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5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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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5월 혁명 또는 68 운동(프랑스어: Mai 68)은 1968년 프랑스 파리 낭테르 대학[1]의 학내분규로 시작했으나 곧 프랑스 전체를 뒤흔든 저항운동으로 이후 서독, 미국, 이탈리아 등 서구 국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5월 혁명은 체제변혁이나 국가권력의 교체를 가져오지는 않았으며 주로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이비 붐 세대 성장으로 대학생 수가 65만이 넘어섰다. 그런데 교원 부족, 대형 강의 위주의 암기·주입식 교육, 교수들의 권위주의 등으로 인해 문제가 되었다.

샤를 드 골은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내걸고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그의 집권 기간 사회는 전반적인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1945~1975) 시기 프랑스 가계 소비는 한 세대에 2.7배나 증가했지만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고 여겼고, 물질적 풍요보다는 권위주의 타파, 정신적 자유를 갈망했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의 실업률이 증가하고 지역 간 불균형, 외국인 저임금 노동자 문제 등 경제문제가 생겨났다.

진행/결과[편집 | 원본 편집]

1968년 1월 8일 낭테르 대학 수영장 개장식 때 다니엘 콘 방디(다니엘 콘벤디트)는 행사장을 방문한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체육청소년부의 올해 백서를 읽어 보았다. 6백 쪽이나 되지만 청소년의 성 문제는 어느 구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라고 제기했지만 장관은 이를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학생들은 “만약 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기 풀 안에나 들어가시지”라며 장관을 행사장에서 쫓아냈다. 그 결과 학생들은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출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2]

그러자 대학 학생 6명이 미국베트남 전쟁 개전에 항의해 성조기를 불태운 혐의로 체포되자 학생운동을 이끌던 다니엘 콘벤디트는 강의실을 돌며 분노한 학생들을 규합했다. 대학본부를 점거한 학생들은 체포된 친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베트남전 반대, 자본주의와 기술관료주의에 젖은 대학교육 비판, 권위주의적 구질서 타파 등의 내용을 담은 선언서를 발표한다. 낭테르대가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운동 지도부의 징계를 발표하자 다른 대학에서도 퍼져나갔다.

이후 노동자운동, 여성, 소수민족 등과 같은 소수자 운동과 결합해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그러자 경찰은 폭력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 했고, 이 무력 진압으로 인해 시민들이 다치고 체포되는 일이 생겼다. [3]

1968년 4월, 5월만 해도 시위가 엄청난 규모였는데 5월 30일 드 골은 의회 해산을 일삼아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얻게 하고 학생운동 지도자 다니엘 콘벤디트가 추방령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해 최대 노조인 노동총동맹(CGT)이 합류를 거부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분화되고 정치권의 좌파진영도 학생운동을 놓고 분열했다. 프랑스 공산당(PCF)은 학생운동을 좌익 모험주의라고 비판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공산당이 드 골 정부와 공모를 한다고 비판했다.

이후 총선거에서 우파의 결집으로 샤를 드 골이 승리하였지만 드 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낙향했다. 그러나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조르주 퐁피두가 집권함으로써 결국 신좌파 세력은 정권 획득에 실패하고 말았다.[4]

영향[편집 | 원본 편집]

  • 68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 서독, 미국, 이탈리아 등 다른 서구 국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는 전학공투회의, 이탈리아에서는 ‘뜨거운 가을’ 운동이 일어났다.
  • 가부장적 권위주의적인 태도가 약화되어 자율과 자치에 기반을 둔 정치가 시작됐다.
  • 68혁명의 영향으로 프랑스 사회당이 등장하게 되었고 1981년에는 중도좌파 성향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는 동력을 낳았다.[5]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