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상륙작전

  • 統營上陸作戰
They might capture ecen the devil.
— 마가렛 히킨즈 UPI통신 기자, 귀신잡는 해병대 전설의 시작
통영상륙작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8월 17일
위치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 일대
결과 대한민국 해병대의 승리
교전단체
대한민국 북한
김성은 중령
병력:
해병대 1대대(3개 중대)
해군 1개 중대
병력:
7사단 1개 대대 750명
손실:
사망 19명
부상 47명
손실:
사망 469명
포로 83명

통영상륙작전은 한국전쟁 당시 수세에 몰렸던 국군이 단독으로 시행한 상륙작전으로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한 북한 공산군은 개전 후 불과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8월 중순에는 포항, 대구, 마산 방면으로 압박을 가하면서 최종목표인 부산을 향해 총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국군은 미국을 비롯한 16개 참전국의 지원을 받아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항전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때 마산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북한군은 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거제도를 통해 마산, 진해, 부산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8월 15일 북한군 7사단 예하 증강된 1개대대 650명을 투입하여 거의 무방비상태에 있던 통영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대한민국 경찰 병력의 소규모 저항을 무력화 시킨 뒤 공격 개시 이틀만인 8월 17일 새벽 1시경에 통영 시가지를 완전 점령한 상태였다.

작전의 진행[편집 | 원본 편집]

통영이 점령 위기에 놓이게 되면서 8월 16일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제독은 마산 진동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해병대 김성은 부대로 하여금 거제도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거제도 진출을 좌절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김성은 부대장은 현지 상황을 파악한 뒤 몇백명 되지 않는 인원으로 거제도를 방어하는 것 보다 통영으로 직접 상륙하여 적을 격멸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해군본부(당시 해군통제부)의 승인을 얻어 8월 17일 해군 함정의 지원을 받아 통영항쪽을 포격하여 정면 상륙을 하는 것 처럼 기만하면서 본대는 통영 동북부 장평리에 기습적으로 상륙하였다. 상륙과 동시 삼봉산(246고지}을 점령한 김성은 부대는 8월 18일 새벽 총공격을 실시하여 전술적 요충지인 원문고개[1]와 망일봉(148고지)를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 차단과 증원병력 차단을 한 뒤 이어서 해군 함포 사격과 공군 항공기의 지원을 받아 8월 19일 새벽에는 어황산(178고지)을 점령한 후 해군본부로부터 탄약과 1개 중대의 증원군을 지원받은 뒤 총공격을 감행, 오전 10시에는 통영 시가지를 완전 탈환하게 된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통영 시가지가 국군에 의해 탈환되자 북한군 패잔병 200여명은 어둠을 틈타 어선을 탈취, 고성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한 달에 걸쳐 북한군은 아홉차례에 걸쳐 원문고개 방면으로 정면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번번히 격퇴당했으며 이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완전히 패주하게 된다.

이 작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는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이라는 전과를 올렸으며, 전사자는 불과 19명에 불과한 거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단독으로 시행한 상륙작전이자 공격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의 측후방의 위협 제거 및 해군 기지가 있는 진해항과 인근 마산항의 제해권 장악 및 해군의 기동로를 확보하는 의의를 가지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까지 안정된 해상 기동로를 확보하게 된다.

각주

  1. 통영반도로 들어오는 지협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 개통 이전에는 통영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교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