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템킨호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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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제정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전함 포템킨에서 사병처우 및 급식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수병들의 선상반란 사건.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군대리아를 배식하면 일어나는 사건

당시 상황 및 배경[편집 | 원본 편집]

사건이 발발한 1905년 6월은 러일전쟁이 끝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쓰시마 해전으로 러시아 발틱함대가 괴멸당했지만, 포템킨 호는 흑해함대 소속 전함으로, 다르다넬스-보스포로스 해협의 통과 문제 등으로 인해 흑해함대가 일본 원정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평상적인 임무와 훈련 업무를 소화중이었다.

러시아 내부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시위와 파업이 일어나는 중으로 러시아 정부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불만은 가중되고 시위는 확산일로였다. 여기에 전쟁에서 사실상 패전했다는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은 극도로 쌓여갔다.

해군의 경우, 당대 주요국가 중 수병에 대한 처우가 가장 안 좋기로 악명높았고, 귀족 출신들이 주로 고급장교직을 독차지하면서 귀족과 평민이라는 계급갈등 요소까지 잠복해 있었다. 특히, 전쟁으로 예산이 부족해지면서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후방부대에 대한 예산은 넉넉하지 못했다.

과정[편집 | 원본 편집]

이것도 먹으라고 준거냐?[편집 | 원본 편집]

1905년 6월 26일[1] 전함 포템킨은 훈련을 위해 어뢰정 N267과 함께 오데사를 출항한 상태였다. 어뢰정 N267의 정장인 대위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Klodt von Jurgensburg) 남작은 포템킨의 함장 예프게니 골리코프(Evgeny N. Golikov) 중령의 지시를 받아 오데사에 입항, 고기를 포함한 여러 식자재를 구매해서 포템킨에 전달했다. 밤에 식자재를 전달받은 취사반은 고기를 갑판에 걸어 놓아 다음날에 조리할 준비를 한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다음날 갑판의 수병들은 악취로 고생하기 시작했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갑판에 내걸린 고기들의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끔직한 광경을 보게 된다. 이를 직접 목격한 수병들, 그리고 말로 전해듣고 갑판으로 몰려든 수병들까지 더해지면서 수백여 명의 수병들이 불만을 표하며 웅성거렸다.

일본군도 이런 썩은 고기로 만든 음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을거요![3]
— 신원 불명의 포템킨 호 수병[2]

단순히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것이 불만 폭발의 이유는 아니었다. 원래 보관문제로 해군은 항해중에 썩은 고기를 먹는 일이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상술했듯 포템킨이 오데사를 출항한 것은 그 전 날인 6월 26일이었고, 이 날 배식된 고기는 6월 26일에 오데사에서 산 거다! 즉, 처음부터 썩은 고기를 샀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정황상 장교들이 뒷돈으로 꿀걱했을 공산이 높았던 것이다.이래서 먹는거 갖고 장난치면 안 된다. 설사 횡령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구매한 장교가 제대로 식자재 검수를 하지 않고 대충 샀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 소요에 불을 지핀 것은 군의관 스미르노프(Smirnov)였다.

