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레 장종

장종(莊宗)
생몰년도 1514? ~ 1548
즉위 전 황자
부모 아버지 소종, 어머니 가경태후
재위 1533 ~ 1548
시호 유황제
묘호 장종
국적 대월(여씨)

베트남 후 레 왕조의 제12대 황제이자, 중흥 여가(中興黎家)의 초대 황제. 묘호는 장종(莊宗), 시호는 유황제(裕皇帝). 휘는 여녕(黎寧). 이명은 여순(黎㫬). 소종(昭宗)의 아들이자, 공제(恭帝)의 조카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여녕은 소종의 아들로 가경태후 범씨 소생이며 대략 1514년경에 태어난 걸로 추정된다. 즉위 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이를 보면 그다지 주목받진 않았던 황자로 보인다.

이후 그가 어느 정도 자랐을 즈음, 황실은 진고의 반란과 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전을 진압하고 군권을 장악한 무인 막당중이 부왕과 숙부 공제를 몰아내고 1527년 황위를 찬탈한다.

황실이 망해 있을데가 없어진 여녕은 남쪽으로 도주했다. 명분이 없던 찬탈극은 여조의 신하들을 포섭하지 못했고 여의(黎意)가 청화에서 봉기하며 막씨 대월에 저항했다. 청화의 토박이인 완감은 잠주(岑州)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조의 후예를 찾았으며 마침내 1532년 소종의 아들인 여녕을 찾았다. 마침 부흥군의 수장 여의도 막씨에게 처형당해 완감은 여녕을 1533년 장종으로 옹립한다.

장종이 즉위함에 따라 재건된 레 왕조를 중흥 여조(中興黎朝)라 구분한다. 하지만 말만 중흥이란 거창한 말이지, 실상은 황제 장종은 그저 완감의 괴뢰일 뿐 모든 권한은 완감이 장악했다. 이후 완감이 막조의 장수 양집일에게 위장항복으로 1545년 독살당하자 그 권한은 완감의 사위인 정검이 물려받아 베트남 역사상 유일한 막부정주를 세운다.

일단 괴뢰인 형태로 재건된 후여조였지만 부흥운동은 활발하여 풍극관(馮克寬), 양유경(梁有慶)을 비롯한 장수들의 도움으로 중흥여조는 고토를 탈환하고 산남(山南)지역을 막씨 대월과의 경계로 삼았다. 대월은 경계가 둘로 구분됨에 따라 약 60년간 이어질 내전기인 남북조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장종은 3년 후인 1548년 사망했고 아들인 여훤(中宗)이 제위를 이었다. 이후에도 괴뢰가 된 여조의 황제들은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정검의 후손들이 대신 권한을 휘두르는 막부가 유지되었다.

기록에 대한 의문점[편집 | 원본 편집]

장종의 1514년 출생설을 채택하면 부왕인 소종과 나이차가 8살밖에 나지 않는데, 상식적으로 부왕과 나이차가 그렇게 적게 나는건 이해하기 어렵다. 조혼은 빨라도 10대에 거행하는데 이 점은 장종이 여황실 출생인지 의문점을 들게 한다.

또한 장종이 막조의 공격으로 피난갔을 때, 명사(明史)엔 장종의 동생 여헌이 1533년 섭정왕으로 연호까지 개원하고 4년간 임시로 나라를 다스렸다는데, 정작 대월사기전서에는 여헌과 관련된 기록이 없다. 당시 대월이 혼란기이긴 하나 여러모로 기록의 일치함을 보여주지 않는 왕이다.

가계도[편집 | 원본 편집]

  • 부 : 소종(昭宗) 여의
  • 모 : 가경태후(嘉慶太后)
    • 장종(莊宗) 여녕
        • 자(子) : 중종(中宗) 여훤
    • 제(第) : 대왕(代王) 여헌(黎憲)

참고 항목[편집 | 원본 편집]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후여조의 역대 황제
12대 공제 여춘 13대 장종 여녕 14대 중종 여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