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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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원본 편집]

화성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은 범인 이춘재1986년 9월 14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10차례에 거쳐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반경 2km 이내에서 10명의 피해자들을 살인한 사건이다. 범인은 사건 발생 후 33년이 지난 2019년이 되어서야 이춘재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은 개구리 소년 사건,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DNA 검사를 통해 경찰이 이춘재를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 결국 2019년에 이춘재가 33년 전 자신의 범행을 모두 자백하면서 오랜 미스테리가 풀리게 되었고, 화성 연쇄 살인 사건도 무려 33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해결되었다.[1]

총 10건의 살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1986년~1991년에 걸쳐 일어난 10건의 사건은 모두 화성시 태안읍 인근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일어났으며, 피해자의 연령대는 노인이나 청년이나 어린이를 가리지 않았다. 또한 살인 방법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는데, 피해자들의 가슴에 난도질을 한다던가 속옷을 벗겨 두 손을 묶어서 살해하기도 하였다...

첫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1986년 9월 14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서 자신의 딸의 집에서 잠을 자고 새벽 일찍 귀가하던 이완임 할머니(72)가 귀가 도중 피살되었다.

당시 이완임 할머니는 새벽 6시의 이른 시간, 딸이 밥을 먹고 가라고 제안을 하였지만, 두고 온 밭일이 우려되기도 하고 채소를 팔 일도 있었기에, 결국 제안을 거절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그렇게 이른 시각부터 빠르게 귀가하던 할머니는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실종 소식을 들은 딸은 할머니를 찾아다녔겠지만, 이후 5일 후인 9월 19일, 할머니는 딸의 집에서 고작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한 목초밭에서 목장 주인에 의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피해자의 시신은 하의가 벗겨진 상태였고 두 다리가 X자 형태로 꼬아진 상태였으며, 주변에는 피해자가 당시 신고 있었던 고무신과 양말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채소를 팔아서 당시 피해자가 갖고 있었던 현금 몇 푼은 주변에 버려지지 않고 그냥 사라졌다.

피해자 부검 결과 사인은 목 조름으로 인한 질식사, 즉 교살로 밝혀졌으며, 피해자의 질액에서는 양성 반응이 나왔으나 정액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은 피해자가 범인에게 목초밭까지 끌려가 교살당하였다고 추정하고 수사를 진행하였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첫 번째 사건은 단순 뺑소니 사건으로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두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그런데 첫 번째 피해자가 발생한 후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던 1986년 10월 20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이번엔 자신의 수양어머니를 뵌 후 귀가를 위해 버스를 타러 가던 박현숙 씨(25)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둑길을 걸어가던 중 피살되었다.

당시 피해자는 송탄시에 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수양어머니를 뵙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 곳을 찾았으며, 수양어머니의 집에서 피해자는 한 남성과 맞선을 보았다. 피해자는 그 남성과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고, 이후 오후 8시 50분경, 귀가를 위해 마을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당시 마을 입구까지는 수양어머니께서 배웅을 해주셨지만, 마을 입구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려면 어두운 둑길을 약 1km 정도 걸어가야 했다. 피해자는 무서움을 뒤로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날 날씨가 워낙 흐려서 둑길이 다른 때보다 훨씬 어두웠으며, 인적도 그날따라 굉장히 드물었다. 피해자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계속해서 둑길을 걸어갔고, 그 길을 걷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실종되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0월 23일, 피해자는 논 주인에 인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수로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은 뭐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으며, 가슴과 등에서 날카로운 흉기로 찔린 듯한 상처가 여러 군데 발견되었다. 또한 당시 피해자의 가방에 손톱깎이가 있었는데, 당시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한 뒤 이 손톱깎이를 이용해 피해자의 몸 군데군데에 상처를 낸 흔적이 있었다. 목에는 스타킹이 감겨져 있었고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은 둑에 모두 버려져 있었다. 또한 강간의 흔적이 있었으며 정액 반응에 양성 반응이 나오게 된다. 경찰 수사 결과 사인은 역시 목 조름으로 인한 질식사, 즉 교살로 확인되었다.