이건 좋은 고기야, 아무 문제 없어.뭐라고요? 식초로 씻어내기만 하면 돼.
— 스미르노프 군의관, 병사들을 제지하며

간단히 말해 식초로 소독해 쳐먹어 쉐키들아를 시전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게 취사반에게 이 고기로 점심을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당연히 사병들의 반발은 커져만 갔고, 자기가 기름 부어놓고 뭔가 상태가 심상찮다고 판단한 스미르노프는 수병들의 소요가 심각해져 간다고 함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골리코프 함장이 나서서 수병들을 집한시킨 후 가벼운 수준으로 사용되는 상투적인 위협(니들 자꾸 시끄럽게 하면 교수형시킨다?) 한 마디를 던진 후 고기를 육상으로 보내 검수하겠다고 약속하는 채찍과 당근 화법으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그러나 함장의 이러한 노력을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로프스키가 뒤엎는다. 평소 함장의 온건책에 불만이 많던 길리아로프스키는 함장이 이렇게 약하게 나온다면 수병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반발하며 함장이 연설을 마치고 해산시킨 수병들을 바로 재소집했다. 길리아로프스키는 사병식당에서 사병들이 빵과 물로만 식사하고 고기로 끓인 보르시(borsh)[4]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왔던지라 더더욱 격분해서 사병들에게 급식을 강요하며 소금과 물로 헹궈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군의관을 말을 반복하고 급식을 거부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아무도 보르시 식사를 하려하지 않자솔직히 먹고 싶겠나... 오후 1시, 사병들을 갑판에 불러모아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난리를 피우며 임의로 12명을 뽑아내어 방수포를 뒤엎는다. 이는 총살형에 앞서 수병들의 얼굴과 몸을 뒤엎는 행위로 총살형을 집행하는 병사들이 동료 병사를 총살하는데 있어 감정적 망설임을 줄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부장의 지시에 사병들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하고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다만, 시일이 지난 후 상식적인 선에서 연구가 진행되면서 길리아로프스키가 진짜 총살형을 집행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이다. 총살형의 권한은 함장에게만 제한적으로 부여되어 있었고, 부장에게는 사병 징계의 수단으로서 태형 및 구류만이 가능했다. 즉, 길리아로프스키는 총살형 위협을 하며 사병들의 불만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끓는 물에 기름을 붓는 격이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불난 집에 부채질은 군의관이 이미 했다. 이건 불난 집에 부채질한 상황에서 기름까지 붓는 격이다.

결국 이러한 대응이 수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수병 중 소수 사회주의가 및 선동가들에 의해 무기를 들고 일어서자는 외침이 시작되었다. 부장이 위협용으로 갑판에 배치시킨 위병들조차 부장의 통제를 따르길 거부했고, 격분한 선원들은 즉시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발생한 총격전에서 수병 1명과 길리아로프스키, 그리고 길리아로프스키를 따르던 견습사관 1명이 죽었고 피를 본 수병들은 흥분하며 장교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길리아로프스키와 별개로 각자 업무를 보고 있던 장교들은 총성에 당황하여 상황 파악을 위해 뛰쳐나오다가 사살당했다. 일부는 바다에 몸을 던져 어뢰정 N267로 도망치거나 도망치던 중 사살되었다.

사회주의자 코발렌코 대위는 봉기에 참가하고자 했으나 어설프게 나섰다가 장교라는 신분상 사살될 것을 우려 몸을 숨기고 있었고, 평민 출신 톤 대위는 사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으나 설득에 실패하고 교전 끝에 사살당했다.

한편 골리코프 함장은 총성 등을 통해 부장이 사고쳤다는 것을 깨닫고 측근장교 알렉세예프 대위를 탄약고로 보내 불을 붙여 자침을 시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템킨은 전함이었고 흑해함대에 포템킨에 맞설 전함은 한두 척에 불과해서 이 배가 고스란히 반란군의 것이 된다면 진압할 수단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예프는 탄약고로 향하던 도중 수병들에게 발각되자 바로 투항하여 함장을 배신했다.

이후 골리코프 함장은 발견당해 사살되었고, 숨어 있던 불난 집에 부채질한 군의관 스미르노프는 끌려나와 구더기가 생긴 고기를 강제로 입에 물린 채 사살되었다.

한편, 포템킨에서 탈출한 장교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 어뢰정 N267정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포템킨의 수병들이 어뢰정을 향해 발포, 탈출이 어렵다고 판단한 N267정의 수병들이 장교들을 위협하고 장교들 역시 탈출이 어렵다는 데 동의함으로서 도주를 포기한다. 이후 N267정은 항복, 포템킨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장교들은 흥분을 가라앉힌 수병들덕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감금된다.그 와중에 썪은 고기 사 온 장본인 유르겐스부르크도 살았다.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포템킨을 통제하는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대표 30인을 선출했으며 그중의 우두머리로 수병 출신이며 봉기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마두셴코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함을 조함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투항하여 협력 중인 장교 중 알렉세예프 대위를 함장으로 임명했다.

