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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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군사독재정권의 시기

제5공화국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시기부터 다음 대통령인 노태우가 취임하기 이전까지 존속되었던 대한민국의 5번째 헌정통치 체제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5.16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찬탈했던 박정희와 비슷하게, 전두환은 박정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10.26 사건으로 혼란한 틈을 노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치른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이 이끌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들을 정권 주요 요직에 배치시키며 제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외부 상황이 잘 조화를 이뤄 경제성장 및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병폐로 인해 정치, 사회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10.26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박정희가 심복 김재규에 의해 시해당한 후, 전두환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은 이 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하며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정권의 공백과 혼란스러운 국정을 이용하여 자신이 이끌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들을 동원하여 12.12 군사반란을 주동하고, 당시 계엄 사령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10.26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씌워 구속시키고 강제 예편시키는 하극상[1]을 저질렀다. 이후 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를 겁박하여 하야시킨 후, 자신이 제11대 대통령에 오르며 본격적인 신군부 독재시대를 예고했다.

그는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군부독재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총칼로 짓밞는 폭거를 일삼았고,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5공화국은 그렇게 기나긴 박정희의 군부 독재시대가 끝나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군화발로 짓밟고 일어선 또다른 독재의 시작에 불과했다.

전두환은 이런 시민 및 정치권의 끊임없는 민주화 요구에 결국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국민 투표에 붙이고 투표결과 가결되어 제8차 헌법개정이 이뤄졌다. 이후 실시된 대한민국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 전두환이 당선[2]되며 본격적인 제5공화국 체제가 출범했다.

정치[편집 | 원본 편집]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화 시도[편집 | 원본 편집]

5공은 집권 초기부터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점을 내세우며 국민 여론을 잡으려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제8차 헌법개정에서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다. 또한 전두환의 사조직인 하나회에 부정적이던 지난 정권의 실세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로 엮어서 구속하는 등 박정희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정의사회 구현을 표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의 핵심인사였던 김종필도 무사할 수 없었으며 5공 시절 내내 정치권 전면에 나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으로 정권의 견제에 시달렸다.

이렇듯 야당 정치인들의 손발을 묶어버리고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추악한 짓을 벌이면서도 형식상 야당을 2개나 만들어 구색맞추기를 꾀하였다. 이들 야당은 말 그대로 전두환 정권의 비호를 받는 관제야당으로, 전두환의 2중대, 3소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또한 대통령의 사실상 독재체제를 구축했던 유신헌법을 전면 부정하고, 대통령 임기는 7년 단임제로 헌법에 명문화하였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중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한 인사권을 삭제하고, 국회의 권한을 보장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내세웠다. 유신체제 하에서 사실상 정부의 탄압으로 야권 정치인이 제대로 된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점을 변화시켜 야권의 정치활동 및 대선후보 등록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가 아닌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 방식을 고수하였고, 유신체제와 겉으로는 차별화를 꾀했지만 여전히 정권에 의해 야권 탄압을 계속되어 실질적으로는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상은 독재를 추구하는 양면성을 보여줬다.

특히 자신의 심복들로 구성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5공 출범 이후 정치권 요직에 두루두루 배치시켰고, 중앙정보부에서 이름이 바뀐 국가안전기획부유학성, 장세동 등 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이용하였다. 하나회의 2인자인 노태우 역시 5공화국 시기 체육부 장관 및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정치 탄압[편집 | 원본 편집]

여느 독재 정부와 다름없이 전두환 정권 역시 자신들의 도덕성과 독재를 비판하는 야당 정치인들 및 재야인사,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실행하였다. 당시 야권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은 정권의 주도로 매서운 시련을 겪었는데, 김대중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세력으로 몰아 내란죄를 뒤집어 씌우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또한 김영삼은 2차례나 가택연금 당하였고,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가택연금 상태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인 김영삼 단식농성을 통해 정권을 비판했다. 이후 김대중은 외국의 사면요구에 부담감을 느낀 5공화국 정부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후 석방되었고, 그는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거센 민주화 요구 시위[편집 | 원본 편집]

독재 정권에 대한 반대 여론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사회에서도 폭넓게 형성되었다. 특히 이 시기 전국 주요 대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반정부 시위가 빈발했고, 이런 학생 시위를 주도한 총학생회 등은 이른바 운동권 학생회라 불렸다. 이들에 대한 정권의 탄압 역시 무자비하게 진행되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사회[편집 | 원본 편집]

사회 정화 정책[편집 | 원본 편집]

전두환은 5공화국의 도덕성 비난을 돌릴 일환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취지아래 사회 정화 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결과물은 그 유명한 삼청교육대로 귀결되었다. 사회악인 폭력배, 범죄자들을 색출하여 강도높은 재교육을 거쳐 사회로 환원한다는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일선 경찰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하여 무리하게 죄없는 민간인들을 억지로 잡아들이거나 사소한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교육대에 집어넣어 인권 탄압의 사례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삼청교육대에서 벌어진 각종 의문사도 많은 문제점을 보여줬다.