또한 당시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꽁초, 우유팩, 그리고 모발이 발견되었으며, 경찰은 이 흔적들을 국과수에 분석 의뢰한다. 후에 국과수 분석 결과 위의 흔적들은 B형 남성의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이번 사건 역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범인을 검거하지도 못했다.

세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그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난 1986년 12월 12일, 또다시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던 권정분 씨(25)가 귀가 도중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당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날의 작업이 모두 끝나고 오후 6시 경, 남편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수원시로 버스를 타고 간다. 이후 남편을 만난 피해자는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먼저 귀가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게 되는데, 이 때의 시각은 오후 10시 30분 쯤이었다. 이후 오후 11시 경, 버스는 피해자의 집 근처인 안녕리 삼거리 정류장에 도착하게 되고, 피해자는 정류장에서 자신의 집을 향해 걷게 된다. 그렇게 계속해서 걸어 이제 집을 100m도 남겨두지 않았을 시점, 피해자는 흔적도 없이 그대로 실종되었다.

그로부터 무려 4개월이 지난 1987년 4월 23일, 피해자는 한 논 주인에 의해 부대 자루 아래에서 부패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논은 피해자의 집에서 불과 50m 정도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시신의 상태가 매우 처참했는데, 하의가 벗겨져 있는 상태에서 거들이 입에 물려져 있는 상태였으며, 머리에는 혈흔이 묻어 있는 속옷이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무려 4개월 만에 발견된 시신인지라 부패가 매우 심하여 신분 확인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가지고 있던 소지품 중 도장이 발견되어 피해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은 피해자가 성폭행 당한 후 교살 당하였다고 가정하고 수사를 펼쳤으나, 결국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를 찾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이 쯤 되면서부터 국민들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네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세 번째 피해자가 발생한 후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던 12월 14일[2], 이번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던 이계숙 양(22)이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근무 후 경기도 수원시에서 맞선을 보고 있었는데, 맞선을 보던 남자와 마음이 잘 맞아 맞선이 굉장히 잘 진행되었다고 한다. 피해자는 한창 데이트를 즐기다가 버스가 끊길 무렵이었던 오후 10시 이후, 맞선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게 된다. 이후 오후 11시경, 피해자는 종점에서 내리게 되는데 종점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1km 정도 떨어져 있어 상당히 많이 걸어야 했다. 피해자는 집을 향해 길을 걷게 되고, 이후 그대로 실종되었다.

피해자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진 가족들은 맞선남에게 전화를 걸어 피해자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보게 되는데, 버스를 태워서 집으로 보냈다라는 맞선남의 대답에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게 된다. 경찰은 피해자가 실종된 관항리를 이 잡듯이 수색하지만 그로부터 7일이 지난 12월 21일, 결국 피해자는 관항리의 한 논둑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피해자의 시신은 양손이 블라우스로 뒤로 묶여져 있었으며, 걷옷으로 입고 있던 빨간 투피스는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즉, 범인은 걷옷과 블라우스를 벗기고 다시 걷옷을 입혔다는 말이 된다. 거들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스타킹으로 목이 졸린 상태였으며, 사인은 역시 목 조름으로 인한 교살로 확인되었다. 또한 충격적인 흔적이 하나 더 발견되는데, 시신의 하의 부분에는 우산으로 미친 듯이 난행을 한 흔적이 발견된다.

시신은 일주일이나 지났기에 많이 부패되어 있었고, 하필이면 사건 당일에 비까지 오는 바람에, 시신의 부검 및 혈액형 검출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이번에도 경찰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사건을 종결시킬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이로부터 약 한 달 정도 지난 1987년 1월 10일[3], 또다시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황계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던 홍진영 양(22)이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그 날 자신의 회사에 이력서를 낸 후 경기도 수원시의 북문 인근에서 자신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었고, 이후 오후 8시 30분 경에 자신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된다. 그로부터 약 20분이 지난 8시 50분경, 버스는 피해자가 내릴 반정리 정류소에 도착하게 되고, 이후 피해자는 버스를 내려 집으로 걸어가게 된다. 사실 피해자의 집은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둑길을 어느 정도 걸어야 되는 위치에 있었고, 87년도 당시에는, 더구나 화성시 태안읍에는 근처에 사람이나 가로등도 전혀 없어서 사방이 모두 캄캄한 상황이었다. 약간의 무서움과 불안감을 느낀 피해자는 빠른 걸음으로 둑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지만, 결국 그녀는 집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없었다.