포템킨의 적기, 그리고 오데사의 참극[편집 | 원본 편집]

연초에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 전역은 시위로 가득했고, 흑해 연안의 대규모 항구도시 오데사도 마찬가지였다. 4월경부터 부두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와 파업이 시작되었고, 이를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비밀리에 조직, 지원하였다. 6월경이 되면 시위는 전 도시로 확대되었고, 6월 25일부터 대대적인 동반 파업이 개시되었다. 6월 26일에는 대규모 시위대가 결성, 가두시위를 벌이다 마침내 충돌이 발생했고, 진압에 나선 군과 시위대 양측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 26일을 기해 군정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런 절묘한 시기에 맞춰서 포템킨이 오데사로 온 것이다.

포템킨 호는 6월 27일 밤에 오데사 항에 돌아와 외곽에 닻을 내렸다. 시민들이나 군 장교들 모두 포템킨이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온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오전, 해가 뜨면서 시민들은 똑똑히 보았다. 포템킨에 게양된 깃발이 러시아 해군기와 전혀 다른 적기라는 사실을.

오데사의 통치당국은 제대로 멘붕해서 시장은 상층부에 직접 이 중대한 사태를 보고해야 한다며 기차편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망쳤다.(...) 군정당국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여서 군정장관 콜하노프는 함포사격에 대비해 군부대의 주둔지를 분산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서방국가도 마찬가지여서, 오데사의 영국과 프랑스 공사관은 즉시 본국에 전함의 반란 사실을 타전했고, 해상보험사인 로이드는 흑해를 항해하는 모든 함선들에 대한 해상보험료를 올렸다.

반대로, 사회민주당 등 좌파 활동가들은 감격에 벅차 올라 야 이 정부군놈의 쉐키들아! 니들 지금 꼼작 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함을 델꼬가서 네놈들 머리를 다 날려버리겠어!라며 기세등등하게 포템킨에 방문하여 포템킨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포템킨은 시위대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오데사의 사회민주당 조직은 오데사에 주둔한 카자흐 기병대로부터 시위대를 지켜주기 위해 수병들이 무장 후 상륙하여 시위대와 같이 해줄 것, 포템킨의 함포로 정부군 주둔지를 타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수 활동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더기 고기에 피꺼솟해 궐기한 일반 수병들이었던지라 인민위원회는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설사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수병들이 카자흐 기병대와 육상에서 충돌할 경우 승패는 너무나도 뻔해서 포템킨의 사회주의자들도 오데사에 수병들을 상륙시키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오데사의 군 주둔지에 포격을 가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포템킨의 인민위원회에게는 오데사 시내에 대한 지리정보와 포격좌표 정보가 전무했다. 차마 오데사 사회민주당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포격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는 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오데사의 시위대는 크게 고양되어 28일에 이미 시민 대부분이 참여하는 가두시위가 일어났고, 군정당국은 포템킨을 두려워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군정당국의 대응에 더더욱 자신감을 얻은 시위대는 다음날인 6월 29일 더 큰 시위를 일으켰으나 카자흐 기병대가 이번에는 과감하게 진압에 나서 수많은 시위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한계점 봉착과 반란의 끝[편집 | 원본 편집]

대규모 진압소식을 들은 포템킨의 인민위원회는 오데사측의 계속되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부군에 대한 포격을 결정했다. 그러나 오데사 지도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포격은 죄 빗나갔고 그나마 소심한 나머지 몇 발 쏘고 그만뒀다. 포격이 시작되자 콜하노프 장군은 망했어요를 외쳤으나 결과를 본 후 포템킨이 제대로 함포사격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확신하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 자신감은 포템킨을 제압하러 출동한 전함 중 1척이 오히려 포템킨에 가세(...)하면서 바로 사라지긴 했지만.(...)

