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YMCA 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구한말, 많은 한인 학생들은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의 앞선 문명과 서양의 학문을 익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 교사, 학생, 경찰 등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자, 유학생끼리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조선유학생학우회, 조선기독교청년회, 조선학회, 조선여자친목회 등 여러 친목회를 결성했다. 그중 조선유학생학우회는 도쿄 유학생 전원이 가입하여 모임을 여러 차례 가지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던 1918년 1월 8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했다. 그중 5조는 민족자결주의를 담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 이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모든 식민지 문제는 자유롭고 열린 자세로,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조정해야 한다.
윌슨은 6조와 13조 까지의 항목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적용될 구체적인 대상 지역을 거론했다.
6조 러시아, 7조 벨기에, 8조 프랑스, 9조 이탈리아, 10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11조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 국가들, 12조 오스만투르크 제국, 13조 폴란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은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걸 도울 의사가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윌슨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내내 조선의 독립에 대해 어떠한 옹호 발언도 하지 않았고, 조선의 위임통치를 부탁하는 한인 지식인들의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한인 유학생들도 윌슨이 정말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나서줄 거라고 보지 않았다. 서춘(徐椿)은 1918년 11월 22일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학우회 편집부 주최 현상연합웅변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 이번 전쟁에서 각국 모두 정의인도를 주장하지만 이는 표면의 언사일 뿐 만약 미국이 주의가 진실로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이라면 무슨 이유로 필리핀을 독립시키지 않는가. 영국에서는 진실로 정의 인도를 설파한다면 어째서 인도를 독립시키지 않는가. 모두 입으로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말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의도 인도도 없다. 개인 간에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을 대등이 주장할 수 있더라도, 나라와 단체에서는 실력이 없으면 어떤 이익도 향유할 수 없다. 요컨대 우리는 말보다 실력의 향상에 노력한 뒤에 정의 인도를 주창해야할 것이다. “
서춘은 미국과 영국이 필리핀과 인도 등 자신들의 식민지를 먼저 해방시키지 않는 상황에 문제제기를 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그들이 말하는 정의, 인도, 자유, 평등에 의문을 표시했다. 결국 독립을 쟁취할 실력 없이 는 정의 인도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식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제기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곧바로 조선의 독립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서 신중하게 접근하는 입장은 재일유학생계 내부에서 2·8 독립선언을 결의한 1919년 1월 6일 웅변회 직전까지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이들이 독립선언을 하기로 마음 먹은 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래 수많은 국가가 탄생하고 여러 민족이 독립하는 상황에서, 조선인이 독립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 사람들이 "조선인은 일본의 지배에 순응하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할 걸 염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1918년 12월 15일 미국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원조해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보도가 '더 저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zer)에서 보도되자, 유학생들은 자신들 역시 나서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리하여 1919년 1월 6일,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웅변회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실행위원으로는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윤창석, 이종근, 최근우, 김상덕, 전영택, 송계백, 서춘 등 10명을 선출했다. 실행위원들은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것을 결정하는 등 구체적 실천 계획을 추진했다. 그들은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이와 같은 결의사항을 보고하고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그러던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마침 서울에서 도쿄로 온 이광수, 김철수를 추가해 총 11명의 실행위원이 구성되었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으로 백관수, 김도연, 이광수 등이 선출되었고, 선언서 초안 한 부는 송계백, 최근우에 의해 국내로 전해졌다. 한편 최팔용은 2월 7일 <민족대회소집 청원서>를 1,000부 인쇄하여 일본 각계와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태세를 갖췄다. 다음날 아침 10시, 실행위원들은 준비된 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각국 대사관, 공사관, 각계 대신, 귀족원, 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오후 2시 YMCA 회관에서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를 개최했다.
총회의 개회 선언, 개회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려는 "긴급동의"의 소리가 높아졌고, 독립단 대표 11명의 서명이 적힌 독립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때 경찰관들이 난입하여 지도 멤버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로 인해 사전에 국내로 간 최근우, 최팔용, 그리고 1월에 중국으로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실행위원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2월 12일 유학생 100여 명이 히비야 공원에 모여 이달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독립선언서를 재차 발표하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이달 등 13명이 체포되면서 실패했다. 2월 23일에는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가 결성되어 동맹휴학 운동을 단행했다. 3·1 운동 발발 직후, 많은 유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대표자(서명 순서)[편집 | 원본 편집]
전문[편집 | 원본 편집]
국한문혼용[편집 | 원본 편집]
국한문혼용체의 극한 케이스.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宣言書
全朝鮮靑年獨立團은我[1]二千萬朝鮮民族을代表하야正義와自由의勝利를得한世界萬國의前에[2]獨立을期成하기를宣言[3]하노라
四千三百年의長久한歷史를有한吾族은實로世界最古文明民族의一이라[4]
비록有時乎支那의正朔을奉한事는有하엿으나此는朝鮮皇室과支那皇室과의[5]形式的外交關係에不過하엿고[6]朝鮮은恒常吾族의朝鮮이오一次도統一한國家를失하고異族의實質的支配를受한事無하도다
日本은朝鮮이日本과脣齒의關係가有함을自覺함이라하야一千八百九十五年日靑戰爭의結果로日本이韓國의獨立을率先承認하엿고英、米、法、德、俄[7]等諸國도獨立을承認할뿐더러此를保全하기를約束하엿도다[8]
韓國은그恩義을感하야銳意로諸般改革과國力의充實을圖하엿도다.