홍 양은 다음 날인 1월 11일, 논 주인에 의해 볏 짚단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시신은 두 손이 브래지어로 묶인 채 목에는 목도리가 감겨져 있었으며, 성폭행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옷은 모두 입혀져 있었다.

사인은 목도리로 목을 졸려 교살당한 것으로 판별이 났고 시신에서 정액 등이 검출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피와 섞여서 검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단, 혈액형 B형이 검출되기는 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드디어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인지하였다. 당시 수사 기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인지가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연쇄 살인이라는 것을 알아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사건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여섯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다섯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4개월 쯤 지난 1987년 5월 2일, 이번에는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우산을 들고 남편을 마중 나왔던 박은주 씨(29)가 범인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5월 2일 저녁, 당시에는 엄청난 폭우가 내리고 있었고, 때문에 우산을 안 가지고 간 남편이 생각난 피해자는 두 개의 우산을 들고 오후 9시경, 남편이 내리게 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이후 오후 9시 30분경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피해자는 후에 도착할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후 오후 10시경, 정류장에서 그대로 실종되었다.

한 편, 남편은 그 날 야근으로 인해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집 인근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게 되는데, 당시 여전히 폭우가 내리고 있었지만 정류장에 자신을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를 쫄쫄 맞으면서 간신히 도착한 집에도 아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지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이틀이 지난다. 하지만 이틀 후인 5월 4일이 되어도 아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결국 남편은 경찰에 아내의 실종 신고를 접수하게 된다. 경찰은 또다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였음을 깨닫고 피해자의 마지막 위치 근방을 샅샅이 수색하게 되며, 수색 도중 피해자의 생전 마지막 장소였던 버스 정류장 인근 논에서 피해자가 당시 신고 있던 샌들 한 짝을 발견한다. 이를 토대로 피해자가 변을 당한 것이 거의 확실해지게 되었기도 하다.

그리고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난 5월 9일, 결국 피해자는 정류장 인근 야산에 있는 무덤가 옆 소나무 숲에서 산을 넘어 하교하던 아이들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시신은 상의가 벗겨져 있었고 블라우스와 브래지어가 목에 감겨져 있었으며, 두 손이 뒤로 묶여져 있었다. 또한 츄리닝 바지가 벗겨졌다가 다시 입혀진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역시나 성폭행 흔적이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사인은 목 조름으로 인한 교살로 밝혀졌으며, 특이하게도 벗겨진 피해자의 츄리닝 상의에서 A형의 것으로 보이는 정액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피해자의 남편이 A형으로 알려졌고, 부부 사이에서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이번 사건 역시 범인을 특정하는 게 상당히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지만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고, 이번 사건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약 1년 4개월이 지났다. 그동안은 화성시에는 별다른 해프닝이 없었다. 화성 시민들은 어느 정도 안도를 하고 있는 시점이었으나... 마지막 사건으로부터 1년 4개월이 지난 1988년 9월 7일,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던 안기순 씨(54)가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당일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자신의 첫째 아들이 운영하던 분식점에서 일손을 돕고 있었으며, 이후 오후 8시 30분경, 집으로 향하는 시내버스에 몸을 싣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버스는 곧 가재리 정류장에 도착하게 되고, 피해자는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곧 피해자는 집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하고 길을 걷던 도중 그대로 실종되었다.

한 편, 아내가 돌아올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자,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해당 지역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기에 불안해진 남편은 곧바로 다음 날, 아는 가족, 지인, 친척들에게 연락해 피해자를 함께 찾아줄 것을 부탁했고, 남편과 친척들은 피해자가 살아있기만을 바라며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피해자는 남편의 사촌에 의해, 피에 흥건히 젖어있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피해자의 시신은 두 손이 블라우스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또한 성폭행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치마를 벗겼다가 다시 입힌 듯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로 목을 졸려 질식사한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이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국과수 부검 결과 피해자의 하체에는 우산으로 미친 듯이 난행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피해자의 질 안에서는 복숭아 조각과 씨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후 현장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복숭아를 먹다가 피해자의 질 안에 복숭아를 넣었다는 것으로 추정이 되면서 이 때부터 범인은 많은 국민들에게 악마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조용한 듯 싶으면 터지는 살인 사건에 국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 역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사건이 종결되고 말았다.

