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조선 내 일본인들의 귀국과정

개요[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일본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일본인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일본으로 귀국하였을까? 이 문제는 국사책에서든, 근현대사 책이든 단순하게 한두 줄 정도로 끝났던 문제였지만 절대로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 문서에서는 일본인들이 패전 후 식민지에서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갔는지, 그리고 그 심정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문서이다.

패전 후 조선[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8월 15일 정오, 경성부 내무부장 교스케는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곧 본국 정부에서 중대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모두 라디오에 귀기울이기 바란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라디오의 볼륨을 키웠다..[1]

모든 게 바뀌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은 기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일본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패전 이후 일본 고위층의 자기 보신 행위는 민심 이반을 유발했다. 실제로 1945년 8월 15일 부산지방교통국장이었던 다나베 나몬은 항복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바로 '조선 총독 부인 일행'이 돌아갈 배를 준비하라는 업무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배는 8월 17일 귀항해야했는데 이유인즉 배가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의 무게를 이기질 못하고 기울어졌기 때문이었다.[2]

갑자기 제국이 무너진 상황은 조선 내 일본인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어떻게든 자기라도 살아야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식민지내에서 벌어들인 재산을 어떻게 일본으로 온전히 가져갈지, 어떻게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지, 조선에서 계속 살 수는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일본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조선인들은 밖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자축하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일본인의 입장으로서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상황이 창문 바로 바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사장인 호즈미 신주쿠로(穂積真六郎; 1889~1970)는 항복을 듣자마자 현재 을지로 입구에 가서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만일 정전이 일어날 경우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와 함께 어둠에 대한 공포를 일본인들이 느껴야 함을 상기시켰다.

그는 8월 16일 조선인들이 붉은 기를 들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 소련군이 온다는 소문을 상기했다. 그런 도중 회사에서 들려온 전화때문에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로 가는 길에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을 보았다. 그는 1919년의 만세 사태를 기억해냈다. [3]

조선인들의 분노는 신사,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불상사건(不祥事件)이 913건, 그리고 경찰관, 공무원, 학교 교원을 상대로 발생한 살상 및 폭행 사건이 267건[4]이 보고 된 것으로 보여졌다. 특히 신사는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일본인 보다 조선인의 피해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문제는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과 분리되어 살았던터라 조선인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들은 왜 조선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래 이야기를 보자.

"일본에는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조선에 계속 살면 안되요?"
"미군정은 모든 일본인의 퇴거를 명령했다. 이제 조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곳이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인데. 패전을 했다고 꼭 떠나야 했나요? (중략)

하지만 8월 15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호즈미는 혼란스러웠다. 이곳이 자신이 살아온 조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이렇게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조선인들이 이토록 크게 소리내어 떠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가 다녔던 학교에는 조선인이 없었고 친구, 지인중에서도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가끔씩 재래시장에 놀러가서 보았던 물건을 파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그가 아는 조선인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조선인들은 온순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5]

한편 패전 이후 일본인들은 혼란에 빠져 은행에 몰리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6일에 약 2억 원이 인출되었다고 한다. 당시 경성 소재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가버린 것이다. 총독부는 이런 상황의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돈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조선 주재 일본인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8월 19일 조선군관사령부가 이런 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유지를 다 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 수습에 들어갔다. 또한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과 총독부 정보장관은 소련군 진주설과 같은 유언비어에 속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향후 정치적 군사적인 부분은 연합군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6]

지금까지 보았다 싶이 일본인들은 패전 후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잔류와 귀국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였고, 또 앞으로 다가올 점령국의 정책에 따라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잔류? 귀국?[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혹은 그 전, 후부터 조선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조선을 떠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조선에서 일군 재산들을 일본으로 온전히 가저갈 수 없었고, 몇몇 일본인들은 일본에 일가친척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9월 12일 소공동의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서는 조선어 강습이 열렸다.[7] 오랜 시간 금지되었던 조선어를 일본인들이 앞다투어 "가갸거겨"를 배우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날 오후 4시 개강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사야 야스타로(笠谷保太郎)는 "상황은 다르지만 과거 경성YMCA가 막 조직되었을 때 시작한 사업이 바로 조선어 강습"이라고 말했다. 이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염원을 지닌 자들은 먼저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화,목,토 오후 4시부터 90분간 진행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강사는 오쿠야마 센조(奥山千三)였다.[8]