當時俄國의勢力이南下하야[9]東洋의平和와韓國의安寧을威脅할ᄉᆡ日本은韓國과攻守同盟을締結하야日俄戰爭[10]을開하니東洋의平和와韓國의獨立保全은實로此同盟의主旨와韓國은더욱그好誼에感하여陸海軍의作戰上援助는不能하엿으나主權의威嚴까지犧牲하야可能한온갓義武를다하야써東洋平和와韓國獨立의兩大目的을追求하얏도다
及其戰爭이終結되고當時米國大統領루쓰별트氏의仲裁로[11]日俄間에講和會議開設될ᄉᆡ日本은同盟國인韓國의參加를不許하고日俄兩國代表者間에任意로日本의韓國에對한宗主權을議定하엿으며日本은優越한兵力을待하고韓國의獨立을保全한다는舊約을違反하야[12]暗弱한當時韓國皇帝와그政府를威脅하고欺罔하야「國力의充實함이足히獨立을得할만한時期ㅅ가지라」는條件으로韓國의外交權을奪하야此를日本의保護國을作하야韓國으로하야곰直接으로世界列國과交涉할道를斷하고因하야「相當한時期ㅅ가지라」는條件으로司法·警察權을奪하고更히「徵兵令實施ㅅ가지라」는條件으로軍隊를解散하며民間의武器를押收하고日本軍隊와憲兵警察를各地에遍置하며甚至에皇宮의警備ㅅ가지日本警察을使用하고如此히하야韓國으로하여곰全혀無抵抗者를作한後에多少明哲의稱이有한韓國皇帝를放逐하고皇太子를擁立하고日本의走狗로所謂合倂內閣을組織하야秘密과武力裏에서合倂條約을締結하니玆에吾族은建國以來半萬年에自己를指導하고援助하노라하는友邦의軍國的野心에犧生되엿도다
實로日本은韓國에對한行爲는詐欺와暴力에서出한것이니實上如此히偉大한詐欺의成功은世界興亡史上에特筆할人類의大辱恥辱이라하노라.
保護條約을締結할時에皇帝와賊臣안인幾個大臣들은모든反抗手段을다하얏고發表後에도全國民은赤手로可能한온갖反抗을다하얏으며司法,警察權의被奪과軍隊解散時에도然하얏고合倂時를當하야는手中에寸鐵이無함을不拘하고可能한온갓反抗運動을다하다가精銳한日本武器에犧牲이된者ㅣ不知其數며以來十年間獨立을恢復하랴는運動으로犧牲된者ㅣ數十萬이며慘酷한憲兵政治下에手足과口舌의搭制를受하면서도曾히獨立運動이絶한적이업나니此로觀하여도日韓合倂이朝鮮民族의意思가아님을可知할지라.如此히吾族은日本軍國主義的野心의詐欺暴力下에吾族의意思에反하는運命을當하얏으니正義로世界를改造하는比時에當然히匡正을世界에求할權利가有하며또世界改造에主人되는米와英은保護와合倂을率先承認한理由로此時에過去의舊惡을贖할義務가有하다하노라.
