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요리

Korean.food-Hanjungsik-01.jpg

영어 : Korean Cuisine [1]

1 개요[편집]

한국 요리는 현재의 남한북한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와 고려왕조, 그리고 그 이상으로도 거슬러 오른 모든 한반도 태생의 요리를 아우르는 말이다.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고려 요리 혹은 조선 요리라는 용어도 맞는 말이다.[2]

2 한국 요리의 역사[편집]

2.1 쌀 농사로 시작한 고대 한반도 문명[편집]

2.2 대륙발 문화와 신라[편집]

2.3 고려 불교의 채식[편집]

2.4 몽골발 육식주의[편집]

2.5 양반 가문 음식법[편집]

2.6 임진왜란이 쏘아올린 식재료[편집]

2.7 한글이 선물한 한식 레시피[편집]

2.8 조선 왕조의 멸망[편집]

2.9 일제강점기[편집]

2.10 한국 전쟁, 분단[편집]

2.11 현대 한국의 음식법[편집]

3 한국 요리의 특징[편집]

예로부터 '밥(특히 쌀밥)'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아예 끼니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밥은 한국인과 한국 요리에게 있어 가장 중심이 되며, 필수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빵과 면의 보급으로 인해 쌀 자급률이 100%를 넘겨버린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으나, 그 이전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여전히 밥(쌀밥)을 먹지 않으면 밥(끼니)을 먹은 것 같지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채소, 특히 나물 반찬의 비중이 높다는 점도 특징이다. 국토가 좁은데다 대부분이 자잘한 바위산인 특성상, 가축을 기를 개활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물가 대비 매우 비싼 음식이며, 특히 소고기는 전통적으로 매우 귀하게 대접받는다.

또한 뜨거운 국물을 많이 즐긴다. 한반도 지역은 국토 대부분이 화강암 지대라 물 자체는 깨끗하며 수(水)량도 나름 풍부한 편이고, 화식을 권장하는 한(漢)의학의 영향도 있으며,[3] 농경사회 기반으로 적은 재료로 많은 양을 만들어야 하던 사회상이 반영되어[4] 국물음식이 유난히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다양한 국밥문화는 인근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문화이다.

더불어 21세기에 들어와서 대폭 강화되는 특징인데, 맛의 요소 중 매운맛을 중시한다.[5] 일부 한국인들은 '매운 것을 못 먹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매운맛을 선호하는 편이며,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맵고 칼칼한 음식을 먹지 못해서 미쳐버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이 경향은 비단 고추가 유입된 이후뿐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것인데, 유난히 발효음식이 많았던 한국 요리에 스믈스믈 피어오르는 군내를 잡기 위해서 향신료를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6] 그 증거로 음식이 잘 쉬는 남부지방 음식이 북부지방에 비해 매운 음식이 더 많으며, 같은 음식이어도 남부지방 음식이 훨씬 더 매운 편이다.[7] 다만 태국 요리가 단발성으로 맵고, 멕시코 요리가 화끈하게 맵다면 한국 요리는 달큰한 매운맛으로 매운맛 척도만으로 치면 좀 덜 매운편이다. 그렇다고 옛부터 무작정 맵게만 만들어먹던 것은 아니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밥 빼고 모두 빨갛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매운 음식의 비중이 급격히 커졌다.

3.1 한국 요리의 상차림[편집]

기본적으로 한국 요리는 주식인 을 각자 반상 앞에 놓아두고 반찬을 한 입씩 집어다가 먹는 시스템이다. 철저하게 1인분씩(독상) 완벽하게 나눠놓는 일본 요리나, 큰 상차림을 놓고 여럿이서 일정량씩 덜어가며 먹는 중국 요리와는 개념이 약간 다른데, 한식에는 비교적 여럿이서 나눠먹는 음식류가 제법 있었고, 그럼에도 반찬을 밥 위나 개인 접시 등으로 덜어놓고 먹는 것은 기품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한 접시(밥상) 위에 여러 젓가락이 공유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서로 교차해서는 안 되는, 그러한 절충된 형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상 (반상)'의 구조는 밥+국 & 반찬의 2요소로 구분하는데, 반상 자체의 규모는 반찬그릇의 숫자(이를 '첩수'라고 한다.)로 결정되고,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각자 밥과 국을 하나씩 주어서 둘러앉아 먹는 것으로 보면 된다. 1인 밥상이라도 11첩 반상이나 12첩 반상을 올릴 수 있는 것이고, 4명이 먹는데도 3첩 반상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이 둘은 똑같이 '한 상'의 개념이 된다.

