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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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焉. 본명은 홍종표(洪宗杓).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홍언 본인이 흥사단에 입단한 후 제출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880년 2월 27일에 한성부 남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1910년대에 정리된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의 회원명부에 따르면, 그의 본적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상리라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한성부 남부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집안은 경상도 영덕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력서에 따르면, 홍언은 서울 남부에서 출생하여 10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거주했다가 1894년부터 1902년까지 광주와 춘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902년부터 2년간 중국을 유랑했다가 1904년 9월 16일 하와이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는 하와이 이주 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여성은 남편이 하와이에 이주했을 때 따라가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

하와이에 도착한 홍언은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강회 기관지 <월보>의 편집을 맡았다. 당시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 창설을 주도한 홍경표는 홍언의 형으로, 그가 자강회가 발간한 월보의 편집을 맡게 된 것은 형의 추천 덕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7월 대한자강회가 고종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8월에 강제 해산당했지만, 자강회 하와이 지부는 9월까지 버텼다.

이후 홍언은 1907년 12월에 창간된 <자신보>의 편집에도 관여했으며, 하와이의 한인단체들이 합동하여 결성한 한인협성협회에서 1907년 10월 22일자로 창간한 주관지 <합성신보>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미주와 하와이 한인단체가 통합되면서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면서 기관지 <신한국보>가 게재될 때, 그도 여기에 관여하여 1909년 2월 12일자로 발행된 창간호에 그의 이름이 발행 겸 편집인으로 기재되었다. 한편, 홍언은 1907년 기독교 감리회의 학습을 받은 뒤 이듬해에 세례를 받았으며, 1909년 하와이 한인기독청년회에 입회했다.

홍언은 1909년 5월 국민회 호놀룰루지방회의 학무원으로 선임되었고, 6월에 국민회 임원개선에서도 편집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1910년 초 <신한국보>의 기서(寄書)문제[1]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자, 결국 1910년 3월 8일에 편집인을 사임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이 시기에 유능한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미주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그의 사임 소식을 전하면서 "하와이 동포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 홍종표(홍언의 본명)씨는 본래 청년작가로 예리한 필봉은 풍운을 반복하는 행세가 있으며. 완곡한 이론과 예리한 비평으로 세인의 감상을 자아내더니..."라며 그의 글쓰는 솜씨를 높이 평가했다.

1910년 11월, 홍언은 호놀루루 지방회에서 8,9개월 월연금을 납부하지 않아 출회의 위기에 몰렸다가 뒤에 납부한다고 하여 출회 조치를 모면했다. 이로 볼때 당시 그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그는 1910년 8월 전후에 백인 상점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언론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11년 8월, 홍언은 <대동위인 안중근전>을 저술하여 신한국보사에서 발행했다. 이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삼았으며 국문으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이 전기에는 '의연금 총결산 공고서'가 부록으로 수록되었는데, 그것은 안중근 의거 직후부터 1911년 8월까지 신한국보사에 답지한 1,600여 명의 명단과 액수를 정리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안의사구제동맹회에 송금한 내역을 결산한 보고서였다. 이 전기는 안중근 의거에 관한 외국 언론의 반응을서술하면서, '장군으로서의 안중근'을 형상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1년 9월경,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을 새로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홍언을 주필로 초빙하기로 결정한 북미지방총회는 이민국 관련서류와 선표를 보내왔다. 이에 홍언은 하와이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10월 31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홍언은 다음날부터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았다. 그는 11월 8일자 논설로 <집필 초하루의 소감>을 게재해 미주 한인의 상황을 언급하며 "국민의 여론을 대표하여 진화를 인도함에는 일정한 원칙을 책임으로 여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홍종표라는 본명을 홍언으로 개명했으며, 대한인국민회 호놀룰루 지방회에서 샌프란시스코 지방회로 옮겼고, 1911년 12월 21일에는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장에 선임되었다.

1911년 12월 4일, 홍언은 북미지방 총회 대의회 모임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안창호와 만났다. 그는 2살 위인 안창호를 존경했고, 안창호가 주도하는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신한민보> 1912년 1월 15일자부터 폴란드의 사회를 소설화한 <미인심(美人心)>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선원이 경영하던 청년서회를 인수하여 경영하다가 주필을 맡은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12년 3월 사무원 강영소와 함께 지방총회에 사임을 청원했다. 그가 사임을 청원한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신문 제작과 관련된 불화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임한 지 불과 몇 달 뒤인 12월 9일에 신한민보가 재정난으로 운영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필을 그만둔 그는 신한민보사를 퇴사하고 한동안 조용히 지내던 홍언은 1913년 6월 신한민보가 복간되자 주필 대리를 맡았다. 또한 1913년 9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의 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교회 활동에 적극 나섰고,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의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문필 활동을 계속해, <미인심>을 계속 연재했으며 8월 22일자부터 10월 10일자까지 <미국신문의 사략(美國報紙史略)>을 7회 연재했다. 또 국치기념일 행사를 소개한 <대치욕 국치기념일 기사>도 9월 5일자부터 세차례 게재했으며, 1914년까지 '동해수부'의 명의로 신한민보에 여러 글을 게재했다.