이런 조선내 일본인 사이의 조선어 열풍은 조선에 잔류하려는 일본인들의 열의를 나타낸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희망은 이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인천 세화회[편집 | 원본 편집]

남한의 경우[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9월 남한 내에 미군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군정은 대체로 모든 일본인들이 귀환을 할 것이라 예상하고 이를 위한 수송계획을 수립했다. 미군정은 개인적인 귀국으로 인한 무질서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남한 내 일본인들이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금액도 1000엔으로 한정했다. 처음에 미군정은 귀환이 아닌 잔류를 택한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귀환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지만 조선 내 반응이 일본인들의 전면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미군정은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의 경우[편집 | 원본 편집]

조선 거주 일본인들 기준에서 남한의 미군정에게 겪은 시련이 커피였다면 북한의 소련군의 것은 TOP였다. 일단 북한쪽에서는 먼저 경찰서장과 같은 권력층에 있었던 일본 사람에 대한 물리적인 피해가 가해졌다. 아래 이야기를 보자.

아사히 신문의 청진 지국장 가네모토 아쓰오(兼元淳夫)는 피난길에 우연히 우메다(梅田) 전 웅기경찰서장을 만났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의 얼굴은 피로 흥건했다..(중략)..우메다는 경찰 계통에서 보기 드물게 고속 승진한 인물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떤 이유는 그의 근무지 함경북도가 적화의 전원지였기 때문이다...(중략)..천하의 우메다가 피난길에서 만나나 살마은 다름 아닌 1938년 적화 분자 대소탕 작전 당시 그가 검거했던 조선인 보안 대장이었다. 가네모토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보안대장은 "내 얼굴을 기억하는가?"라며 물었다. 우메다는 그를 지긋이 올려다 보고서는 "모른다"라고 했다.(...) 부대장은 그의 옷을 벗겼고, 옆에 있는 여인네가 신고 있던 다 떨어진 게다를 줄에 꿰어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
"당신은 7년 전 우리를 이렇게 해서 시가지로 끌고 다녔다. 기억나지 않는가?(..) 그때 부락 사람들이 강변에서 내려왔다. 맨앞에 선 노파는 우메다를 보자마자 마치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한 손에 쥔 빨래방망이로 그를 계속 후려쳤다.(..)

부대장은 노파를 말리며 (일본인) 피난민 무리를 향해 말했다. "여려분, 이 노파의 아들은 우메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무고한 죄로 검거되어 심한 고문 끝에 죽었습니다. 우리 고향을 훌륭하게 만들고자 했던 최고의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는 불쌍한 일반 일본인에게는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중앙에서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고 조선을 파괴한 '경관과 군인'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부디 여러분, 우리들의 기분을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우메다는 이 노파의 아들만이 아니라 우리 형제들, 동지를 수천 명이나 사회에서 매자했습니다. 이 깊은 한을 헤아려주기 바랍니다. 이 살마은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이 행색으로 마을을 돈 뒤에 다음 마을로 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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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조선 거주 일본인들에 대한 대우[편집 | 원본 편집]

조선을 향한 그들의 시선[편집 | 원본 편집]

관련 항목[편집 | 원본 편집]

참고 문헌[편집 | 원본 편집]

  •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각주

  1.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83
  2.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17
  3. 위의 책, p.24
  4. 위의 책, p.25
  5. 이정현, 소설스러운 역사이야기(8) 패전과 귀환, 조선땅의 일본인들, 새가정, 2014, pp.86~88
  6.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 p.34
  7. 이면식, 조선을 떠나며, 역사비평사,p.80
  8. 위의 책, pp.80~82
  9. 위의 책, pp.12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