여덟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전 사건이 일어난 지 9일 만이자 88 서울 올림픽을 단 하루 앞둔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상희 양(13)이 자신의 집에서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4]

하루 전 9월 15일, 피해자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으며, 오후 11시 20분경,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잠을 청하게 된다. 다음 날인 사건 당일, 어머니는 등교를 앞둔 시점에서도 아이가 늦게까지 일어나지를 않자, 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다가 결국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걷으면서 깨우게 되는데, 결국 아이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아이의 시신은 목을 무언가에 의해 강하게 눌린 듯한 자국이 있었으며, 옷은 그대로 입혀져 있었지만 성폭행을 당한 흔적은 남겨져 있었다. 또한 현관문 문고리의 창호지가 찢겨져 있었다는 것으로 범인의 행방을 추측해보면 범인은 집 마당으로 담을 넘어 침입하였고, 창호지를 찢어 안으로 손을 넣어 잠금장치를 임의로 해제한 후 집으로 침입하였으며, 피해자의 방으로 들어와 성폭행을 한 뒤 살해한 후, 그대로 다시 담을 넘어 도주한 것으로 당시 추정이 되었다. 시신의 상태 등으로 보아 사망 추정 시각은 16일 새벽 2시.

그런데 이번 사건은 또 특이하게도 피해자가 깔고 자던 이불 깔개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체모가 발견되었는데, 경찰은 이를 일본의 한 과학수사대에 분석을 의뢰하게 된다. 분석 결과 일반인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티타늄 원소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대대적으로 조사를 벌여 그 끝에 1989년 7월 25일, 한 수리업체에서 수리공으로 일하던 윤성여 씨(당시 나이 22세)를 범인으로 지목, 체포하게 된다.

윤성여 씨는 자신의 모든 범행을 자백하게 되고[5] 1989년 10월 21일,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징역 20년으로 감형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2009년 8월, 가석방되어 출소하였다.

의문점과 논란들[편집 | 원본 편집]

그러나 지난 2019년,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밝혀지게 되는데, 이춘재가 이번 8차 사건 역시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하게 되면서 이 사건은 또 엄한 윤성여 씨 생사람 잡은 거 아니냐면서 큰 논란이 일게 되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믿기 힘들겠지만, 그 당시에는 경찰이 고문폭행을 가해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백을 받아내려는 경찰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무고한 국민도 있었다. 실제로 윤성여 씨는 교도소에서 자신은 무죄라고 교도관에게 주장하며 엄청난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며, 2003년에 이뤄진 MBC의 한 방송에서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만약 자백을 하지 않으면 머지 않아 죽을 것 같아 억지로 자백을 하였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수사 끝에 지문이나 발자국, 범행수법 등 윤성여가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이춘재가 자백한 자신의 범행과 사건 현장은 아귀가 맞는다는 점에서 윤성여 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고, 결국 윤성여 씨에 대해 재심에서 무죄가 판결되면서 8차 사건 역시 이춘재의 단독 소행으로 결론이 났다.

경찰은 잘못되고 성급한 수사로 억울하게 무려 20년동안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에게 사죄를 표하였으며, 윤성여 씨는 되려 경찰에게 지난 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해줘서 고맙다국민들이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용서하겠다.는 말과 함께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을 억울함 속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경찰들을 모두 용서하였다. 한 편 내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어 이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다.라며 안도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6][7]

아홉 번째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여덟 번째 사건 이후 2년이 흘렀다. 그동안 화성시는 조용했고 아무런 해프닝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성 시민들은 연쇄 살인이 한동안 조용하자 안심하기 시작했고, 비록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사건이 끝난 줄만 알았다. 시민들은 그저 다시 예전의 행복했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줄만 알고 있었으나...

마지막 사건 이후 2년 2개월이 지난 1990년 11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능리에서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던 김미정 양(14)이 피살되었다.

