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의 난

황건적의 세력도

황건적의 난(黃巾賊- 亂)은 중국 후한 말기,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백성들이 태평도라는 종교와 만나 황건적이라는 무리가 되어 들고 일어난 민중봉기이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태평도 창시[편집 | 원본 편집]

후한 거록 땅에, 장각이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대현량사라고 자칭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장각은 스스로 아홉 마디가 나 있는 지팡이를 짚고 설교하고 다녔는데, 170년대 초 무렵부터는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여 포교에 힘썼다. 이같은 교리는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10여 년 사이에 화북의 동반부로부터 양자강 유역에 걸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으로 성장, 그 이름을 태평도라 했다.

장각은 이 신도들을 36개의 방(方)으로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빈민의 반권력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군사적인 조직이 되기도 했다. 즉, 장각은 천공장군이라 호를 지어 최고위에 앉고, 2명의 동생 중에서 장보는 지공장군, 장량은 인공장군이라 일컬었으며, 1만 명 전후의 신도로 이루어지는 방(方)의 책임자로는 장각의 제자가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신도로부터는 사(師: 스승)라 불림과 동시에 방은 그대로 장군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태평도는 후한 정부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정부는 탄압책을 강구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이것은 도리어 신도의 단결과 교단의 조직을 강화시키고, 반(反)권력적인 성격을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봉기[편집 | 원본 편집]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 황건적의 구호

장각은 한의 창천(蒼天) 대신 황천(黃天)의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60년 주기(周期)가 새로이 시작되는 갑자년(甲子年)인 184년의 음력 3월 5일을 기해서 봉기하려고 했다. 장각은 부하 마원의를 보내 뇌물을 주어 환관 봉서를 꾀어낸다.

그러나 궐기할 날짜를 눈앞에 두고 봉서에게 편지를 전하던 장각의 부하 당주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각의 심복 마원의와 환관 봉서가 처형되고 관련자 1,000명이 옥에 갇힌다. 정부의 탄압의 손길이 뻗쳤기 때문에 장각은 갑자기 예정을 변경하여 음력 2월에 일제히 봉기하여 순식간에 전국 각지에서 대반란이 일어났다.

진압군 편성[편집 | 원본 편집]

황건적의 난은 후한 전국 열세 곳에서 일어나고 이에 후한 황제 영제는 외척이자 대장군 하진과 대책을 의논한다. 이리하여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해 모집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경과[편집 | 원본 편집]

의병을 일으킨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 유주 태수 유언을 만난다. 얼마 뒤 황건적 대장 정원지가 5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비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유주의 관군 대장 추정과 함께 유주성 앞 대흥산에서 대치한다.

정원지는 부장 등무를 내보내 맞서게 했으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에 의해 베인다. 이에 정원지는 직접 나서지만 오히려 유비의 의형제 관우에 의해 목이 베인다.

대장 정원지가 쓰러지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고 유비 삼형제는 황건적들을 무찌른다.

유주성 전투 후 다음 날 황건적에게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한 청주 태수 공경의 편지가 도착한다. 유주 태수 유언은 교위 추정을 시켜 군사 5000명을 보내 유비와 함께 청주의 황건적을 무찌르게 한다. 청주성에 도착한 유비는 황건적들을 끌어들여 계곡으로 유인한 뒤 무찌른다.

공경도 군사를 내어 황건적을 앞뒤로 포위해 무찌르고 유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유비는 광종으로 노식 장군을 도우려 가지만 노식의 의견으로 1000명의 병사들을 내주어 황보숭과 주준을 도와주려 영천으로 향한다.

예주 영천의 산골 장사현에서는 한나라 관군 대장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주준은 첫 전투에서 황건적의 대군을 이끌고 있는 파재와 싸우지만 패배하고 주준이 장사에서 농성으로 들어가자 파재는 이를 포위한다. 그러자 주준은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동생 장량과 장보와 합류한 파재를 화공으로 공격해 무찌른다.

장량과 장보는 형 장각이 있는 광종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조조를 만나 1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6월에는 팽탈의 황건군은 다시 격파했고 남은 황건적들은 예주 자사 왕윤이 이끄는 별동대와 관군의 협공으로 격파당하면서 예주의 황건적은 모두 평정한다.