7월로 넘어가면서 상황은 명백해졌다. 대규모 유혈진압 이후로 오데사 시민들은 포템킨에게 물자를 공급해주길 꺼려했고, 포템킨은 배의 추진을 위한 연료인 석탄에서부터 당장 먹고 마실 식량과 식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부족에 직면했다. 그리고 포템킨에 가세했던 전함 1척이 며칠 안 가 바로 이탈을 시도한다.이럴거면 왜 합류했냐? 포템킨의 포격 위협으로 이탈을 포기하나 싶었지만 곧바로 해안으로 배를 끌고 가 좌초를 선택, 오데사 군정당국측에 합류한다.

포템킨 인민위원회는 다시 한 번 회의를 열었다. 오데사에서 합류한 함 외부 출신의 사회민주당 당원을 제외하면 누구도 결사저항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포템킨 인민위원회 회의 최초이자 최후의 만장일치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인 루마니아로의 망명을 결정하고 콘스탄차 항구로 향했다.

콘스탄차 입항 후, 루마니아 정부와 협상을 벌이던 포템킨은 협상이 실패하자 흑해로 뛰쳐나와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도로 콘스탄차로 돌아갔고(...) 루마니아 정부의 제의를 받아들여 전원 루마니아 국적 취득 및 포템킨을 루마니아 정부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일정 금액을 받아 승무원들에게 균등히 나눠주는 것으로 반란을 끝냈다. 알렉세예프 대위 등 소수파가 러시아 정부로의 투항을 주장, 러시아 투항을 주장하는 인물들은 어뢰정 N267로 옮겨타 셰바스토폴로 향했다. 이후 포템킨 인민위원회는 해산 후 상륙과 동시에 배를 자침시켰다.

의의[편집 | 원본 편집]

러시아 체제의 취약성[편집 | 원본 편집]

제대로 된 밥 안주면 뭔 꼴 나는지 + 꽉 막히고 권위주의적인 통치가 어떤 참극을 부르는지가 콤보로 결합하며 발생한 수병 반란사건으로 본격적인 공산혁명은 아니었다. 물론 선동가들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긴 했지만 이념과 무관계한 대부분의 수병들은 자기 목숨을 중요시 여겼기에 오데사 사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반대할 정도였다. 당장 포템킨 호 수병들은 대부분 반란 종식 후 루마니아 등지에서 농사나 지으며 혁명에 관심없이 살았다.

그러나 우연히 발생한 이 반란으로 인해 당시 러시아 군의 상황 및 군, 사회의 취약성이 아주 제대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포템킨 호는 흑해함대에서도 수병반란 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평가받아 훈련항해에 나선 배였는데, 그런 배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거다.(...) 포템킨 반란 직후에도 흑해함대는 주력함 다수를 반란 위험성때문에 출동시키지 못하고 일부만을 내보냈는데 그 일부에서도 또 반란.(...) 심지어 반란이 끝나가던 6월 말, 소형함 1척이 항해중 장교들을 제압하고 반란에 가담하여 오데사 항까지 오기도 했다. 정작 그때 포템킨은 루마니아로 간 직후였기 때문에 그 배는 망했어요.(...)

즉, 포템킨 호의 반란이 흑해함대 전체적으로 연쇄효과를 불러왔고 하마터면 흑해함대 전체가 와해되고 러시아 남부(현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혁명이 본격화되었을 것이란 관측까지 있다. 포템킨이 조금만 더 적극적이어서 오데사 사태때 보다 깊숙히 개입, 포격으로 정부군을 물러나게 했다면 러시아 혁명이 보다 일찍 일어났을 거라는 주장이 그 예이다.

결국 포템킨 호의 반란은 10여 년 후 있을 러시아 혁명의 예고편이며 동부전선 러시아 군의 집단탈영과 항명, 궐기를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전함 반란의 공포[편집 | 원본 편집]