당일 오후 5시경에 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귀가하던 피해자는 이후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친구와 헤어져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피해자의 집은 학교로부터 야산 인근 길을 조금 걸어야 했다. 피해자는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그대로 실종되었다.

한 편, 가족들은 밤이 깊어가도록 아이가 돌아오지를 않자, 불안한 마음에 친척들과 지인들을 불러서 밤 내내 아이를 찾아다녔다. 사실 화성시라는 곳이 이전에 워낙 불미스러운 일이 많았던 지역이기도 해서 가족들의 불안은 극에 달하게 되고, 심지어는 인천광역시에 사는 친척들까지 이 곳으로 와서 피해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러한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모습으로라도 살아있길 바랬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는 다음 날 오전 9시경, 길 인근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시신은 상의가 벗겨진 채 교복으로 덮여져 있었고, 두 손과 두 발은 검은색 스타킹으로 묶여 있었고, 입은 브래지어로 재갈이 물려져 있었으며, 피해자의 가슴에는 피해자의 필통에 소지하고 있던 커터칼로 20회나 베어낸 듯한 상처가 다수 발견되었다. 성폭행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블라우스로 목 졸림에 의한 교살. 또한 부검 중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데, 피해자의 질 안에서는 당시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숟가락과 포크, 그리고 필기구가 발견되었다... 살해 후 범인이 직접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추가로 피해자의 위장 내에서는 소화되지 않은 잡채가 발견이 되었는데, 사실 이 날이 피해자의 생일이었다고 한다.[8] 때문에 부모님이 당일날 생일 요리로 잡채를 해주었는데, 이 잡채를 학교로 도시락으로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문점은, 보통 사람의 몸은 위장에서 음식을 소화하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점심 때 먹은 잡채라면 벌써 소화되어 있어야 했고, 저녁을 먹을 시간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점이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경찰의 추측으로는,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하기 직전에 억지로 잡채를 피해자에게 먹인 뒤, 바로 살해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치는 않다.

당시 현장에서는 B형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채취되기도 했고, 도시락에서 지문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지문이 사건의 열쇠가 되어 오랫동안 남아온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결국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열 번째 사건 (마지막 사건)[편집 | 원본 편집]

마지막 사건은 아홉 번째 사건이 난 후 5개월 만인, 1991년 4월 3일에 발생한 사건으로[9],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오산리에서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던 권순상 할머니(69)가 피살되었다.

당시 피해자는 경기도 수원시의 딸의 집에 방문하였다가 오후 6시 30분경,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되었고, 오후 8시경, 오산리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다.[10] 이후 피해자는 집을 향해 둑길을 걷던 중 그대로 실종되었다.

다음 날인 4월 4일, 피해자는 집에서 불과 200m 정도 떨어진 밭둑에서 한 중장비 운전기사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피해자의 시신은 하의가 벗겨진 상태로 목에는 검은 스타킹이 감겨 있었으며, 부검 결과 피해자의 질 내부에서 양말이 발견되었다. 단, 이번 사건은 특이하게도 입에 재갈이 물려져 있거나 손이 묶여 있지 않았다. 사인은 목 조름으로 인한 교살.

양말에서 정액과 지문이 채취되었는데, 경찰은 이를 유력한 증거로 지문과 정액을 수많은 비교 대상과 비교를 해보았으나, 헛수고로 돌아왔을 뿐, 결국 마지막 사건에서도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편집 | 원본 편집]

