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무하마드 호스니 엘사이예드 무바라크(이집트 아랍어: مُحَمَدْ حُسْنِى ألْسَيِّدْ مُبَارَكْ)는 이집트정치인이자 군인이다.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이집트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8년 5월 4일 이집트 무누피아 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후 이집트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949년 군사과학의 학사를 취득하고 공군 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1950년 3월 13일 조종사 사관 직위에 임명되었다. 1956년 28세 때 제2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다.

1959년 31세의 나이로 Tu-16 폭격기의 비행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후 여단장이 되었다. 1962년 북예멘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무바라크는 파견 부대에 편입되어 북예멘에서 펼쳐진 전투에 참가했다. 1964년 ~ 1965년 소비에트 연방의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이집트 공군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전후 무바라크는 칼리우비야 주의 빌베이스(Bilbeis) 군 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조종사 수를 늘리고 훈련 기간을 단축하는 과제를 맡았다. 이 성과가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인정을 받아 1969년 공군 대장으로 승진하고, 이집트 공군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안와르 사다트 정부가 출범한 후 1972년, 공군 참모총장 겸 국방부 차관이 되었다.

1973년 무바라크는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 방어 진지에 대한 전격 작전으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내, 군 최고 통수권자인 공군 원수로 승진하였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의 활약으로 안와르 사다트에게 주목을 받은 무바라크는 1975년, 이집트 부통령에 임명되었다. 1978년에는 아랍 사회주의동맹을 대신해 설립된 국민민주당의 제2인자가 되며, 사다트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당시 대통령이 암살되자 한 달 뒤 부통령으로서 권력을 승계해 이집트를 통치했다. 무바라크는 2011년 이집트 민중의 저항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통치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친미, 친이스라엘 노선을 계승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중동 평화 협상에서 양자의 조정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과의 협상 결과, 1982년 4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반환 받았다. 냉전 시대의 무바라크의 외교 노선은 기본적으로 친서방을 표방했으나, 1984년에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였다. 냉전 시대가 끝난 이후, 친미 노선이 두드러졌다.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에 이집트군의 참여를 결정했으며,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단속에 힘썼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장기 집권을 위해 국가의 재산을 친정권 인사에게 쏟아 부어야 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 됐고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물결이 이집트에까지 번지면서 반정부 시위가 발생해 올해 2011년 2월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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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