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해방신학(解放神學,영어: Liberation theology)은 라틴 아메리카가톨릭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기독교신학 운동이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석하고, 교회의 사회참여를 강조했다.

발생[편집 | 원본 편집]

일반적으로 해방신학은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발표된 문서와 19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저서, 《해방신학》의 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시점일 뿐이며, 실질적으로 해방신학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이전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

해방신학을 낳은 두 가지 사건[편집 | 원본 편집]

  • 도미니코회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의 강론: 1511년 12월 21일 안토니오 신부는 신대륙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인디오들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펼쳐나가게 된다. 안토니오 신부를 비롯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신부들은 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인디오들에 대한 학살과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사역을 펼치게 된다. 그는 1511년 12월 21일 대림절 제4 주간의 강론에서 요한복음 1장 23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규정하면서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악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 없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행한 폭행과 잔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죄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권리와 정의로 순진한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고 잔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권한으로 평화롭고 순전하게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을 향하여 전쟁을 하고 그들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 일을 계속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안토니오신부의 강론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를 감동하게 만들었고 그 후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던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학살과 참상을 고발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인간’임을 선포한 예언자로 살아갔다.
  • 아투에이 추장 사건 : 아투에이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의 타이노 부족의 추장이었다.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그의 부족은 전멸하게 되고 그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한다.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그는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로부터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을 제의 받는다.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신부에게 되묻는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라고 답변한다. 아투에이는 즉시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는 말과 함께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1]

특성[편집 | 원본 편집]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의의와 한계[편집 | 원본 편집]

기독교 기초 공동체를 바탕으로 혁명, 개혁운동에 교회의 참여를 강조하게 되었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목적을 위한 수단에 있어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해방신학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부호를 제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공식 태도와 정통신학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하느님을 특정 인간들의 편에 세우는 편견을 배척한다. 교회는 해방신학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해방신학의 과격하고 일방적인 성서해석과 교의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톨릭 대사전, <해방신학> 항목 중

때문에 가톨릭 교회 자체에서는 해방신학에 대해 분명하게 회의적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회의적이라고 해서 마냥 '수구꼴통', '지배에 대한 옹호' 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해방신학에는 부정적이지만 사회개혁에 진보적인 신자들의 사례가 있다. 애초에 예수가 사회 변혁을 추구했으나 폭력은 거부한 인물인 만큼(마 26:52) 폭력은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신학 노선이 다양한 개신교의 경우 신학적으로 볼 때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농민해방 전쟁을 인명 살상이 동반된 계급투쟁으로 해석하는 사례도 있기는 하다. 이러한 신학 노선에서는 가톨릭의 저러한 입장과는 달리 신을 특정 인간들의 편에 세우는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당연시한다. 신은 일방적으로 억압당하는 민중들의 편이고, 민중을 억압하는 지배계급은 박살나서 지옥에 떨어지든지 아니면 회개하고 항복하든지(즉 자신이 가진 정치, 경제적 권력을 다 포기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그 유명한 예리코의 전투 역시 어린 아기들까지 싹 쓸어 죽이라 한 것은 지배계급을 싸그리 박살내고 저들이 가진 생산 수단을 모두 빼앗아서 노동계급의 소유와 관리 및 통제에 놓기 위한 계급혁명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는 교회가 계급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일방적으로 노동계급의 편에 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계급투쟁을 위해 (신약시대인 지금도) 무력을 동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해방신학은 바티칸에서는 배척받았지만 중남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바티칸의 공식 입장도 현재는 해방신학을 대놓고 이단시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해방신학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온건해져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순화된 측면도 있고……. 해방신학에 대한 연구와 적용은 중남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톨릭, 개신교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해방신학[편집 | 원본 편집]

철저하게 비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조(?)인 천주교(가톨릭) 내에서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며 만일 사제가 해방신학을 하려면 주교는 포기하라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 옆집(?)이라 할 수 있는 개신교 쪽은 애초에 근본주의·기복신앙 계열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데다 이쪽에서 자생한 민중신학이 있기 때문에 둘이 서로 교류를 하거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국 내 개신교에서 해방신학을 다루는 경우 자체가 거의 없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