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하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적으로 기록됩니다. 계정을 만들고 로그인하면 편집 시 사용자 이름만 보이며, 위키 이용에 여러 가지 편의가 주어집니다.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배경 ==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원인과 그 과정은 개전 1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수많은 사학자들의 연구 과제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의 발호와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광기, 독일 민족주의 등의 결합으로 불완전하게나마 설명되지만 1차 대전은 몇몇 원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너무 많다. 이를 최대한 간략히 하자면 유럽 열강 간의 갈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적 국가간 갈등 외에도 각 국가가 겪고 있는 내재적 문제나 제국주의로 발현된 민족주의 등도 빼놓을 수 없다. === 독일 vs 프랑스 관계와 러시아 ===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탁월한 외교술은 오직 철저하게 프랑스의 고립, 그리고 러시아를 우호 국가로 묶어두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과 프랑스는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된 상태였고, 양국은 서로를 주적으로 여기며 유럽 최대의 긴장을 낳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3개 제국 간의 결속을 강화하여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고 이는 비스마르크 재임 기간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비스마르크가 사실상 강요된 은퇴를 당하고, 독일의 외교 정책에서 러시아가 배제되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익을 중요시하며 세 제국간 동맹에서 러시아를 방치, 사실상 내쫓았고 이로 인해 안보 위협을 느낀 러시아는 자연스럽게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프랑스와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동맹을 체결한다. 러시아로서는 발칸 반도에서의 팽창 정책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전략으로 계속 장애를 겪는 가운데, 그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독일의 새 황제가 대놓고 오스트리아 편을 들면서 발칸에서의 남하 팽창책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고, 외교적 고립을 겪고 있던 프랑스로서는 러시아와의 동맹으로 고립을 탈피하고 동시에 독일의 배후에 거대한 동맹국을 두게 되는 이점을 안게 된 것이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제1·2차 모로코 사건 등으로 전면전 직전의 위기에까지 내몰렸으나 어찌어찌 무마되었다. === 독일 vs 영국의 세계정책 === 비스마르크 시기 독일은 영국의 세계 패권에 도전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본격적으로 세계 정책을 추진, 3B('''B'''erlin-'''B'''yzantium-'''B'''aghdad) 정책을 내세우며 유럽과 중동에 걸치는 철도망 부설, 그리고 이를 통한 발칸과 소 아시아, 중동에 걸친 독일의 절대적 영향력 확보에 나섰고, 이는 영국의 3C('''C'''airo-'''C'''apetown-'''C'''alcutta) 정책을 통한 인도양 패권 정책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틸피츠(Tirpitz)가 주도하고 빌헬름 2세가 적극 후원한 대해군 건설 계획은 전통적인 해군국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해상패권에 대한 직접적이며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독일은 단시간 내에 대규모 해군 함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여, 영국의 전통적 해상 우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고, 이는 영국에게 위기 의식을 불러 일으켜 맞대응을 유발함으로서 영국, 독일 두 열강이 중심이 된 대규모 건함 경쟁을 유발했다. 세계 대전이 터지기 직전 양국의 해군은 대규모로 팽창하여 엄청난 규모와 함께 막대한 예산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이처럼 독일이 새로운 최대 위협국으로 급부상하자 영국의 외교 정책도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 이래 19세기 영국의 외교 정책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의 남하 정책 저지에 초점을 두어 양국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불리는 충돌을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보다 독일의 위협이 더 심각해진 데다가, 그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해상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극동에서의 남하 정책이 실패하자 러시아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영국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1907년]])하기에 이른다. === 발칸의 불씨: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 === 16세기 이래 발칸 반도에서 절대적인 강자였던 [[오스만 제국]]이 18세기 후반 이후로 계속 약화되면서 그 빈틈을 채운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였다. 각각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을 대표하는 두 제국은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계속 팽창 정책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적극적인 보스니아 정책은 슬라브계 국가인 세르비아 왕국과 그 동맹국 러시아를 격분케 했다. 