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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소식이 전해지자, 김용중은 곧바로 LA 타임즈에 '일본은 언제 만족하게 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투고하여 일본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또한 한인들의 반일 의지와 대미 충성을 서약하는 진정서를 국민회를 대표하여 미 국무부에 제출했다 그는 선전요령으로 미국 국방 협조에 충성을 다할 것, 한국 광복군을 극력 후원하여 동서에서 연합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을 격파할 것 등을 결정했다. 또한 주미외교부 위원장 [[이승만]]과 함께 당면문제 협의를 위한 워싱턴 특파원으로 선정되었다. 김용중은 1941년 12월 29일 워싱턴으로 향해 이승만과 합류했다. 이후 1942년 2월 27일 ~ 3월 1일까지 라파예트 호텔에서 개최된 대한인자유대회의 준비 및 진행에 힘썼으며, 2월 28일 영어로 연설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청원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의 연설은 WINX 라디오에서도 방송되었따. 또한 3월 7일 뉴욕에서 개최된 26개국 동맹원탁회의에서 이승만과 함께 초청받았으나 이승만이 감기를 이유로 불참하자 혼자 참석했다. 워싱턴 및 뉴욕에서 임무를 마치고 LA로 귀환한 김용중은 선전 활동 및 한중연대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42년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가 조직되자, 중국 입법원장 [[쑨커]]에게 축하 전보를 발송했으며, 중국 쌍십절과 관련해 [[장제스]]에게 축하 전보를 보내는 한편 LA 거류 중국인들의 쌍십절 축하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1942년 말 워싱턴을 방문한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의 [[김호 (1884년)|김호]]가 외교위원부의 문호를 확대해 위원을 확충하자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이 거부하면서,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이 분열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43년 초 국민회와 한족연합회는 이승만의 면직을 임시정부에 청원하고 [[이범석]]을 추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이를 거부했다. 한족연합회가 이승만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워싱턴사무소 설립을 주장하자,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는 1943년 12월 23일 연합회를 탈퇴했다. 이에 한족연합회는 1944년 6월 5일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하고 [[김원용(독립운동가)|김원용]]과 [[전경무]]를 상주시켰다. 이리하여 한국의 외교사무소가 2곳이 되어 버리자, 임시정부는 1944년 8월 외교위원부 개조 방침을 천명했다. 이에 하와이와 본토 각지에 산재하던 재미한인 17개 단체 중 13개 단체가 호응하여 재미한인각단체대표회를 개최하고 외교위원부를 개조했다. 김용중은 이 대표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할 위우너 15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구는 동지회가 불참했다는 이유로 개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한 주미외교위원회 인선과 내용을 발표했다. 재미 한인들은 30여 년간 지지하고 성금을 보내준 자신들의 결정을 무시하고 이승만을 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한 임시정부의 처사에 분노했다. 이리하여 갈등이 극에 달하자, 김용중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1943년 중반 워싱턴 D.C로 주거지를 옮긴 그는 한국사정사를 설립하였다. 이 조직은 1943년 비영리 문화조직으로 캘리포니아주에 법인등록을 하였으며, 1943년 9월 이래 본부를 워싱턴에 설치했다. 그해 11월 22일에는 [[송철]]과 함께 <한국의 소리>라는 월간 영자지를 간행했다. 창간호의 레터헤드에는 "자유에 헌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43년 11월 시작된 <한국의소리>는 1961년 3월 제265호까지 17년 5개월 동안 간행되었고, 1961년에는 기간행분이 모두 수록된 단행본이 출간되기도 했다. 또한 한국사정사가 발행하는 공보는 한국의 소리 발간 중단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한국의 소리'는 영문으로 발간되었으며, 재미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 국무부 등에 회람되었고, 한국사정사와 김용중의 이름을 알리는 매체 역할을 했다. 1943년 11월에는 한국의 소리가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전시정보국의 태평양지역 책임자 오웬 레티모어, 부책임자 조지테일러, 한국섹션 책임자 E.W. 