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해선

토해선(土海線)은 황해도 해주시 일대와 경의선 토성역(현재의 개풍역)을 연결하는 협궤 철도이다. 현재는 폐선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토해선은 조선철도 주식회사에 의해 건설된 762mm 협궤노선으로, 황해도 일대의 협궤철도망인 황해선을 경기도와 연결하기 위해 경의선 개성 인근에서 접속시키는 노선이다. 주로 황해도 일대의 농산물 반출, 그리고 일제당시 이름을 알렸던 배천온천의 접속편 등으로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삼팔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남쪽에 대부분의 구간이 위치해 있어서 삼팔선에 가장 인접한 청단역까지 운행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어느 쪽에서도 노선을 승계하지 않아 폐지되어 단 5년도 못채워서 없어진 한국철도의 첫 노선이 되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일제강점기[편집 | 원본 편집]

토해선의 건설은 조선철도 주식회사에 의해서였다.1929년에 황해도 해주와 경기도 북부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계획되었다. 접속역은 경의선의 토성역이 선정되었으며 이를 위해 예성강에 철교를 가설하는 것을 건설의 주된 골자로 하였다. 사업은 1929년에 면허 부여로 시작되었으나 예성강철교가 상당한 난공사였기에 황해도측 구간을 우선 개통하고 이후 철교가 완공된 1931년에 이루어졌다.

이후 황해도의 농산물, 주로 쌀을 반출하는 철도로 활용되었다. 이후 경의선 복선화에 따라 한차례 환승, 환적이 필요한 토해선의 개성역까지의 인입과 광궤 개축을 개성상의에서 요구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전시체제로의 이행으로 인하여 이런 요구는 이행되지 못하였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전황악화에 따라 전략물자 확보가 중시되면서, 토해선을 포함한 황해선도 육운통제령에 의해서 수송조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1944년에는 황해도 일대 철광석 수송의 일원화를 기하기 위하여 총독부 당국에 의한 전시매수가 단행되어, 토해선을 포함한 황해선 전체가 국철에 편입되었다.[2]

해방 이후[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이후 토해선은 황폐화된 상태로 상당기간 운행중단이 되었으나, 45년 12월 경에는 복원이 완료되어 운행이 재개되었다[3]. 이후 격일간의 운행이 이루어지다, 점차 운행을 횟수를 늘려 1948년 시점에서는 하루 2왕복의 운행을 실시하였다.[4]

토해선은 분단으로 교통망이 단절된 이후 황해도 방면 남북간의 교통 첨단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이용객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한이나 북한이나 철도의 운행에 민감했었으며, 1949년에는 예성강 철교를 북한측이 점거하여 국지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5] 이런 이유로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토해선은 꾸준히 운행되었다.

토해선의 명줄을 끊은 것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경의선 축을 따라 급거 남하한 북한군의 진격으로 인해 접속역인 토성역이 점거당하고 개성 일대가 함락되면서 토해선은 사실상 적 점령하에 떨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운행이 중지되었다. 전황이 바뀌어 이후 북진하면서 일시적으로 토해선을 복구, 해주까지 운행을 재개하기도 하였으나[6], 그러나 이후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후퇴하면서 토해선 역시 운영이 중지되었다. 이후 북한 지역에 남겨지면서 더 이상 대한민국 교통부의 관할로 남겨지지는 않게 되었다.

연혁[편집 | 원본 편집]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예성강철교는 당시로서는 협궤교량으로서는 대규모 트러스 교량으로 건설되었으며, 총연장은 623미터로 개업당시에는 주요 교량으로 손꼽히는 교량이었다. 또한 당시 철교로서는 드물게도 좌우에 인도교를 설치하여 도로와 공용하는 교량으로 건설되었다. 때문에 해방 이후 북한측에서 황해도 남단의 남한관할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 교량의 파괴를 기도한 국지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 토해선은 1944년 시점에 이미 총독부 철도국에 인수되었기 때문에, 해방후 조선철도의 통일 군정명령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각주

  1. '개성철원간 철도부설과 토해선 기점 문제'. 조선일보, 1939년 9월 22일 보도.
  2. 센코카이(2020). "조선교통사", 제4권. pp.172.
  3. '철훼했던 철로 9지선 복구 38이남의 교통망 완비'. 동아일보, 1945년 12월 26일 보도.
  4. '토해선 다이야 증발 1일부터 2왕복'. 경향신문, 1948년 10월 6일 보도.
  5. '적전시 30개 발견 배천읍민 속속 피난중'. 경향신문, 1949년 5월 21일 보도.
  6. '철마 92%복구 전선 개통은 내 15일경'. 동아일보, 1950년 11월 3일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