반상의 규모로는 크게 3첩 반상, 5첩 반상, 7첩 반상, 9첩 반상, 11첩 반상, 12첩 반상으로 나뉜다. 규칙은 아니고 대개 이런 규모의 반상을 즐겼다는 것인데, 이는 음양사상에 따라 3과 같은 홀수를 양(陽)의 수라고 길하게 여긴 것에서 비롯한다. 단, 12의 경우는 음양사상과는 달리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로서 이용된 것이다. 성리학이 강력하던 조선 시대 때는 교리로서 사치를 억제하기 위해 (하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체면을 위해서) 신분에 따라 첩수를 나누기도 했는데, 서민은 아무리 부자라도 3첩을 넘길 수 없었지만, 지체 있는 양반은 못해도 7첩 반상을 차려먹으며 귀한 손님이 오면 9첩 반상으로 대접해야만 했던 암묵적 불문율이 있었다. 12첩 반상은 왕이나 대신(大臣)급이 아니고선 꿈도 못 꿀 정도의 사치였으며, 그것도 조선 전기 때는 수랏상조차 9첩 이상으로 차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접시의 크기와 상관없이 1종류의 반찬을 '1첩'으로 세는데, 이때 된장(쌈장, 막장 등)이나 간장 같은 장류와 김치, 쌈채소(생채소 포함) 같은 것, 그리고 개인별로 제공되는 국은 첩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즉, 밥상 위에 밥과 국, 김치, 쌈장+쌈채소만 있다면 이건 0첩 반상이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제공하는 '된장국'이 아닌 함께 먹는 '된장찌개(토장조치)'가 곁들여져야 비로소 1첩 반상이 되는 것이다. 단, 같은 김치라도 보쌈김치[8] 같이 급이 높은 것은 예외로 치기도 한다. 또한 후식류로 구분되는 것 중에서도 음료가 아닌 경우, 떡(餠)이나 과(菓) 종류는 1첩으로 간주하였다.

3.2 독상과 겸상[편집]

한국의 전통적인 상차림 구조를 이해하려면 '한 상 (혹은 '반상(盤床)')'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한 상'이라는 것은 인원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단어로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단체(Group)을 가리키는 표현에 가깝다. 흔히 현대 한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식 상차림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서 숟가락 젓가락이 난무하는 것을 떠올리는데, 이는 가난하던 1960년대 이래로 정착된 현상으로, 넓은 범위에서 보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서 전통방식을 따르는 명절상이나 제사상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운데, 제(祭)를 지내고 난 후 음복(飮福)을 할 때 윗어른들을 위한 상과 그 아래 세대인 젊은 남자들을 위한 상, 그리고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상으로 3등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9] 이때 한 상에는 한 사람마다 밥과 국을 제공하지만 반찬은 한 상에 두어 나누어 먹고, 그게 똑같이 3개의 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같은 말을 만들어낸 성리학유학이 유난히 중시되던 조선 시대에는 아예 반상의 크기를 달리하여 서열을 구분지었을 정도이다.

하나 더 예를 들어서 수라상을 떠올려보자. 수라상 한 상의 규모는 흔한 명절상과 거의 맞먹거나 더 큰 것이 보통인데, 그렇게 큰 상을 말고도 다른 신하가 같이 끼어서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즉, 수라상 자체는 오직 한 사람인 왕을 위해 차려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다 먹을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차리며, 당연히도 왕이 그걸 다 먹지 않고 남은 것을 수랏간 나인들이 돌아가며 먹었기 때문에[10],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독상이 아닌 한 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 시대와 불교가 지배하던 고려 시대,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우리'는 모두 다른 개념이라 봐야 하므로 이 개념이 적용되는 '한 상(=겸상)' 또한 개념이 달라진다. 옛 자료가 가장 풍부한 조선 시대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은 암묵적 규칙이 있었다.