유비는 뒤늦게 전투 후에 도착해 황보숭과 주준의 명으로 다시 노식이 있는 광종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비는 광종으로 가던 도중 노식이 뇌물을 거절해 모함을 받아 중랑장 자리를 빼앗기고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유비는 탁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노식에게서 받은 1,000명의 군사를 돌려보내고 탁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탁군으로 가던 도중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에게 쫓기던 노식에게서 중랑장 자리를 빼앗은 중랑장이자 서량 자사 동탁을 도와준다. 그러나 동탁은 유비가 벼슬이 없는 것을 알고 무시하고 결국 주준에게로 갔다. 이를 본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을 참살하게 해달라고 허락을 요구했으나 장온은 동탁과 이민족의 관계를 내세우며 거절했다.

유비와 주준이 양성에서 장보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각이 병으로 사망해 황건적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장각의 뒤를 이어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관군 대장 황보숭과 거록 태수 곽전은 황건적의 본거지 곡양을 기습 공격하고 기도위 조조를 앞세워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승리한다.

결국 장량은 곡양에서 전투 중 전사하여 목이 베이고 만다. 조정에서는 공을 세운 황보숭과 조조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황보숭의 상소로 노식을 다시 중랑장으로 임명한다.

양성에서 대치한 유비와 주준의 관군과 장보의 황건적은 치열하게 싸우고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황건적들의 부장 고승을 베면서 황건적들은 양성으로 쫓겨 들어간다. 이에 유비는 기다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해 황건적들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유비의 작전은 그대로 성공해 장보의 부장이던 엄정이 장보를 살해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남양 지역에서는 3월 장만성이 황건군을 이끌고 남양을 공격해 남양 태수 저공을 죽이고 이에 6월 새로 임명된 남양 태수 진힐이 장만성을 죽였으나 다시 손중, 조홍, 한충 등이 군사를 모아 형주의 완성에서 저항하자 유비와 주준은 남양 태수 진힐, 형주 자사 서구와 합류해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전한다. 전투 중 손견의 1500명의 군사와 합류하여 다시 재정비를 하여 유비는 북문, 손견은 남문, 주준은 서문을 공격한다.

손견과 유비는 성벽을 넘어 황건적들을 무찌르고 손견이 조홍을 사살하고 손중 역시 동문으로 도망가다가 유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한충도 남양 태수 진힐에게 죽고 10월 마지막 남은 손하의 황건군마저 괴멸당하면서 남양군 10개의 고을이 평정된다.

그러나 황건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않았고 188년이 되자 황건과도 관계있는 백파(白波)의 적(賊)이 산시성(山西)에서 일어나고, 산둥성(山東) 방면에서는 칭조우(淸州)와 쉬조우(徐州)의 황건이 연달아 맹위를 떨쳐 전국을 전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뜨렸다.

그 후에는 192년 동탁이 죽고 이각곽사가 서량군을 무찌른 틈을 타서 청주에서 다시 수십만 명에 이르는 황건적이 들고 일어나 제북상 포신과 연주 자사 유대까지 전사시키는 등의 위세를 떨쳤다. 이에 이각은 주준의 추천으로 종군태수 조조를 시켜 청주의 황건적들을 토벌하고 제북까지 공격해 100일 만에 황건적 30만 명을 항복시키고 청주병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황건적들의 활동을 계속되어 194년 황건적 잔당의 대장 관해가 군대를 이끌고 청주의 북해를 습격하기도 했으나 북해의 황건적들은 유비와 태사자에 의해 토벌되고 그 뒤에도 연주와 서주 일대에서 계속 약탈을 자행하던 황건적 대장 하의, 하만, 황소의 황건적 잔당은 조조에 의해 다시 토벌되었다.

평가와 의의[편집 | 원본 편집]

후한이라는 나라는, 실질적으로 이 난을 전후로 해서 멸망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황건적의 난은 그때까지 있었던 민중봉기 중 최대의 난이었다. 이 난에 의해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크게 약해졌으며, 반면에 난을 평정하면서 조조, 원소, 동탁 등 제후들은 크게 힘을 쌓았다. 후에 촉한을 세운 유비 역시 황건적의 난을 통해 난세에 이름을 알렸다.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있어 황건적의 난은 이후 벌어지는 군웅할거와 삼국정립보다 더 높은 가치와 의의를 가진다. 원말의 백련교의 성장으로 인한 명나라의 건립 등의 사례와 더불어 황건적의 난은 중국 역사에서 종교가 제국의 교체를 불러온 대표적 예로 꼽히고 있다.

이 난을 계기로 중국에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589년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재통일할 때까지 중국은 400년 넘게 혼란기의 연속을 맞게 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