7차 사건에서 버스 기사의 증언으로 몽타주를 만들어 경찰은 범인 검거를 위해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다. 후에 밝혀진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춘재의 어머니는 몽타주가 자신의 아들과 확실히 닮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의문점은, 어머니 정작 본인은 근처에 공개수배 전단지가 떠도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수사 과정에서도 33년동안 이 미스테리가 풀리지 않을 만한 일이 있기도 했다. 물론 86년 당시에는 기술 등이 지금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긴 했겠지만, 아무리 그 시절이라 쳐도 이렇게 같은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범행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연쇄살인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뻔히 보이는데, 경찰은 무려 5차 사건까지 일어나고 나서야 연쇄살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제대로 수사를 펼쳤다. 심지어 5차 사건 이전까지는 괜히 골치 아파지기 싫어서 사건 현장을 그대로 태워버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7차 사건까지 발생하게 되고 나서는 나라 자체에서 국민들도 정부도 사건을 해결하라고 경찰에게 지시를 했으며, 무려 연간 200명 이상의 경찰이 수사에 투입되고 수많은 용의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범인이 잡힐 리가 없었다. 조사라고 해봐야 그 때 당시에는 과학 기술도 발달하지 않았던 터라 탐문 조사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사정이나 심리 상태 같은 것이나 물어보고 있으니 범인이 순순히 잡힐 리가 없었다. 물론 당시에 증거가 많이 나왔고, 요즘 시대같은 과학 기술이 발전한 시대였다면 거의 손 한번 까딱 안 하고도 손쉽게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과학 기술도 전혀 발전하지 않은 시대였고, 가장 유력한 증거를 내줄 수 있는 CCTV도 성능이 좋지 않고 그마저도 제대로 보급이 안 되던 시절이었던 데다가, 당시의 화성시는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지역이라 목격자도 없었기에 수사에 난항을 겪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래도 워낙 큰 사건이기도 하고, 때문에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당시 화성시 지역의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들의 사진을 전부 뿌려서 목격자들에게 범인을 지목해보라는 수법까지도 사용했으나, 목격자들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고, 범인이 화성시에 확실히 거주중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이 방법은 효과가 전혀 없었다. 하다못해 대한민국 국민의 사진들을 다 모아서 찍어보라면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를까.

결국 이 사건은 마지막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 후인 2006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수사가 종료되었다. 때문에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은 풀리지 않은 미해결 미제 사건으로 영원히 자리잡는 듯 했다. 그러나

33년만에 해결된 사건[편집 | 원본 편집]

사건이 발생한 지 33년이 지난 2019년 9월 18일, 경찰은 부산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이춘재(56)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그 때 이춘재는 1994년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1995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무기징역수로 교도소에서 25년째 복역중이었다.

경찰은 계속 보관해왔던 현장에서 나온 증거품들을 모두 국과수에 넘겨 DNA 감식을 의뢰했고, 그 결과 5,7,9차 사건의 증거품들에게서 나온 DNA가 이춘재와 해당 일치한다는 판단을 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이번 사건의 범인을 이춘재로 지목하게 된 것. 또한 그 당시 유력한 목격자 두 명을 뽑아 경찰이 사진을 걸어놓고 범인을 짚어보라고 했을 때에도 두 명 모두 이춘재의 사진을 짚었다는 점에서 이춘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결국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던 이춘재는 유력한 증거가 나오면서 끝내 2019년 10월 1일,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모든 범행들을 자백했으며, 이 사건 이외에 5개의 사건까지 추가로 자백하였다.[11] 아무래도 가석방 등을 기대하고 있다가 계속 현장 유류품에서 DNA 등의 유력한 증거가 나오자 본인도 답이 없다고 판단한 듯 보인다. 실제로 이춘재가 DNA 감식 결과를 경찰이 증거로 내보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과 말을 표현하며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온 범행들에 대해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했다고.

물론 모든 사건들에게서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것이 아니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서는 10건 중 3,4,5,7,9차 사건에서만 DNA가 검출되었고, 논란이 되었던 8차 사건 포함 이외의 사건들에서는 이춘재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때문에 이춘재의 자백만이 증거로 적용될 수가 있는 상황[12]이었지만, 무엇보다 이것은 연쇄 살인 사건이었고, 이춘재가 자백을 할 시 범행 당시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거나 범행 장소였던 집이나 논두렁의 특성 등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후 2019년 10월 15일, 경찰은 이춘재를 살인 사건 피의자 명목으로 입건하였다.