  • '한 상(반상)'에는 같은 소속이면서 같은 계층이어야 한다. 때문에 친구끼리의 상차림은 엄연히 말하자면 반상보다는 교자상(주안상)이 보편적이었다. 이건 계급 사회인 조선에선 밥을 먹는 행위가, 신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 한 가족 내에서도 '아버지'와 '아들(미성년)'은 겸상을 할 수 있지만[11], 그 아들이 성인으로 장성하면 겸상이 금기시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같은 남성이라도 겸상을 할 수 없었다.)
    • 딸의 경우는 7세 이상만 되면 거의 평생토록 아버지와의 겸상이 절대 금지된다. 어지간하면 할아버지와도 겸상이 불허되었고, 어머니나 할머니와의 겸상만 가능했다. 성인이 된 이후라면 더욱 제약이 심해진다.
  • 부부 사이는 슬하에 자식이 없는 상태라면 겸상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하는 자리에 있거나 슬하에 자식이 있다면 남녀칠세부동석 룰에 의해 서로 겸상이 불허되고[12], 아들과 딸 사이에서도 같은 이유로 약 7세 이상부터 겸상이 불가능하다.[13]
    • 단, 자식들을 모두 독립/출가시키거나, 같이 살더라도 별거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되면, 그 노부부(할아버지-할머니)는 다시 겸상할 수 있다.
  • 미혼 상태의 형제 및 자매 및 같은 세대의 사촌친척[14] 관계는 겸상이 가능하다. 여기에 배우자가 있는 형제-자매가 끼는 것은 일단 불가까지는 아니지만, 철딱서니가 없거나 눈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남매 관계는 남녀칠세부동석 규칙에 의해 불가하다.
  • 친밀도에 따라서는 반상 주인의 의지에 따라 제한적으로 겸상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예(禮)를 갖추는 자리에서는 겸상을 하지 않는다.[15]
  • 7세 미만의 아동은 본격적으로 예절 교육이 시행되기 이전인지라, 위 룰을 거의 대부분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조기 교육이든 뭐든 예절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라면 7세 미만이더라도 겸상에 제약이 생긴다.
  • 병약자(病弱者)처럼 보살핌이 필요한 경우라면 예외로서 겸상할 수 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보조쪽으로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 노비와 양반처럼 신분 차이가 너무 크게 존재하면 조건없이 불허된다.[16] 이것도 어르신 국룰(?)에 따라 크게 상을 내리거나 하는 등의 특수한 경우에는 예외처리를 할 수야 있기는 한데, 그건 정말 매우 지극히 예외적이다. (어지간하면 독상을 차려주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개념 자체가 가히 경국대전에 도전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

...이러다보니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겸상자리는 드물어서 소반(小盤)에 차린 독상이 표준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중인이나 백성처럼 계급이 낮아질수록 독상 비중이 점점 옅어졌는데, 단순히 가재도구를 넉넉히 들여놓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도 있고, 가족 및 이웃간 계급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성리학이 거의 국교급이던 조선 시대 초중기에는 겸상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지만, 중인 계층의 성장이 드세진 조선 말기로 갈수록 겸상이나 셋겸상 상차림의 경우가 늘어났다.

그렇다보니 유교 사상이 철저히 짓밟힌 일제강점기, 그리고 신분 사회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한국전쟁 이후 시대부터는 모두의 신분이 하향평준화 되었기 때문에 판도가 크게 달라져, 겸상의 조건도 아주 크게 완화되어 사실상 한 가족 한 밥솥 풍경이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한정식 스타일의 거대한 상차림[17]이 발달하게 된 계기도 기방의 생존방식 변화와 고급 한식당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정리하자면 기본적으로 한식의 상차림은 독상(1인상)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한국 요리에서의 독상은 1인을 위한 독상이 아니라, 한 집단 내에서 서열을 정리하다보니 독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겸상이라고 해서 독상보다 크고 반찬이 많다..., 와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혼자서 먹는 어르신용 독상은, 그 아랫것들이 들게 될 겸상보다는 최소한 같은 규모이거나 더 크게 나와야 한다. 한국식 겸상은 어디까지나 규모가 동일한 '상'을 두고 진지 3종 세트(밥, 국, 수저)를 추가하기만 할 뿐인데, 여기서 '숟가락(만) 얹는다'라는 숙어가 나왔다. 즉, 반상에 수저가 1세트면 '독상', 2세트면 '겸상', 3세트면 '셋겸상'...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독상을 차릴 때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이긴 하나), 겸상을 차릴 적에는 반찬의 배치에도 아주 매우 크게 신경을 써야 했다. 밥상의 주인(상위서열)이 되는 쪽 가까이로는 주력 반찬을, 마주보고 끼어드는 쪽(하위서열)으로는 밑반찬이나 잡다한 것 등을 배치한다. 서열을 특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최대한 대칭구조로 배치한다.

3.3 지역특색[편집]

한국 요리를 특색별로 크게 나누면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용어는 명확히 정립되어있지 않으므로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되기도 한다.