1913년 5월 13일, 홍언은 안창호가 흥사단을 설립할 때 함께 했고 경기도를 대표한 창립위원으로서 제7단우에 선정되었다. 이후 홍언은 1915년 초부터 다시 신한민보의 편집인으로 근무했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직도 겸했다. 하지만 1915년부터 계속된 신문사 편집인 일과 국민회 임원 활동은 그의 심신을 피곤하게 했고 건강이 악화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결국 그는 1919년을 맞이하기 직전에 신문 편집의 일을 사임했다.

1919년 3.1 운동 발발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을 때, 홍언은 휴양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다. 그러다가 4월 6일 중앙총회에서 중국인에게 독립자금 모집을 위한 유세인으로 홍언을 비롯한 4인을 선정하자, 그는 4월 18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진행 방법을 협의했다. 4월 21일 중앙청회에서는 홍언 등 화인 교섭원 4인이 제안한 8개조 건의를 승인했는데,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화교를 대상으로 한 독립자금 모금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7월 24일의 북미지방총회 임원회에서 신한민보사의 명예기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던 1919년 9월 10일, 중앙총회는 홍언을 역사편집위원으로 선정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역사를 정리하여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송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9월 24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국민회 역사 편찬 작업을 진두지휘하다가 1920년 3월에 마무리하고 다시 화교위원으로서 중국인에게 독립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그러나 5월 중앙총회에서 그를 소환했다. 이는 애국과 공채표 문제로 야기되었던 국민회와 구미 위원부의 갈등이 임시정부의 지시로 공채표를 발행하게 되어, 중앙총회가 독립의연금 모집을 임의로 하지 못하게 되자 취한 조치였다.

홍언은 이후에도 중국인에게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돌연 1920년 6월 3일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마약조사당국에 체포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중국인이 그에게 우편물을 보냈는데, 그 안에 마약 1파운드가 들어있던 것을 조사 당국이 확인하고 그를 기소한 것이다. 홍언 본인은 이를 전혀 몰랐고, 그를 변호하기 위해 법학박사인 강영승(康永昇)이 현지에 도착하여 도움을 준 덕분에 6월 30일에 무죄 석방되었다.

홍언의 미주 화교를 대상으로 한 모금 활동은 1921년과 1922년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21일에 구미위원부로부터 캐나다 서방을 담당하는 화교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후 캐나다와 미국 각처를 거쳐 파나마 등 중앙 아메리카를 순방하고, 8월에는 남미의 페루에 도착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는 1921년 9월 29일자의 '홍언 위원의 대활동'이라는 기사에서 페루 리마에서 발간되던 중국신문에 소개된 그의 활약상을 전하기도 했다. 각계 중국인들은 한국 혁명을 지원하는 찬성발기회를 개최하고 페루의 중국국민당은 100원을 기부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남미 순행은 1922년까지 지속되었고 1922년 9월 12일에야 샌프란시스코로 귀환했다.

미주 일대의 화교를 상대로 한 모금 활동을 마무리한 홍언은 1922년 11월 대한인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가 1923년 1월 국민회 총무를 맡았으나 곧 사임했다. 또한 그는 <신한민보>에 1923년 2월 1일자부터 <희문 열혈>이라는 4막의 희곡을 4월 12일까지 11회 연재했다. 이 희곡은 3.1운동 전후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았다.

그 후 1924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그는 국민회 업무를 정리하고 흥사단에 적극 가담했다. 1924년 6월에 강영승, 김현구, 백일규 등과 함께 이문회(以文會)를 조직하여 신문화, 신문예운동을 전개했으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안창호와 ㅈ회하고 그와 함께 이상촌 건설, 한인 교포 사회의 문제, 독립운동 방략 등을 논의했다. 그는 1925년 11월 7일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했고, 안창호는 1926년 3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두 번 다시 진심으로 존경하는 선배 안창호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홍언은 <신한민보> 1926년 2월 18일자부터 4월 22일자까지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를 소개하는 '간디주의'를 번역하여 8회 연재했다. 간디의 생애와 사상을 밝힌 이 글을 번역한 것은 그가 간디의 사상에 감복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26년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멕시코를 여행한 후 <신한민보> 1927년 11월 3일부터 1928년 3월 29일까지 <꿈결에 반긴 재묵동포(在墨同胞)>를 연재해 멕시코 동포의 상황과 견문을 알리기도 했다.