또合倂以來日本의朝鮮統治政策을보건대合倂時의宣言에反하야吾族의幸福과利益을無視하고征服者가被征服者의게對하는古代의非人道的政策을應用하야吾族에게는大小政權,集會結社의自由,言論出版의自由를不許하며甚至에信敎의自由,企業의自由까지도不少히拘束하며行政司法警察等諸機關이朝鮮民族의人權을侵害하며公利에吾族과日本人間에優劣의差別을設하며日本人에比하야劣等한敎育을施하야써吾族으로하야곰永遠히日本人의被使役者를成하게하며歷史를改造하여吾族의神聖한歷史的,民族的傳統과威嚴을破壞하고凌侮하며小數의官吏를除한外에政府의諸機關과交通,通信,兵備諸機關에全部或은大部分日本人만使用하야吾族으로하여곰永遠히國家生活의智能과經驗을得할機會를不得케하니吾族은決코如此한武斷專制不正不平等한政治下에서生存과發展을享受키不能한지라.그ㅅ분더러元來人口過剩한朝鮮에無制限으로移民을奬勵하고補助하야土着한吾族은海外에流離함을不免하여國家의諸機關은勿論이오私設의諸機關에까지日本人을使用하여一邊朝鮮人으로職業을失케하며一邊朝鮮人의富를日本으로流出케하고商工業에日本人의게는特殊한便益을與하야朝鮮人으로하야곰産業的發興의機會를失케하도다.如此히何方面으로觀하야도吾族과日本人과의利害를互相背馳하며背馳하면그害를受하는者는吾族이니吾族은生存의權利를爲하야獨立을主張하노라.
最後에東洋平和의見地로보건대그威脅者이던俄國은이의軍國主義的野心을抛棄하고正義와自由와博愛를基礎로한新國家를建設하랴고하는中이며中華民國도亦然하며兼하야此次國際聯盟이實現되면다시軍國主義的侵畧을敢行할强國이無할것이라.그러할진대韓國을合倂한最大理由가이믜消滅되얏을ㅅ분더러從此로朝鮮民族이無數한革命亂을起한다하면日本의合倂된韓國은反하야東洋平和를攪亂할禍源이될지라.吾族은正當한方法으로吾族의自由를追求할지나萬一此로써成功치못하면吾族은生存의權利를爲하야온갓自由行動을取하야最後의一人까지自由를爲하는熱血을濺할지니엇지東洋平和의禍源이아니리오.吾族은一兵이無호라.吾族은兵力으로써日本을抵抗할實力이無호라.然하나日本이萬一吾族의正當한要求에不應할진대吾族은日本에對하야永遠의血戰을宣하리라.
吾族은久遠히高等한文化를有하얏고半萬年間國家生活의經驗을有한者ㅣ라.비록多年專制政治의害毒과境遇의不幸이吾族의今日을致하얏다하더라도正義와自由를基礎로한民主主義의上에先進國의範을隨하야新國家를建設한後에는建國以來文化와正義와平和를愛護하는吾族은반다시世界의平和와人類의文化에貢獻함이有할지라.
玆에吾族은日本이나或은世界各國이吾族에게民族自決의機會를與하기를要求하며萬一不然하면吾族은生存을爲하야自由行動을取하야써吾族의獨立을期成하기를宣言하노라.
決議文
一,本團은日韓合倂이吾族의自由意思에出하지아니하고吾族의生存과發展을威脅하고또東洋의平和를攪亂하는原因이된다는理由로獨立을主張함.
二,本團은日本議會及政府에朝鮮民族大會를招集하야該會의決議로吾族의運命을決할機會를與하기를要求함.
三,本團은萬國講和會議에民族自決主義를吾族에게도適用하게하기를請求함.右目的을達成하기爲하야日本에駐在한各國大公使에게本團의主義를各其政府에傳達하기를依賴하고同時에委員二人을萬國講和會議에派遣함.右委員은旣히派遣한吾族의委員과一致行動을取함.
四,前項의要求가失敗될時는吾族은日本에對하여永遠의血戰을宣함.此로써生하는慘禍는吾族이그責에任치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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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편집 | 원본 편집]
모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겨레는 실로 세계 최고의 문명 민족 중 하나다
비록 어떤 때에는 중국의 정삭을 받든 적은 있었으나 이는 조선 황실과 중국 황실과의 형식적인 외교 관계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조선은 늘 우리 겨레의 조선이오 한 차례도 통일한 국가를 잃고 다른 민족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은 적 없도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순치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고 영·미·프·독·러 등 여러 나라들도 독립을 승인했을 뿐더러 이를 보전하기를 약속하였도다
한국은 그 의리에 감동하여 마음을 다잡고 여러 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꾀하였도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니 일본은 한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펼치니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 보전은 실로 이 동맹의 뜻과 한국은 더욱 그 호의에 감동하여 육해군의 작전상 원조는 불가능하였으나 주권의 위험까지 희생하여 가능한 온갖 의무를 다하여서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의 양대 목적을 추구하였도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씨의 중재로 러일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리니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불허하고 러일 두 나라 대표자 사이에 임의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의정하였으며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옛 약속을 어기고 나약한 당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여넘겨 「국력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얻을 만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한국으로 하여금 직접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교섭할 길을 끊고 그로 인하여 「상당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사법·경찰권을 빼앗고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며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 군대와 헌병 경찰을 각지에 두루 두며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 일본 경찰을 쓰고 이리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전혀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 뒤에 꽤 사리에 밝다 일컬어지는 한국 황제를 내쫓고 황태자를 내세워 일본의 사냥개로 이른바 합병 내각을 조직하여 비밀과 무력 속에서 합병조약을 맺으니 이에 우리 겨레는 건국 이래 반만 년에 스스로를 이끌고 도와준다고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실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니 실상 이렇게 위대한 사기의 성공은 세계 흥망사 상에 특필할 인류의 큰 수치이자 치욕이라 하노라.