  • 궁중 요리 : 주로 서울(한양)의 고급요리를 가리키는 말. 정확히는 궁중에서 먹는 요리만을 가리키지만, 애초에 한양(漢陽)이 사대부의 도시이기도 했고, 온갖 진상품이 모이는 곳이니 만큼 재료의 제약이 없어서 음식이 발전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한정식이 유행한 이후 서울에서 내던 고급 요리 전반을 가리키게 된다.
  • 남도 요리 : 한반도 남부지방의 요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 호남을 떠올리기도 하고, 영남을 떠올리기도 한다. 공통적으로 짜게 먹는 점은 유사하지만 호남과 영남의 요리 스타일은 매우 다르다.
    • 영남 요리 : 영남지방은 평야가 많지 않고 매우 극적인 기후가 나타나는 지역에 마을이 발달했으며, 서울-부산을 왕래하는 유동인구가 많은 특성으로 보존음식과 발효음식이 발달한지라 맵고 짜게 먹는 습관이 남아있다. 또한 호남지방에 비해 산악지대가 많은 관계로 호남 못지않은 호족이 있었음에도 음식이 투박한 편이다.
    • 호남 요리 : 호남지역은 서해로 흐르는 강이 여러 개 끼어있어서 평야가 많았는지라 예로부터 먹거리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이에 반찬이 다양하고 전주와 같이 호족(豪族) 중심으로 발달한 마을이 많아서 궁중요리에 못지 않은 음식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 때문에 저장법을 응용한 음식의 비중 또한 높아서, 짜고 자극적인 음식이 제법 있는 편이다.
  • 제주 요리 : 현무암 지반의 특성상 논을 만들 수 없어 쌀 농사가 어려웠고, 지리적으로도 섬 특성상 타 지역과의 교류가 적고, 되려 본토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기에 일반적인 한국과는 많이 이질적인 음식 문화가 형성되었다.
  • 관동 요리 : 강원도의 요리를 가리킨다. 경상북도의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지방을 포함하기도 한다.
    • 영서 요리 : 대개 한반도 강원도 영서지방, 경상도 북서부, 충청북도를 아우르는 태백산맥 권역의 요리를 가리킨다. 농사가 어려운 산악지방 중심에 들어가 있어 매우 전형적인 산간지방식 투박한 요리가 거의 대부분이다. 토장 이외의 조미료 및 향신료는 거의 쓰지 않아서 지극히 담백한 맛의 음식이 많다. 강원도식 물김치(특히 동치미)는 거의 이북식 김치와 견줄 정도.
    • 영동 요리 : 대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의 해안지방쪽 요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해안지방 특성상 해산물 사용이 매우 높은 편이고, 또한 산맥 서쪽너머로 교류가 많지 않았던 탓에 전형적인 한국요리와는 이질적인 편이다. 영서 지방처럼 장류를 많이 쓰기는 하나 젓국의 비중이 조금 더 많고, 고추를 비롯한 향신료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 이북 요리 : 대한민국에서 흔히 쓰는 표현으로 북한의 요리를 싸잡아 가리키는 말이다. 반대로 북한에서는 이쪽 계열을 조선 료리라고 통칭하고 있다.
    • 관서 요리 : 평안도 지방의 요리를 말한다. 대개 황해도 지역(=해서)을 포함한다. 기름진 대동강 유역 덕분에 옛부터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곳이었다. 더군다나 평야 근처에 산지(山地)와 바다까지 가까이에 있는 덕에 고기와 수산물이 주류인 음식이 유난히 많이 발달했다.
    • 관북 요리 : 함경도 산악지방 및 북부지방을 가리키는 관북의 요리. 험준한 지형에 척박한 토지, 심지어 추운 기후인데다 군사도시로 오랫동안 유지한 탓에 호족도 많지 않아서 음식이 별로 발전하지 못했다. 동해안을 따라서 발전한 도시가 많은 덕에 수산물 음식의 비중이 다소 큰 편이다.

3.4 별이 다섯 개![편집]

한국 문화에는 3과 5라는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하였듯 이는 중국발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음식에서 특히 강조하는 3과 5는 자체 해석으로서 자연을 표현하는 가장 가까운 숫자인 점이 더 중요했다.