이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민족들이 오스트리아에 상당한 증오심을 갖게 만들었다. 훗날 사라예보 사건의 계기가 된다. 뒤이은 제1, 2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다시 한 번 명백히 보여주었다. 오스만의 공백으로 인한 발칸의 무게추는 점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쏠리게 되었고 지역의 불안정은 점점 심화되어 당대에 이미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지경이었다. === 사라예보 사건 === [[파일:사라예보 사건.jpg|섬네일]] 그리고 이 모든 내재된 충돌 요소들을 폭발시킨 것이 사라예보 사건이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인 결사 조직 검은손과 연계한 보스니아인 테러 조직 젊은 보스니아에 의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내외가 암살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1914년 6월 28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공식 후계자인 페르디난트황태자가 이틀에 걸친 군사기동훈련 사열을 마치고 공식 환영행사 및 결혼 14주년 축하행사 참석을 위해 부인 소피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공식 방문한 날이였다. 그러나 공식행사가 있던 이 날은 세르비아의 국가적 애도기념일인 비도브단(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왕국의 라자르 왕이 코소보에서 발칸 반도로의 세력확장을 추진하던 오스만제국의 무라드 1세와의 전투 결과 12,000명에 다하는 세르비아군 대다수와 함께 사망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일 )이였기 때문에 황태자 부부가 방문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비록 비도브단은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전한 것을 애도하는 기념일이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새로운 지배새력으로 등장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다름 없었기 때문) 그러나 황태자는 자신의 결혼기념일을 맞이해 왕가의 후손이 아니란 이유로 오랫동안 무시 받아 왔던 부인을 기쁘게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에만 집착하였다. -1914년 6월 27일 토요일 황태자 부부의 방문 하루 전 헤르체고비나의 사령관인 포티오레크 장군은 세르비아계의 폭력단체들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사라예보 인근에 22,000여 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노출된 무개차량에는 그저 120명의 근위대만 배치 했다고 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 아래 치안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는 것을 입장하기 위해 ) 추가로 경호 문제에 소홀했던 포티오레크 장군과는 달리 게르데 사라예보 경찰국장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여 시 군사위원회에 추가적인 경호 인력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극우 세르비아 청년들을 중심으로 1911년에 조직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가 통합해서 독립하는 걸 발해한다고 여기는 비밀결사단체인 ‘흑수단’은 황태자를 암살하기 위해 3명의 요원을 비밀리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파견하였다. 당시 흑수단 수장은 세르비아 육군본부의 정보부장으로 근무하던 디미트리예비치 대령(그는 독신으로 평생을 세르비아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 온 극우성향의 민족주의자였다.)이었는데 세르비아의 정부도 흑수단의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통제나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흑수단의 원래 암살 대상의 최우선의 목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현집 황제인 오제프 1세 였으나 이는 접근하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였고후계자로 확실시 되며 사라예보 방문 예정인 황태자를 목표로 바꾸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9시 30분 사라예보 역의 전용열차에서 내린 황태자 부부는 경호에 취약한 무개차량에 탑승하여 사라예보 시청으로 향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15분 황태자 부부를 태운 전용차량(오픈카)이 군중을 향해 웃으며 에플퀘이를 따라 라틴교에 도달했을 때, 차량 트렁크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으며 이는 행렬을 기다리던 암살단 7인 중 한 명인 차브리노비치가 근처에 있던 경찰에게 황태자 부부가 탑승한 차량을 확인한 후에 미리 준비해 온 폭탄을 차량에 던진 것이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폭탄은 차량 뒷쪽에 맞아 튕겨 나가 황태자 부부는 무사했지만 폭탄이 튕겨나간 바람에 장교 두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 1차 암살시도 범인 카브리노비치는 현장에서 도주하다 경찰에 체포 되었다.) 황태자 부부는 암살시도에도 불구하고 목적지인 시청까지 정상적으로 차량행진을 계속하도록 명령하였고 시청에서 환영행사를 무사히 마친 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암살시도를 사소하게 생각하고 기존에 숙소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변경하여 암살 시도로 인한 부상자들을 위문하기 위해 다시 차량(오픈카)을 타고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운전기사를 비롯한 경호요원들은 전달받지 못한 상황이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황태자 부부가 병원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운전기사는 기존에 계획된 행선지로 이동하려다 사령관의 호통을 듣고 잘못 든 길을 다시 되돌리려 후진을 하다가 엔진이 꺼지는 작은 사고가 발생하였다. 