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종교개혁시기 독일(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영방들 중 팔츠 선제후의 통치지역의 주요도시인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들어진 요리문답서이다. 이 당시 팔츠의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3세(1515-1576)는 선제후가 되자마자 성찬교리[1]의 논쟁 때문에 꽤나 머리아픈 일을 겪게 된다. 당시 루터파의 지지자였던 틸레만 헤슈시우스[2]와 개혁주의쪽 견해를 가지고 있던 빌헬름 클레비츠[3]간의 논쟁은 매우 신랄하여 나중에는 각자의 설교 강단에서까지 이 문제를 다루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키배의 모습이 나타났던것. 이에 빡친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두 사람을 모두 다 해고하여 다른 동네로 보내버리면서 일단 안정을 찾게 된다. 이후로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염려한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영지 내의 질서와 평화 유지를 위하여[4] 두 키배 당사자의 후임자로 오게 된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와 자라리아스 우르시누스에게 새로운 요리문답서의 작성을 명하게 된다.

이 요리문답서는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 이외에도 당시 하이델베르크의 신학부 교수회와 교회의 목사와 감독자들, 그리고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3세까지 관여하여 편집하고 승인된 교리문답서이다.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딸려있는 요리문답과 함께 가장 크게 권위를 인정 받는 두 요리문답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이전의 요리문답[편집 | 원본 편집]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작성된 요리문답서인만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에 영향을 주었던 이전의 요리문답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 1529년 : 루터의 소요리문답 작성
  • 1542년 : 칼뱅의 제네바 요리문답 작성 : 칼뱅의 요리문답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일부 영향을 주었다고 보인다.
  • 1561년 : 우르시니우스의 소요리문답 : 주요 출처 중 하나이다. 1문의 내용부터 이어지는 내용이 거의 유사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거의 초안 수준. 사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상당히 많이 관여한 사람인지라 영향을 주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한 것.

구성[편집 | 원본 편집]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29개의 문답이 전체 52주일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주일 낮이나 오후 예배 중 1번은 이 내용을 사용하여 설교를 하게 하여 설교자의 지식이나 성향, 배경 등의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장치이다.

제1주일은 전체의 서론으로 "위로"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이후 다음의 세 주제로 구분된다.

  • 1부 :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제2-4주일)
  • 2부 :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제5-31주일)
  • 3부 : 우리의 감사에 관하여 (제32-52주일)

기타 사항[편집 | 원본 편집]

  •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데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신앙고백(신조)인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이 꽤 광범위하게 들어가 있다(8주차에서 22주차까지의 내용)
    • 특히 44문에는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음부강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루터파의 성찬교리인 육체적 재림설과 개혁주의쪽 성찬교리인 영적 임재설 간의 논쟁
  2. 하이델베르크 성신교회의 설교자이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
  3. 하이델베르크 대학 학생이자 교회 집사
  4. 현대의 관점으로는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당시에는 종교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높던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