한국 음식은 오미(五味)를 만족하고 오방색(五方色)[18]을 만족한 것이 가장 으뜸이라 여겼다. 한 그릇 음식을 내오더라도 오방색 만큼은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고명(꾸미)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이다. 반상에 찬(餐)은 적어도 3가지 조리법(끓이기, 지지기거나 볶기, 무치기 등)[19]이 동원되어야 하고, 고급 반상이라면 5가지가 넘어야 정성을 들인 것이라 하였기도 했다. 몰론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 음식이 아니거나 불성실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따질 때 그러한 경향에 있다고 보면 된다.

3.5 혼합의 미학[편집]

한국의 식문화를 비빔밥 문화라 비유하는 만큼 현대 한국인은 음식을 섞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때론 심취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통적인 밥상 예절에서는 아예 '첫 술은 국물부터' 라고 하거나 '밥에 찬을 섞는 건 천한 것들이나 한다'[20] 라며 크게 경계하였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국물에 적셔 먹거나, 토장(된장/고추장)에 각종 나물 등을 밥에 넣고 슥슥 비벼먹는 것이 토속적이라 할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 남아있는 양념을 밥에 비비거나 볶음밥으로 재창조하는 정도는 이미 상식의 반열에 올라섰다.

단순한 밥상 위의 혼합 뿐 아니라 요리 자체에도 혼합이 보편화 되었다. 현대 한국에 개발된 요리로 예를 들면 쭈삼/오삼, 낙곱새, 김피탕, 섞어찌개 등에서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한 그릇 음식이나 한 상 요리인 경우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비빔밥을 포함한 덮밥이나 비빔면(짜장면 등을 포함) 같은 경우는 완전히 비벼준 다음에 먹는게 상식이고[21], 찜/탕 계열도 예외가 아니라서 상에 내온 형태를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크게 뒤집어 고루 섞어준 다음에 덜어가며, 팥빙수처럼 굳이 비빌 필요가 있나 싶은 것도 완전히 비벼내서 먹는게 보편적이다.

미리 오해를 덜어두자면, 이런 현상 자체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요소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문화로 보는 것이 옳다. 전통적으로도 한국적인 음식에는 조리 후의 조화로움을 가장 중시했었고, 제각기 개성이 강한 식재료를 조화롭게 섞음으로서 세세한 부분까지 새롭거나 안정적인 조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기 때문이다.

3.6 발효 과학[편집]

식재료를 발효시켜 저장하는 문화권 정도야 흔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발효 음식이 아예 식탁을 점령한 부분에서 유별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토속적인 한국식 밥상을 예로 들면, 발효된 으로 끓인 국에 발효된 야채로 만든 찬을 놓고, 발효시켜 만든 쌀 가공품과 조미료로 음식이나 다과도 만들고, 때로는 발효시켜 저장한 고기도 꺼내며, 덤으로 발효된 으로 덧간을 맞춘다.

4 한식의 세계화[편집]

2000년대에 들어 드라마 대장금의 대 히트 이후, 정부 차원에서 한류 사업의 일부로서 한식 세계화 프로젝트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부분 망했다. 도루묵 혹은 정신승리에 그친 결과가 많아서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예산만 쓸데없이 날린다며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처럼 한식의 보급은 잘 진척되고 있지 않은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의견들이 많다. 요약하자면 맛으로는 1. 맵고 2. 뜨겁고 3. 기름져서 문제고 홍보면에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선호하는지는 생각도 않고 자기네식으로만 밀어부치거나, 혹은 역으로 너무 특성을 없애버려서 특색이 드러나지 않는 탁상행정형 행사가 많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보통 세계화에 성공한 음식들을 보면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간 이주민들이 모국의 음식이 그리워 모국의 음식을 해먹다가, 그것을 현지인들이 보고 관심을 가지고 해당 음식이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는 과정을 거쳐 세계화가 진행된다. 그러니까 높으신 분들이 완장잡고 위원회 하나 만들어서 위원회가 정책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세계화가 이루어지는게 아니니 당연히 시원찮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정부 주도 한식 세계화 사업의 성과보다도 유튜버(대표적 예로 Maangchi)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더 영향력이 크다.