20세기 초 기준으로 전함은 국가가 보유할 수 있는 최강의 무력수단이었으며 이를 격퇴할 방법은 같은 전함 외에는 없었다.10년 뒤에 잠수함 나오고 30년 뒤에는 비행기가 전함 쳐잡지만 이때는 아직... 괜히 오데사의 시장이 도망친 게 아니고 오데사 군정장관이 각지의 증원을 받아 1만여 대군을 배치했음에도 포템킨 1척에 전전긍긍한 게 아니다. 전함 1척이 반란을 일으키면 육상세력이 이를 제압할 방법은 사실상 없었고, 해상세력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포템킨 호 반란의 진압은, 직접적인 무력투사가 아니라 보급로를 잃은 고립된 전함이 스스로 반란을 종식하고 도망쳤기에 가능했다.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각국의 군, 정부 지도부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서 수병 처우 개선이나 유사시 선상반란 진압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실 영국같은 경우 예전부터 선상반란을 하도 많이 당해봐서(...) 수병처우를 개선하고 장교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해군육전대 등으로 반란진압의 준비를 하여서 전함의 시대 이후로는 본격적인 선상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러시아는 아무래도 육군국이다 보니...

후일담[편집 | 원본 편집]

승무원들의 말로[편집 | 원본 편집]

N267정을 타고 투항한 알렉세예프 및 그 동행인들은 귀족 출신이 섞인 덕분인지 대부분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 외에 개별적으로 이탈했던 수병들 60여 명은 사형, 시베리아 유형 20년 징역형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루마니아 망명을 선택한 사람들은 첫 1년은 농업 등에 종사하며 행복하게 보냈지만 루마니아 정부의 통제를 받았고 그 통제에 반기를 들면 가차없이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추방된 사병들의 말로는 당연히 시베리아행.(...)거기다 1906년 루마니아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면서 포템킨 호 선원들은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히게 된다.

1907년에는 러시아 정부가 사면령을 발표, 봉기 지도자였던 마두셴코를 포함한 다수가 러시아로 귀국했지만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였다.(...) 마두셴코는 사형, 나머지는 얄짤없이 시베리아행.자비없는 짜르

일부는 서유럽과 남미 등지로 이주해서 평범한 삶을 살았고, 루마니아에 잔류한 사람 중 일부는 러시아 혁명 직후 소련으로 돌아가며 영웅 대접을 받았다.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포템킨의 말로[편집 | 원본 편집]

포템킨 인민위원회로부터 정식으로 돈을 주고 포템킨을 인수한 루마니아 정부였지만 애당초 포템킨 인민위원회는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기구였고, 당연히 러시아는 루마니아에 배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한다. 루마니아 정부가 이에 굴복하면서 러시아 해군은 자침한 포템킨을 어떻게든 되살려 셰바스토폴로 끌고가 판첼리몬으로 재취역시킨다. 아무래도 반란함의 함명을 그대로 계승할 수 없다보니...

자침한 반란함을 굳이 건져가며 재취역시킨데는 러일전쟁으로 해군력을 말아먹은 러시아의 사정이 한몫 했다.(...)그래봤자 보스포로스-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흑해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한다.[5] 얼마 안남은 해군전력이다보니 어떻게든 살려내서 재활용해야 했던 것.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버레츠 자 스바보두라는 이름을 달고 참전했다. 이후 1925년 퇴역 및 스크랩처리. 소련 정부는 상징적인 이 배를 어떻게든 살려내고자 했으나 적백내전 기간동안 방치, 파손되어서 되살릴 방법이 없었다.

각주

  1. 당시 제정러시아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6월 13일이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혼동하기 쉬운 것이 바로 역법 차이에 따른 시간 문제이다.
  2. 리처드 휴, 전함 포템킨(2005), 21p
  3. 당시 전쟁중이던 적국 일본도 러시아 포로들에게 이런 형편없는 식사는 주진 않을 거란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러일전쟁기 일본의 러시아군 포로 대우는 국제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수준을 넘어서 식사, 치료 등 여러 면에서 상당히 배려를 해준 편이었다.그런데 왜 태평양 전쟁땐...
  4. 러시아 요리의 일종인 고기스프
  5. 보스포로스-다르다넬스 조약으로 해당 해협을 관할하는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 군함의 해협 통행이 금지된 것이 1870년대다. 21세기인 현재에도 어느 정도 완화는 되었지만 비슷한 조약이 있어서 흑해 연안국을 제외한 국가는 흑해에 군함을 일정시간 내에 체류시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