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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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에티엔 플랑댕
Pierre-Étienne Flandin
Pierre-Étienne Flandin 1935.jpg
인물 정보
출생 1889년 4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58년 6월 13일 (69세)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알프마리팀 현, 생장카프페라 시
국적 프랑스
정당 민주동맹(ARGRI[1])
배우자 마르그리트 바르비에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프랑스어: Pierre-Étienne Flandin)프랑스 제3공화국의 제74대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제3공화국 말 온건 중도우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기[편집 | 원본 편집]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은 1889년 4월 12일 파리에서, 튀니지의 주 의원이자 상원의원이었던 아버지 에티엔 플랑댕(Étienne Flandin)과 어머니 마리 리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 유복한 환경 덕에 그는 명문 사학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명문 그랑제콜 중 하나인 파리정치대학에서 법학과정을 이수한 뒤, 파리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따고, 전업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정계의 우익 중진이었던 알렉상드르 밀랑의 눈에 띄어, 그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고, 1914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그는 센 지역의 상원의원인 레옹 바르비에의 딸과 결혼했다.

그렇게 정력적으로 정치 생활을 하던 플랑댕은 비행기 조종에 빠져, 1912년 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따냈고, 1914년에 육군 항공대의 제33비행단에서 조종사로 복무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플랑댕은 정치인 이력 덕분에 육군부 산하 항공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협상국에서 알아주는 항공행정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그에 따라 최초로 제공권과 상업용 항로, 국제적 항공법에 대해 규정한 1919년의 파리 협약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그 공로로 플랑댕은 육군부에 새로 신설된 항공차관으로 입각하게 된다. 그리고 플랑댕은 항공차관으로서 국가기상청을 설립하고, 항공 기술 및 산업을 육성했으며, 그를 위한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플랑댕의 항공에 대한 헌신은 프랑스 항공 협회(Aéro-Club de France)의 감사패와 협회 회장 자리로 플랑댕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플랑댕은 내각 각료로서의 업무 때문에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나, 협회는 그를 명예 회장으로 삼았다.

이렇게 항공산업 육성에 진력을 다하는 한편으로 플랑댕은 1919년과 1924년에 욘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연거푸 당선되면서 그는 점점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는데, 대표적으로 플랑댕은 법률 위원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선진적인 제안을 의회에 상정한 적이 있었고, 재무 위원회에서 철두철미한 예산 책정 및 감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 결과, 그는 1928년에 하원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29년에는 앙드레 타르디외 총리로부터 내각 입각을 권유받아, 산업통상부 장관으로 입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부터 32년까지 존속했던 피에르 라발 내각의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그 뒤를 이어 1932년의 단명한 타르디외 내각에서도 재무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그렇게 유망한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떨치던 그는 1933년 민주동맹(Alliance Démocratique)의 당수로 선출되었고, 우익 단독 내각을 주장하던 타르디외와 폴 레이노에 맞서, 리버럴 정당(대표적으로 급진공화당)과의 연정을 추구했다. 그러나 미국발 대공황이 프랑스를 휩쓸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플랑댕은 레몽 푸앵카레 내각 시절 내놓은 보수적인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섣부르게 영국을 따라 프랑화 가치를 절하한 결과 프랑스 경제는 특유의 식민지 블록 경제가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매력이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도 재무장관으로서 금의 유출을 최소화하는 등의 금 보유고 관리는 잘한 덕에, 추후 인민 전선 내각의 경제 회복에 어느 정도 밑거름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최악을 피했다는 수준에 불과했다.

6개월의 총리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이후 스타비스키 사건으로 인해 1934년 프랑스 헌정 위기가 터졌고, 이 사단을 수습하기 위해 프랑스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던 가스통 두메르그가 총리로 복귀하면서, 플랑댕은 내각의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전 총리이자 두메르그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던 루이 바르투가 불가리아 공산주의자였던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의 총에 맞아 죽고, 두메르그가 야심차게 제안했던 1875년 헌법의 개헌 제안이 의회에서 비토를 당했으며, 총리인 두메르그 그 자신도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자, 8개월 만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결국 후임 총리의 지명권은 당시 부총리였던 앙드레 타르디외에게 돌아왔으며, 타르디외는 플랑댕을 두메르그의 후임 총리로 지명하게 된다.

라인란트 재무장[편집 | 원본 편집]

페탱의 쿠데타에 합류하다[편집 | 원본 편집]

전후[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L’Alliance des républicains de gauche et des radicaux indépendants, 독립급진공화좌파연합, 민주동맹 내 중도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