5 한식의 종류 및 구성[편집]

한식의 경우 기본적인 구성은 밥, 국, 반찬 이 세 가지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셋 중 두 가지를 섞은 비빔밥(밥+반찬)이나 국밥(밥+국), 부대찌개(국+반찬)같은 조합이 나오기도 한다. 한식의 반상에 오르는 건 좀 복잡하지만 그게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이 밥+국+반찬 패턴은 놀라울 정도로 적용이 잘 되는데
비빔밥(밥+반찬)+곰탕(국)
김밥(밥+반찬)+어묵국(국)
충무김밥(밥)+오징어무침(반찬)+장국(국)
국밥(밥+국)+깍두기(반찬)

등 이런 밥+반찬+국의 패턴은 김밥+오뎅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비단 한식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온 요리들도 한국식으로 밥+반찬+국의 배합을 적용시켜 먹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1 한식의 독특한 식재료[편집]

5.2 주식 계열[편집]

5.3 채소요리 계열[편집]

5.4 국물음식 계열[편집]

5.5 육류 계열[편집]

5.6 보존식품 계열[편집]

5.7 기타[편집]

5.8 한과, 후식 계열[편집]

5.9 음료 계열[편집]

5.10 한국 현지화 음식[편집]

5.11 북한 한정으로 먹는 음식[편집]

6 각주

  1. 외국에서도 사전 정도가 아니고서야 북한과 남한 요리를 그다지 구별하지 않는다.
  2. 흔히 한국에서 한반도라 부르는 지형이 고려 반도(Korean Peninsula) 혹은 조선 반도(한자문화권 통용명칭)라 불리는 것과 같다.
  3. 이 점은 중국 요리와도 공유하는 점이다. 반대로 일본 요리에는 뜨겁게 먹는 문화가 프랑스급으로 빈약한지라 일본인들이 뜨거운 국물을 먹고는 "아츠이!(뜨거워!) 왜 이런 걸 한국인들은 '시원하다'고 하는 거지? 당췌 이해가 안가네?"라고 한다.(먼나라 이웃나라 발췌)
  4. 비슷한 이유로 전통적인 유럽 서민요리에도 수프계열이 많다.
  5. 겨울이 추운 나라 치고는 특이한 편에 속한다. 세계적으로 매운 음식을 즐기는 나라들은 대체로 (아)열대기후에 많기 때문이다.
  6. 고추 유입 이전에는 산초(초피), 생강, 달래, 부추, 마늘 등을 사용하였다. 후추는 수입품이라 쉽게 쓰지 못했다.
  7. 몰론, 북쪽에서도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
  8. 보쌈(수육)과 같이 나오는 보쌈김치가 아닌, 전통적인 의미의 보쌈김치를 말한다.
  9. 서로간의 평등과 존중을 중시하는 21세기에 들어서는 그냥 모두가 한꺼번에 모여서 먹는 경향으로 가고 있으므로 이런 식의 분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10. 이를 '퇴선'이라고 한다. 본디 수라상이나 잔치상과 같은 거한 상차림은 마음껏 먹으라는 뜻에서 다 먹지 못할 양을 제공하고, 먹는 사람 또한 모자람이 없었다라는 뜻으로 다 먹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또한 왕이 기분이 좋거나 칭찬이 필요할 때는 신하에게 직접 수라의 반찬을 하사하는 일도 있었다.
  11. 단, 이것도 제약이 상당히 많았다. 고위층 자제의 경우는 밥상 교육으로서 독상부터 가르치는 일이 더 잦았다.
  12. 부부유별이 강력하게 적용되면 아예 같은 자리(방)에서 식사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상의 규모 또한 달라졌다.
  13. 이때 할아버지-손자, 어머니 or 할머니-손녀로 짝지어지는 것이 일반적.
  14. 친가-외가 관계는 불문
  15. 주로 잔칫상이나 연회상 등.
  16. 신하(고위직)-국왕 관계처럼 신분차이가 적은 경우는 수발을 든다는 개념으로서 가능하다.
  17. 한정식도 초창기에는 주안상에 더 가까웠지만, 코스(Course)제공 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진지'부분도 추가되어서 점차 겸상자리 형태로 변화하였다.
  18. 단, 자연 상에는 청색 식재료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녹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황색 또한 상대적으로 귀한 식재료가 많아, 높은 빈도로 갈색으로 바뀌거나 생략되었다.
  19. 여기에 밥과 국을 포함하면 정확히 5그릇이 된다.
  20. 계층이 낮을수록 식기(食器)가 적었기 때문이다.
  21. 이 분야에 고집이 있다면 누군가가 대충 비비거나 약간씩만 비비고 있으면, 좀 더 팍팍 비비라고 핀잔을 줄 정도이다.
  22. 고추 유입 이전에는 산초장을 먹었다.
  23. 원래 보쌈이란 김치의 일종인데 하도 수육하고 주안상으로 같이 먹다보니 아예 수육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