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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은 48대 6으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으며, 미국은 외교승인과 동시 미군정을 폐지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모든 것을 이관하였다.<ref name=imhkoreanwar1-04></ref> 처음부터 한반도 통일정부를 원치 않았던 소련은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 공동위원회가 한창 열리고 있을 무렵 김일성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책임자로 임명했으며 권력을 장악, 1946년 11월에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1947년 2월, 임시가 아닌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북한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었으며, UN에서 남한정부 수립 결의안을 채택하자마자 인민헌법을 만들고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내세웠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같은 날 김일성이 내각수상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imhkoreanwar1-04></ref> === 주한미군 철수 === 미국은 한반도 통일정부가 물건너가고 안보전략의 조정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 재정의 압박으로 군축을 실시했는데 전시동원으로 1,200만 명에 달하던 병력 중 수백만이 본래의 삶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한 소련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막강한 <s>공군!</s> 공군과 <s>[[데우스 엑스 마키나]]</s> 원자폭탄이라면 충분히 상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소련의 주력이 동유럽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비교적 위협수치가 낮았다.<ref name=imhkoreanwar1-05>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5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5.pdf]</ref> 미국은 동맹국인 중화민국이 내전에서 패배할 것을 대비해 1947년부터 일본을 새로운 방파제로 삼으려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소련이 미국을 겨냥, 태평양 방면으로 침공해올 것을 상정해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전략을 마련했다. 소련과 전면전이 발생하면 이 지역의 해공군기지를 활용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최종적으로 <s>본격 아포칼립스</s>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반도로 소련이 진격하게 되면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거니와 지상군 작전보다 한반도를 우회한 해공군으로 적의 본거지, 소련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였다.<ref name=imhkoreanwar1-05></ref> <s>천조국스러운 소련 평탄화작전. 그런데 적이 한반도만 노리면 어떡하지?</s>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단순히 공백지로 둘 수 없어서 이에 미국은 한국과 1948년 8월 24일 군사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군사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이 주한미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49년 6월 30일 철수가 완료된 시점에도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군사원조를 지원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북한의 군사침공의 대비보단 내부 치안과 경제원조에 원점을 두었다. 심지어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각종 항공기와 중화기의 지원을 본토에 요청하였지만 미국 정부에서 거절하였다.<ref name=imhkoreanwar1-05></ref> 북한에 4,300명의 군사고문단과 10개 이상의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각종 장비와 중화기를 제공한 소련과는 대조적인 상황이 벌어졌다.<ref name=imhkoreanwar1-06>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1권 6편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1K06.pdf]</ref> 본격적인 의미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전 후 10월 1일에 체결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미국의 대외정책의 표현, 애치슨 선언(?) ==== 미국의 대외정책이 애치슨 선언<ref>Press Club Speech on the Far East 1950-01-12 [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library/document/speech-on-the-far-east/]</ref>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이것이 한국전쟁을 야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애치슨 선언이 한국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의견이라 해명한 미국의 공식문서가 존재한다.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전략적 방어라인은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미국을—당시 일본은 미군의 군정이 실시되었던 미국의 해외 영토인 반면 대한민국은 어엿한 주권국가다—지키는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지, 마치 미국이 한국을 일부러 무방비상태로 두었다는 식으로 해석한 기자들을 질타한 것이다.<s>예나 지금이나 만국 공통 [[기레기]]의 존재.</s> 실제로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한국을 지키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파병을 실행하고 UN을 끌어들이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ref>Secretary Acheson and the Defense of Korea [http://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korea/large/documents/pdfs/kr-3-13.pdf]</ref> <s>그런데 이건 이거대로 미국이 노린 거라는 음모론이 존재.<ref>이것도 미국 기자인 스톤이 주장한 것. 자세한 것은 Stone, I. F.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참조</ref> 지켜줘도 뭐라 그러지 지키지 않아도 뭐라 그러지.</s> 또한 애치슨 선언은 오히려 국내 불안을 야기하기는커녕 다시 한국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제임스 마크레이의 [https://journals.lib.unb.ca/index.php/jcs/article/view/366/578 Dean Acheson's Press Club Speech Reexamined]에 따르면 에치슨의 연설의 주 목적은 남한을 방어선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일부 학자들이 애치슨의 표현인 "방어선 (defensive perimeter)"<ref>직역하자면 "방어적 주위"이다.</ref>에 집착해 애치슨 발언의 나머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이나 몇몇 학자들이 아직도 애치슨 발언이 한국전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ref>Some scholars have relied on the released Soviet documents to revive traditional interpretations of the Korean War. For example, Soh Jin-chull writes in a recent paper that "clearly ... the Korean War was 'initiated' and 'realized' by Stalin with the cooperation of Communist China." As part of a "collective conspiracy," he concludes, "it was the North Korean Communist counterpart who loyally obeyed and executed this War."81 Similarly, writers have attempted to attribute Stalin's decision to support an invasion of South Korea to Acheson's Press Club speech. Kim Hakjoon claims that when Stalin referred during his April meeting with Kim Il Sung to favorabl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he "probably had in mind the speech given ... by U.S.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 three months earlier in January, 1950."82 According to James G. Hershberger, Acheson's speech "may have been seen in Moscow as lending credence to the argument that Washington would not intervene militarily to rescue South Korea from being overrun."83 "The timing of Stalin's approval," Weathersby initially concluded in 1995, "must therefore have been at least in part a response to the new defense policy ... that placed South Korea outside the American defense perimeter in the Pacific."84 But Soviet documents do not sustain this interpretation, not least because just one of them even mentions the Press Club speech. </ref> 공개된 구소련 문서에는 전쟁의 시작 원인에 애치슨 발언이 끼친 영향이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1950년 1월 애치슨 관련 발언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애치슨 선언으로 한국이 배제되었으니 문제가 된다는 관점의 기사가 거의 없다. 가장 먼저 애치슨 선언을 언급한 경향신문엔 이승만과 기자 간의 대담이 실렸는데, 여기서 이승만은 애치슨이 1월 12일 기자구락단(Press Club) 연설에서 한국에 대한 확고한 지원을 해줄 것이라 말했으니 국민들은 걱정하지 말고<ref>경향신문 1950년 1월 15일자 신문 1면 기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1500329201001&officeId=00032]</ref>, 트루먼과 애치슨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ref>Memo of Conversation, January 28, 1950. Secretary of State File, Acheson Papers [http://www.trumanlibrary.org/whistlestop/study_collections/koreanwar/documents/index.php?documentdate=1950-01-28&documentid=kr-9-15&pagenumber=1]</ref> 거기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을 확고한 방어막으로 형성한 것이라 말하고 있어 에치슨 선언의 의미는 남한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는 의견이 있다.<ref>1950년 6월 10일자 경향신문 여적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6100032920102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6-10&officeId=00032&pageNo=1&printNo=1186&publishType=00020]</ref> 물론 애치슨 선언에서 한국을 명시하지 않은게 문제였다는 의견도 있었다.<ref>1950년 1월 21일 경향신문 사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0012100329201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0-01-21&officeId=00032&pageNo=1&printNo=1060&publishType=00020]</ref>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유튜브 영상이 포함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