홍언은 민조주의의 관점에서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그는 <신한민보> 1928년 3월 1일자 <3월 1일 오늘에 달라진 현상을 보고>라는 논설을 통해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늘 현상이 전보다 놀랍게 달라진 것은 우리 민족의 사상계올시다. 9년 전 오늘 대한독립을 선언하던 당시 대한민족의 사상은 민족주의하에 통일이 되었지만 9년이 지난 후 오늘은 이 사상이 헤어져 혹은 민족주의, 혹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 갈려나가는 터에 (중략) 요컨대 오늘 우리 민족의 사업의 순서는 첫째 주의 확정, 다음 주의 실현, 또 그다음 주의 통일, 즉 전민족의 대동단결이니 (중략) 내가 보기에 오늘 우리 민족의 시비와 분쟁은 일이 없어서 시간이 많아 그런 것이니 누구든지 먼저 주의를 확정하고 아울러 방략을 세워 사업의 길로 나아가 성공의 실상을 보입시다. 그리하면 시비 분쟁이 절로 없어지고 전민족이 다 따라가서 한 데로 뭉칠 것이올시다. (후략)

이렇듯 그는 민족사업의 순서로 주의 확정, 주의 실현, 주의 통일을 주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가 이처럼 민족주의를 강조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 국민회를 이끄는 총회장 백일규가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일규는 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주필을 겸하며 신문 지상에 사회주의인 경향의 청년들의 활동과 글들을 적지 않게 실었다. 홍언을 비롯한 국민회의 보수인 지도층 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청년들이나 백일규를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홍언은 화교를 대상으로 한중합작을 주장하는 논설을 화교신문에 발표했다. 1935년 9월 5일자 <신한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타운에서는 '고려인 홍언'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그의 문명(文名)은 캐나다, 호주, 쿠바, 멕시코 등지의 화교계에 널리 퍼져 비범한 문장과 열렬한 정신을 탐모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홍언은 이러한 화교계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그들로부터 한국 독립운동가에게 전달할 군자금을 마련했으며, 1935년에 화교들의 초청에 응해 캘리포니아, 오리곤, 뉴멕시코, 애리조나, 택사스 주를 차례로 방문했다. 또한 그는 재정난과 분파 사이의 갈등으로 침체된 대한인 국민회의 문제점을 논했고 1936년 5월 '국민회 발전책 간담회'에 참여하여 민족적 공의로 국민회에서 민중의 역량을 모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몇 차례 총무회장 후보로 추천되었지만, 본인이 사퇴하거나 득표하지 못해 총회장을 역임하지 못했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가 옥사했다. 당시 애리조나를 여행하고 있던 홍언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신한민보>에 안창호 선생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내용의 사설을 싣고 다음과 같은 추모시를 지었다.

철인이 가시니 강산이 홀연히 의로워 거국이 같이 슬퍼하오며


정신이 계시매 일월이 영원히 비추어 민족의 앞길이 밝아지도다.

그는 안창호의 순국을 슬퍼하며 각지에서 보내온 조전, 만장, 애가, 추도사 등을 모아 영애록을 편찬했다. 그는 안창호 가족이 살던 집을 찾아 ‘도산의 꽃동산’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며 안창호를 기리곤 했다.

1938년 9월, 홍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그는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서기를 맡았고, 1940년 1월에는 신한민보사의 주필에 선임되었다. 1940년대 홍언은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의 활동을 널리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김구의 백범일지 상권의 필사본과 '도왜실기가 미국에도 전해지자, 그는 이를 널리 홍보했다. 특히 김구가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한 사실을 가리켜, 공을 드러내지 않은 옛 중국의 장군에 빗대어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평했다. 또 홍언은 '한국혁명단 영수 김구 사략'을 중국 신문에 기고했고, 이것을 다시 <신한민보>에 번역하여 소개했다.

홍언은 1910년대부터 40년에 걸쳐 <신한민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소설과 희곡, 시가와 수필, 비평 등 많은 장르의 글을 발표했다. 미국에서 그만큼 다양한 형식의 문예활동을 활발하게 벌인 한국인은 없었다. 그는 ‘미인심’ ‘철혈원앙’ ‘옥란향’ 등의 소설, ‘동포’ 등의 희곡을 비롯하여, 수백 편의 시가, ‘시인론’ ‘애국지사의 노래’ 등의 비평들을 집필했다. 또 여러 편의 기행문을 출간했고, '동국염향록', '조선기생시화' 등의 시화도 제작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필력을 활용해 한인 동포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고 화교계의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조선이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미주에서는 고국방문단을 조직하였지만 홍언은 여비와 숙박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거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신한민보에서 몇년 더 활동하다가 <신한민보> 1949년 1월 27일자 기사에 '신한민보의 붓을 놓으며'라는 제목의 퇴임사를 게재하고 주필직을 내려놓았다.

이후 신한민보 고문으로서 활동하던 그는 1949년 말 뇌일혈로 쓰러진 뒤 2년간 병마에 시달리다 1951년 3월 25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

사후 그의 유해는 대다수 한인들이 묻힌 로스앤젤레스 안젤루스 로즈데일 공동묘지(Angelus-Rosedale Cemetery)에 안장되었다가, 1997년 8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홀로 살아서 후손이 없었지만 흥사단우인 하상옥(河相玉)의 딸 하소정을 양녀로 삼았다. 하소정은 줄리아드 스쿨과 뉴 잉글랜드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홍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각주

  1. 홍언이 1910년 1월경에 손창희가 투고한 원고를 신문에 게재했는데, 이 원고의 내용이 지방에 소요를 야기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