보호조약을 맺을 때에 황제와 불충한 신하가 아닌 몇몇 대신들은 모든 반항 수단을 다하였고 발표 뒤에도 모든 국민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온갖 반항을 다하였으며 사법, 경찰권의 피탈과 군대 해산 때에도 그리 하였고 합병 때에 이르러서는 손 안에 쇠붙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온갖 반항 운동을 다하다가 날랜 일본 무기에 희생된 자가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뒤 십 년 간 독립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희생된 자가 수십만이며 가혹한 헌병 정치 아래 손발과 입과 혀의 규제를 받으면서도 일찍이 독립운동이 끊긴 적이 없나니 이를 보아도 한일합병이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알 수 있을지라. 이렇게 우리 겨레는 일본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 아래 우리 겨레의 의사를 거스르는 운명을 맞았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요새 당연히 바로잡기를 세계에 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에 주인되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앞장서 승인한 까닭으로 이때에 과거의 오랜 과오를 씻을 의무가 있다 하노라.
또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선언을 거슬러 우리 겨레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작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써서 우리 겨레에게는 대소정권,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허락치 아니하며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잖이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모든 기관이 조선민족의 인권을 침해하며 공공의 이익에 우리 겨레와 일본인 사이에 우열의 차별을 두며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실시하여서 우리 겨레로 하야금 영원히 일본인의 심부름꾼이 되게 하며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 겨레의 거룩한 역사적, 민족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욕하며 소수의 관리를 뺀 그 밖의 정부의 모든 기관과 교통, 통신, 병비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만 써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 생활의 지능과 경험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없게 하니 우리 겨레는 결코 이러한 무력과 억압을 사용한 국가 장악과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 아래에서 생존과 발전을 누릴 수 없는 지라. 그 뿐더러 원래 인구가 많은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여 대대로 살아온 우리 겨레는 해외로 떠돌기를 면치 않게 하여 국가의 모든 기관은 물론이요 사설의 모든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써서 한편 조선인에게 직업을 잃게 하며 한편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흘러가게 하고 상공업에서는 일본인에게는 특수한 편익을 주어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흥의 기회를 잃게 하도다. 이렇게 어떤 방면으로 보아도 우리 겨레과 일본인과의 이해를 서로 어긋나게 하며 어긋나면 그 피해를 받는 자는 우리 겨레이니 우리 겨레는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마지막에 동양 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그 위협자이던 러시아는 이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와 박애를 기초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중이며 중화민국도 또한 그러하며 더불어 이번 국제연맹이 실현되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라.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가장 큰 이유가 이미 소멸되었을 뿐더러 이로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 전쟁을 일으킨다 하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거슬러 동양 평화를 교란할 화근이 될지라. 우리 겨레는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겨레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치 못하면 우리 겨레는 생존의 권리를 위하야 온갖 자유 행동을 취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유를 위하는 뜨거운 피를 흩뿌릴지니 어찌 동양 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오. 우리 민족은 일병이 없어라. 우리 겨레는 병력으로써 일본에게 저항할 실력이 없어라.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
우리 겨레는 아득히 뛰어난 문화를 가졌고 반 만년 간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진 자라. 비록 많은 세월 전제 정치의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 겨레의 오늘로 이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겨레는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지라.
이에 우리 겨레는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겨레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겨레는 생존을 위하여 자유 행동을 취하여서 우리 겨레의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결의문
1. 우리 단체는 한일 합병이 우리 겨레의 자유 의사로 나오지 아니하고 우리 겨레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또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우리 단체는 일본 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해회(該會)의 의결로 우리 겨레의 운명을 정할 기회를 주기를 요구함.
3. 우리 단체는 만국강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겨레에게도 적용하기를 청구함. 오른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한 각국 대공사에게 우리 단체의 주의를 각기 정부에 전달하기를 의뢰하고 동시에 위원 두 명을 만국강화회의에 파견함. 오른쪽 위원은 이미 파견한 우리 겨레의 위원과 일치 행동을 갖음.
4. 전 항의 요구가 실패될 때에는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함. 이로써 생기는 참화는 우리 겨레가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
출처: 위키문헌(퍼블릭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