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편집 | 원본 편집]
신라 성덕왕 당시로 추정되는 시기에 지어진 4구체의 향가로 주제는 순정, 혹은 사랑의 고백으로 볼 수 있다. 지은이는 왠 지나가던 소를 탄 노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구애하는 노래가 헌화가로 흘러들어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내용[편집 | 원본 편집]
-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
紫布岩乎邊希
자포암호변희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집음호수모우방교견
吾 不喩慙 伊賜等
오힐불유참힐이사등
花 折叱可獻乎理音如
화힐절질가헌호리음여
- 적절히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것.
자줏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받치오리다.
혹시 옛 한글로 된 것을 보고 싶다면 여기를 참조하자.
시험에 잘 나오는 이야기[편집 | 원본 편집]
- 소재의 상징
- 도치법의 등장 : "아니 부끄러워하시면"이라는 대목. 진달래 꽃에서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같은 어순을 가진다.
관련 설화[편집 | 원본 편집]
신라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이라는 사람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여 가던 중간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마침 옆에 바위가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쳐져 있는데, 높이가 천 길이고 위에 철쭉꽃(해당화라는 설도 있다)이 만개해 있었다. 이를 본 공의 부인 수로부인이
“ 누가 저 꽃을 꺾어서 바치겠는가? “
라고 하니, 따르던 사람들이 "저긴 사람이 오를 곳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모두 사양하였다. 그 때, 옆에 소를 몰고 지나가던 노인이 부인의 말을 듣고 소를 타고(!!!) 절벽에 올라가 그 꽃을 꺾고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아무도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 노인의 노래가 삼국유사에 남아서 전해진다.
이 수로부인 설화는 뒤쪽의 내용을 살펴보면 해가라는 향가에 얽힌 내용이 하나 더 나오는데, 이 노래는 고대 가요의 구지가와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구지가는 가야의 김수로왕 설화와 얽혀 있는 노래이고, 해가는 그로부터 시차가 8세기는 더 나는 시기의 수로부인과 얽혀 있는 노래이다. 아무래도 수로부인 이야기가 김수로왕 설화에서 모티브를 일부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은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해가 항목을 참조하자.
알아도 상관없고 몰라도 상관없는 이야기[편집 | 원본 편집]
이 헌화가 설화의 위치를 놓고 강원도 영동지방에 자리한 두 도시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바로 강릉시와 삼척시인데, 시작은 강릉시가 과거 7번국도 안인-정동진-옥계쪽의 구간의 도로 이름을 "헌화로"로 붙여놓은 것을 정동진역이 유명해진 다음에 재발견하여서(카더라에 의하면 이 도로의 이름은 원래 헌화가를 생각하고 지은 이름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우연찮게 이름이 강릉 남쪽의 절벽구간 도로에 붙게 된 것일 뿐) 해가사와 연관지어서 관광객을 유치하게 된 것.
이에 뭔가 불편한 심기를 느낀 삼척시측에서는 "동해안에 해안절벽이 강릉에만 있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강릉에 가는 길목 중간이었으니 아마 그 자리는 삼척이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삼척시에서는 삼척해수욕장 북쪽의 증산해수욕장에다가 수로부인 설화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해가가 삼척에서 일어난 일이라 주장, 아예 "해가사 터"라는 이름과 함께 해가사 기념비와, 설화에 등장하는 임해정이라는 정자까지 만들고 도로명도 수로부인길로 붙여버린다. 그리고 그걸로 모자랐는지 아예 사랑의 여의주 드래곤볼(...)이라는 것 까지 설치해 놓은 상황.
시간 순서대로라면 수로부인 설화에서는 해가사터가 맨 북쪽이어야 하므로, 증산해변 남쪽 구간 어딘가의 바닷가 해안절벽이 걸리게 되며 이는 삼척시의 해안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해당 설화에서는 이틀길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다). 참고로 증산해변은 삼척시 해안가의 최북단 지점이며, 해당 구간 남쪽으로 해안절벽이 약 5~10km간격으로 7개 구간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삼척시 입장에서는 적당한 거리에 있는 아무 해안절벽이나 그냥 헌화가 자리라고 찍어버리면 그만인 상황이다. 이틀길이라지만 해당 구간은 워낙 험하기로 악명높은 구간이라....하나만 걸려라 너무 남쪽으로 내리면 울진군에서 채갈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