언론통제[편집 | 원본 편집]

전두환 정권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언론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사에 대해서 온갖 음해와 탄압을 가해 특정 언론과 통폐합 시키는 이른바 언론통폐합을 추진했다. 군사독재정권의 강압과 탄압에 못이겨 많은 언론사들이 정부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언론의 존재이유인 정부에 대한 감시 및 견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 시기 공중파 방송국인 KBSMBC 등은 메인 뉴스 시간인 오후 9시가 되면 뉴스 시작 시보와 함께 곧바로 오늘 전두환 각하께서는~으로 시작하는 이른바 땡전뉴스로 앞다퉈 정권의 환심을 사려는 비양심적인 보도행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민 정책[편집 | 원본 편집]

이른바 3S 정책[3]이라 불리는 우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12.12 군사반란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정권에 대한 민중의 비난과 비판을 유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정부 주도로 많은 규제철폐와 문화 개방이 이뤄진 것.

이전 정권에서 북한의 대남도발을 우려하여 야간 통행금지를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으나 전두환은 5공화국 출범 이후 빠르게 이 규제를 철폐했다. 이 영향으로 술집과 같은 유흥업소들이 호황을 누렸고, 성매매와 같은 섹스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3S 정책중 Sex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 프로 스포츠 활성화
3S 정책중 Sports에 해당하며, 5공화국 시기에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 농구대잔치와 같은 다양한 프로 스포츠가 적극 추진되었다. 또한 1986 서울 아시안게임,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며 국민적 관심을 돌리려는 정책이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간 흑백 방송으로 유지되던 공중파 방송이 컬러 방송으로 전환되었다. 실상 1974년 부터 국내 텔레비전 생산업체들은 컬러 텔레비전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국내에서 컬러 방송이 이뤄지지 않아 전량 해외 수출에 의지하고 있었다. 5공화국은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고, 부수적으로 VTR의 보급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3S 정책중 Screen에 해당한다. 또한 VTR의 보급과 함께 포르노 비디오의 유통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등 당시 정부로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경제[편집 | 원본 편집]

5공화국 시기의 대표적 경제조치로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 부실기업정리 등 독점자본의 재편과 수입자유화 · 자본자유화 등 개방경제체제 돌입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제반 경제조치는 국내 독점재벌과 외국 독점자본의 이익을 보장하고 이들의 경제지배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달러화의 약세, 저유가, 금리하락 등 이른바 3저 현상의 기류로 물가상승률이 낮아졌고, 수출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 특성상 달러화 약세로 인한 호황을 누렸으며,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활기를 띠며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한편 수출에 비례하여 수입에 대한 외국의 시장개방 요구도 높아져서 1986년 수입자유화율은 91.5%까지 높아졌고, 외국인의 투자비율도 전면개방되었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자본력이 뒷받침되는 대기업 및 재벌들에게는 좋은 기회였으나, 값싼 외국산 농축산물이 수입되면서 국내 농어민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국가의 주력 농산물인 의 자급률은 1970년의 86%에서 1985년에는 48.4%로 낮아졌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국가의 경제성장도 해마다 10% 내외의 고성장을 기록했으며, 국민의 생활수준도 나아져 1987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3,000 달러를 넘기기도 하였다. 다만 이러한 고성장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는 원인이 되었고, 이농민 대다수는 이렇다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빈민층으로 전락하여 막노동이나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외교[편집 | 원본 편집]

남북 관계[편집 | 원본 편집]

5공 시기 남북관계는 군부통치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집권 초기부터 대북정책은 상당히 유화적이었다. 이산가족 찾기를 시작으로 남북간 이산가족 고향상봉, 공연단 교환방문 등이 진행되었고, 남측 정부가 북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고, 이에 북측에서 특사를 파견해 일정을 조율하는 등 남북긴장구도가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화전양면전술은 어디가지 않아서,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테러와 같은 대남도발을 터트렸다. 특히 아웅산 사건은 직접적으로 전두환의 암살을 노린 중대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전두환은 예상외로 북측에 경고성 메세지를 보내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한다. 또한 19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자행한 대한항공 폭파테러 역시 명백히 북측 공작원의 소행으로 판명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또한 별다른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고[4] 조용히 넘겼다. 오히려 엄청난 수해를 입은 남측에 북측 적십자사 명의로 구호물품을 보냈을 때, 이를 수용하는 등 주적인 북한을 상대로 오랜기간 군생활을 했던 군사정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북측의 도발에 인내심을 보였던 시기이다.