쿤스, 뉴욕공립도서관, 중국 대서관 등에 배포되었다. 김용중은 이 월간지를 통해 한국 문제와 관련된 사건, 사실, 인물에 대한 정보, 평가, 비평, 분석, 보도 등을 전달했다. 그는 한국문제가 논의되는 장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시간과 경우가 허락할 때마다 백악관, 국무부, 전시정보국 등 한국 관련 부서에 편지를 썼다. 또한 기자들과 만나 한국 관련 기사 및 논평을 제공했으며, 라디오에 출연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이러한 그에 대한 미 국무부 전시정보국 관료들의 평가는 우호적이었다. 선교사 출신의 조지 매큔 박사는 김용중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용중은 LA의 공한 사업가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김호의 사위로, 지적이며 젊고 유능하다. 현재(1942년) 워싱턴에서 이박사와 협의중이다. 그는 한길수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며 현재의 논쟁에서 배제되어 있다. 나는 그가 견문이 넓고 정력적이기 때문에 매우 유용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던 E.W. 쿤스도 김용중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인용문|모든 한국인들의 목소리 가운데 유일하게 못마땅한 소리는 중경에서 김구가 보내오는 견해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그는 정확하게 (실상을) 보고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가 임시정부의 심정을 대변하지 않으리라고 믿고싶다. 귀조직이 미국 내 한국인들의 의견 중 광범위하게 선정된 여론 샘플을 제시해줄 것을 제안한다. 이는 전후 한국을 돕는 효과를 지닐 것이다.}} 이들이 이토록 호의적인 평을 내린 건 김용중과 개인적으로 두터운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쿤스는 김용중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고, 김용중은 한국 김치 맛을 그리워한 쿤스에게 김치 레시피를 제공했다. 또한 매큔은 한국의 소리에 여러 차례 글을 싣고 한국 지리에 대해 설명했다. [[호머 헐버트]] 역시 김용중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한국의 소리에 <한국의 문호개방>이라는 글을 4차례 연재하여 과거 고종의 밀사로서 활약했던 경력을 소개했다. 1944년 1월 3일 재미한족연합회 선전부장 명의로 전시정보국에서 방송한 이래, 그는 전시정보국과 긴밀한 연계를 맺었다. 김용중은 부지런히 성명을 발표하고 편지를 쓰고, 기자와 관리들을 만나 한국독립을 선전했다. 또한 1944년 9월 15일부터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44개 연합국의 국제연합구제부흥기관에 재미한족연합회를 대표해 방청객으로 참석했다. 이 무렵, 1945년 1월 5~17일간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재미한족연합회, 워싱턴사무소,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김용중의 한국사정사, 한길수의 중한민중동맹단, [[유일한]]의 고려경제회 등 5개 단체는 1944년 11월 이 대회에 참가하는 일을 놓고 논의했다. 회의 결과 유일한, 전경무, [[정한경]]이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정작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회의에 참석해 한국 대표로 자처하면서 갈등이 일어났다. 1945년 4~5월 샌프란시스코 회담이 열렀을 때, 김용중은 한국의 소리를 대표하여 언론인으로서 이 회담을 방청했다. 이때 5개 단체들도 참가를 시도했으나, 이승만의 독단적 행동이 이번에도 발목을 잡았다. 이승만은 미국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한국의 지배권을 양도했다는 '얄타 밀약설'을 제시했고, 미소 정부 당국의 공식 부인에도 불구하고 얄타 밀약설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심지어 미 국무부 관리들과 중국 국민당의 외교정책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이에 김용중은 미국무부장관과 영국외무장관에게 얄타 밀약설의 확인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두 장관은 근거가 없다는 답신을 보냈다. 또한 그는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참가한 호주, 영국, 그리스 대표단 등에게 편지와 한국의 소리를 보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이후 그는 1945년 5월 27일 LA Examiner 지에 성명서를 발표해 얄타 밀약설을 부정하며 한국의 독립이 카이로선언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했다. 전시정보국의 관료 Claude A. Buss는 김용중의 '한국의 소리'가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참가한 연합국들의 한국이해에 도움을 주었으며, 얄타밀약설을 부인하는 보도는 현명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