운전사가 다시 시동을 건 그때 황태자에 대한 1차 암살 시도 실패 직후 현장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암살단원인 프린치프(가브릴로 프린치프, 19세)가 황태자 부부를 태운 차량과 바로 앞 1.5m 거리에서 마주쳤다. 순간 프린치프는 준비해온 폭탄을 던지려 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가깝고 주변에 인파가 많아 폭탄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여 준비한 권총으로 황태자 부부가 탑승한 차량에 총을 쏘았는데 첫번째 총알은 소피 황태자비의 복부에 명중 하였으며, 두번째 총알은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목에 명중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45분 피격 직후 총독 관저로 급히 이동하는 차량에서 소피 황태자비가사망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사망하였다. -1914년 6월 29일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에 대한 조사는 현장에서 체포된 차브리노비치와 프란치프를 대상으로 우선 실시 되었고 사건 첫날에는 모두 자신들의 우발적인 단독범행임을 주장하였으나 이튿날인 6월 29일, 차브리노비치가 진술을 번복하고 자신이 프린치프와 공범이라고 진술을 바꾸었다. -1914년 7월 2일 암살단 7명에 대한 신원이 모두 밝혀졌다. -1914년 7월 3일 몬테네그로로 탈출한 1명을 제외한 6명 모두 체포되었다. 황태자 내외 암살이 보도된 시점에 이미 각국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럽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의 황태자 내외가 백주대낮에 암살된 명백한 테러 행위에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양국 간의 전쟁에서 그쳐야 할 것이, 위에서 언급된 유럽 국가 간의 갈등 관계에 결합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발칸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세르비아를 지지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세르비아 뒤에는 슬라브계 국가의 맏형 격인 러시아가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은 세르비아에 함부로 전쟁을 선포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기로 하였으나 이때 독일이 적극 지지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역사학계에서는 ‘백지수표’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 너희 마음대로 해라. 우리가 뒤를 봐주겠다.’ 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울러, 러시아와 전면전을 펼칠 경우 그 동맹국인 프랑스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프랑스에 대한 선제공격과 이를 위한 중립국 벨기에 침공을 준비했고, 이는 프랑스의 동맹국이자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하던 영국까지 말려들게 했다. 요약: 리브레 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로 배포됩니다(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리브레 위키:저작권 문서를 읽어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글이 직접 작성되었거나 호환되는 라이선스인지 확인해주세요. 리그베다 위키, 나무위키, 오리위키, 구스위키, 디시위키 및 CCL 미적용 사이트 등에서 글을 가져오실 때는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여야 하고, 만약 본인이 문서의 유일한 기여자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 문서는 불시에 삭제될 수 있습니다.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 () [] [[]] {{}} {{{}}} · <!-- --> · [[분류:]] · [[파일:]] · [[미디어:]] · #넘겨주기 [[]] · {{ㅊ|}} · <onlyinclude></onlyinclude> · <includeonly></includeonly> · <noinclude></noinclude> · <br /> · <ref></ref> · {{각주}} · {|class="wikitable" · |- · rowspan=""| · colspan=""| · |} {{lang|}} · {{llang||}} · {{인용문|}} · {{인용문2|}} · {{유튜브|}} · {{다음팟|}} · {{니코|}} · {{토막글}} {{삭제|}} · {{특정판삭제|}}(이유를 적지 않을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드시 이유를 적어주세요.) {{#expr:}} · {{#if:}} · {{#ifeq:}} · {{#iferror:}} · {{#ifexist:}} · {{#switch:}} · {{#time:}} · {{#timel:}} · {{#titleparts:}} __NOTOC__ · __FORCETOC__ · __TOC__ · {{PAGENAME}} · {{SITENAME}} · {{localurl:}} · {{fullurl:}} · {{ns:}} –(대시) ‘’(작은따옴표) “”(큰따옴표) ·(가운뎃점) …(말줄임표) ‽(물음느낌표) 〈〉(홑화살괄호) 《》(겹화살괄호) ± − × ÷ ≈ ≠ ∓ ≤ ≥ ∞ ¬ ¹ ² ³ ⁿ ¼ ½ ¾ § € £ ₩ ¥ ¢ † ‡ • ← → ↔ ‰ °C µ(마이크로) Å °(도) ′(분) ″(초) Α α Β β Γ γ Δ δ Ε ε Ζ ζ Η η Θ θ Ι ι Κ κ Λ λ Μ μ(뮤) Ν ν Ξ ξ Ο ο Π π Ρ ρ Σ σ ς Τ τ Υ υ Φ φ Χ χ Ψ ψ Ω ω · Ά ά Έ έ Ή ή Ί ί Ό ό Ύ ύ Ώ ώ · Ϊ ϊ Ϋ ϋ · ΐ ΰ Æ æ Đ(D with stroke) đ Ð(eth) ð ı Ł ł Ø ø Œ œ ß Þ þ · Á á Ć ć É é Í í Ĺ ĺ Ḿ ḿ Ń ń Ó ó Ŕ ŕ Ś ś Ú ú Ý ý Ź ź · À à È è Ì ì Ǹ ǹ Ò ò Ù ù · İ Ż ż ·  â Ĉ ĉ Ê ê Ĝ ĝ Ĥ ĥ Î î Ĵ ĵ Ô ô Ŝ ŝ Û û · Ä ä Ë ë Ï ï Ö ö Ü ü Ÿ ÿ · ǘ ǜ ǚ ǖ · caron/háček: Ǎ ǎ Č č Ď ď Ě ě Ǐ ǐ Ľ ľ Ň ň Ǒ ǒ Ř ř Š š Ť ť Ǔ ǔ Ž ž · breve: Ă ă Ğ ğ Ŏ ŏ Ŭ ŭ · Ā ā Ē ē Ī ī Ō ō Ū ū · à ã Ñ ñ Õ õ · Å å Ů ů · Ą ą Ę ę · Ç ç Ş ş Ţ ţ · Ő ő Ű ű · Ș ș Ț ț 이 문서는 다음의 숨은 분류 1개에 속해 있습니다: 분류: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