한미 관계[편집 | 원본 편집]

한미 관계는 이 시기 미국에 절대적으로 저자세로 일관한 시기이다. 아무래도 12.12 군사반란이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자행하면서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물밑작업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미국도 사실상 이러한 군사정권의 독재를 용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운동을 계엄군이 무력진압할 당시 미국측의 묵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시민사회에서 반미기조가 나타나기도 했었고, 위기감을 느낀 미국측이 자국민들을 소개할 목적으로 비밀리에 작전을 준비했다. 결국 참다못한 대학생 시위대가 서울과 부산의 미국문화원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부산 미국문화원에서는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는 등 반미시위가 절정으로 치닫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미국 정부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론을 들먹이며 대한민국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이 방한하여 전두환과 면담하였고, 전두환은 남한의 핵무기 개발을 전면 백지화 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등 미국측에 저자세로 외교를 벌여야만 했다.

한일 관계[편집 | 원본 편집]

국민 여론은 전통적으로 식민지배의 원흉인 일본에 대해 극단적인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박정희 정권에 추진되었던 한일수교 과정에서 무조건 수교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빈발했다. 전두환 정권은 대일기조를 무조건적인 반일이 아닌, 우리나라의 힘을 키워 일본을 넘어서야 한다는 극일주의를 내세웠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5공 집권시기에 1988 서울 올림픽이 확정되었고, 1986 서울 아시안게임이 개최되는 등, 스포츠 외교에 있어서는 괄목할 성과를 보여줬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긍정적[편집 | 원본 편집]

  • 규제 완화 및 유신체제 청산
5공화국은 출범 이전 제8차 헌법개정을 통하여 유신헌법의 폐단인 대통령의 종신집권과 관련된 항목들을 대거 정리하였고, 임기 7년에 중임을 배제한 단임제를 명시하여 헌법상 유신체제를 청산하였다. 또한 유신체제와의 차별성을 내세워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비리혐의로 정계에서 축출하였으며 야간 통행금지 전면 해제 및 각종 유화정책으로 국민들의 기본권을 다소 보장하였다.
  • 경제 호황
달러화 약세, 저유가라는 외부요인도 작용했지만, 5공화국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던 김재익 수석의 뛰어난 경제정책은 분명 인정받아 마땅한 대목이다.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세력은 5공화국으로 집권한 후에도 경제분야에서 만큼은 자신들의 전문성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경제 전문가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는데, 당시 경제계획을 담당했던 김재익 수석은 전두환의 신뢰를 얻어 자신의 의지대로 다양한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안타깝게도 김재익 수석은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에 휘말려 순국하고 말았다.

부정적[편집 | 원본 편집]

  • 군부독재체제
5공화국은 겉으로는 유신체제 청산,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우며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였으나 엄연히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사정권이다. 박정희의 군부정권과 비교하여 이른바 신군부라 불리던 이들 세력은 5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공권력을 남용하며 수많은 인권 탄압을 자행했다. 특히 야당 정치인들을 노골적으로 억압하였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및 김영삼 가택연금 등은 대표적인 5공화국의 정치탄압 행위였다. 또한 일반 시민이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강경진압 일변도로 대응하였고,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5공화국 공권력의 잔혹성을 드러냈다.
  • 언론 통제
언론통폐합을 정권 주도하에 추진하였다. 이는 곧 정권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 본연의 목적을 와해시키는 정책이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방침에 반발한 언론사는 광고 탄압이나 음해 공작등에 휘말려 사실상 공중분해 수준으로 와해된 후, 정권에 협조적이던 언론사에 강제로 통합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땡전뉴스처럼 언론사들이 스스로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는 굴욕적인 보도를 공공연하게 내보내며 거센 사회적 비판을 받아야 했다.

사건/사고[편집 | 원본 편집]

이 시기를 다룬 대중매체[편집 | 원본 편집]

2005년 4월 23일부터 2005년 9월 11일까지 문화방송에서 방영하였던 드라마이다.

각주

  1.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계급은 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소장이었다.
  2. 하지만 이 선거 역시 국민들의 직접선거가 아닌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였고, 이미 야당 후보들을 탄압하여 정치활동을 묶어놓고 사실상 전두환 1인 후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3. Sports, Sex, Screen의 앞 글자에서 유래된 명칭. 즉 대중의 관심을 즐길거리로 돌림으로써 사회적 불만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무마시키려는 정책이다.
  4. 시기가 제13대 대통령선거 직전이기도 하였고, 임기말 레임덕 현상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5. 이 프로그램은 동년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총 453시간 45분을 생방송으로 방영했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