33년 미스테리의 범인[편집 | 원본 편집]

사건의 범인 이춘재는 당시 범행 장소들과 매우 인접해있었던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 거주중이었고, 1993년 청주시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모든 삶을 화성에서 보낸 화성 토박이급이었다. 이춘재는 당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이것 또한 이춘재가 범인이라는 것에 대한 힌트인게, 이춘재의 거주지와 직장, 그리고 이동 경로 등이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의 발생지와 모두 반경 5k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10건의 사건 모두 이춘재가 당시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로 및 거주지와 그리 멀지 않으며, 특히 9차 사건의 발생지는 이춘재의 집과 불과 2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이춘재가 흔히 평소에도 싸이코패스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평소에는 상당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을 보였던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번 분노를 누르지 못하면 돌아버렸다시피 폭력성이 그대로 드러났다고... 실제로 1994년 일어난 이춘재 청주 처제 살인 사건을 조사할 때 밝혀진 사실이다.

우리가 이춘재를 악마로 생각하는 이유는 당연히 10명이나 사람을 죽였다는 이미지가 있어서인데, 사실 이춘재가 여태껏 저지른 만행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2019년 당시 자백을 바탕으로 하면 이춘재가 1986년 부터 1994년까지 저지른 범죄는 총 44건으로, 그 중 살인이 14건, 강간 관련 범죄는 30건이었다. 다만, 살인의 경우 화성 연쇄 살인에 거의 몰려 있었고, 1991년 4월 3일 10차 사건 이후 1994년에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하기 전까지는 살인 사건은 없었고 강간 등의 범죄가 있었다. 이후 1993년 청주로 이사한 후에도 여러 가지 강간 범죄 및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한 범죄가 있으니... 즉, 이춘재는 무려 8년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이 된다.

이춘재는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탄로난 후 교도소의 독방으로 옮겨졌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수감중이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이 사건은 대한민국을 매우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정말 긴 시간동안 미스테리로 남았던 사건인지라, 당연히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꽤 많다. 대표적으로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이 있다.
  • 화성시는 이번 사건으로 도시에 대한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번에 범인이 잡히자, 화성시는 예상대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아닌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으로 명칭을 변경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의견이 만장일치로 채택이 되자, 경찰청 측은 이 사건을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가슴에는 오랫동안 화성 연쇄 살인 사건으로 기억되어 왔고 영화나 매체에서도 그렇게 불린 지라...
  • 연쇄 살인으로 희대의 싸이코라고 불렸던 유영철은 이 사건의 범인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또다시 살인을 하다 잡혀 교도소에 복역중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유영철의 주장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싸이코패스 살인마는 살인을 중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망하지 않았다 가정하면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다 걸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의 주장이 맞았던 것이다.
  • 그나마 이 사건은 유류품과 DNA 등 유력한 증거가 남아 있어서 범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발생한 개구리 소년 사건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도 이 사건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미제 사건으로 불리우지만 증거 및 단서가 너무나도 부족하여 사실상 답이 없다.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범인의 성문이 남아 있어 그나마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개구리 소년 사건은 범행도구 외에는 어떠한 특이점도 발견되지 않아 해결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 앞서 언급했지만, 이 사건의 진범 이춘재는 1986년부터 1994년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범죄를 저질렀다. 8년 동안 무려 44건의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평균적으로 한 해 5~6건의 범죄를 저지른 것.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 그알 캐비닛 보도 영상

각주

  1. 범인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라고 칭하는 이들도 제법 있다.
  2. 심지어 세 번째 피해자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3. 이 때도 세 번째 사건의 피해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4. 유일하게 외부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5. 후술하겠지만, 이 자백은 나중에 억지로 한 자백이라는 것이 의심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6. '이춘재 8차 사건' 재심청구 윤성여씨 얼굴·실명 공개(연합뉴스, 2020년 8월 14일)
  7. 이와 같이 누명 쓴 사건으로 유명한 것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이 있다.
  8. 결국 이번 피해자는 생일이 기일이 되어버렸으며, 이 사연은 국민들의 마음을 더 안타깝게 하기도 하였다.
  9. 참고로 이 사건 불과 8일 전에는, 또 하나의 미제 사건인 개구리 소년 사건이 발생하였다.
  10. 피해자의 거주지는 화성시 반송리(현 동탄신도시)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1. 이 중에는 억울하게 엄한 사람이 누명을 썼던 8차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12. 형사소송법 제310조에 의해,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을 유죄로 만들 유일한 증거인 경우에는 그 자백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