼(李重三) 등 3명이 3개의 노선으로 나누어 평양, 전라도 지리산, 그리고 경성을 경유해 북청까지 이르는 노선을 따라 활동하고 공작을 완수했다. 1928년 3월에는 기모자진이 직접 결사대를 이끌고 국내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들어와 일본 경찰들이 긴장하기도 했다. 김좌진은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1919년 말 김영진(金瑛鎭)을 국내로 파견해 대한건국단을 조직하고 충청도,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하게 했다. 이보다 앞서, 1919년 음력 6월경 천경수(千景洙)를 국내로 파견해 조병채(趙炳彩)에게 협조를 구하게 했다. 조병채는 1919년 6월 천경수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의뢰받은 뒤 1919년 음력 10월 김영진, 김세진(金世鎭)․신현창(申鉉彰) 등과 함께 충남 논산의 윤상기 집에서 회합을 갖고 백남식(白南式), 윤태병(尹太炳) 등과 함께 대한건국단을 조직했다. 대한건국단은 취지서를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배포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면서 자금모집에 착수했다. 1920년 말 단장 윤태병과 일부 단원이 체포되면서 위기를 맞이했지만, 이들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은 덕분에 나머지 단원들이 1920년대 말까지 계속해서 자금을 김좌진에게 송부할 수 있었다. 1920년 5월, 김좌진은 김도심(金道深)을 경성으로 파견해 자산가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게 하였다. 김도심은 1922년까지 경성에 머물면서 윤치성 등과 접촉해 자금 출자와 모금 협조를 부탁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으로부터 독립공채를 수령해 1923년 음력 3월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1923년 음력 5월에는 유정근을 국내로 파견하여 국내 자산가들에게 자금 협조에 대한 문서를 보냈으며, 유정근 본인은 김좌진의 밀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김좌진과 함께 직은 사진을 동봉했다. 김좌진은 이 시깅 보천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망명시켜 그의 자금력과 종교적 역량을 이용하려 했다. 당시 보천교는 전국적으로 3만에 달하는 교도가 있었고, 차경석은 300만원의 자금을 소유한 인물로 파악되었다. 유정근은 국내에 잠입하자마자 김동진, 김항규에게 협조를 구했고, 이들의 도움으로 보천교와 접촉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김재영 교수의 <일제하 보천교의 민족운동>에 따르면, 김좌진은 1924년 봄 보천교로부터 2만원의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