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시 4세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폴란드어: Kazimierz IV Jagiellończyk, 1427년 11월 30일~1492년 6월 7일)는 폴란드 왕국의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이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네 번째 아내에게서 셋째 아들로 출생했고 꼭두각시로 써먹히기 위해 옹립당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공고히 하고 뛰어난 내치로 내정을 다졌으며 동유럽에서 깡패질이나 하던 튜튼 기사단을 복속시킨 명군.

행적[편집 | 원본 편집]

어린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네 번째 아내의 셋째 아들이란 입지 때문인지 별다른 교육도,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는 상당히 안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즉위하자 법적 상속인으로 지명된다. 사실 말이 좋아야 상속자지 아들이 태어나기만 하면 다시 쩌리가 될 운명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편집 | 원본 편집]

그런데 때마침 리투아니아 대공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3세의 명으로 총독으로 파견된다. 그런데 써먹기 편한 꼭두각시를 원한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강제로 그를 대공으로 임명시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이렇게 어쩌다보니 대공이 된 카지미에시 4세는 나름대로의 통치를 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

즉위[편집 | 원본 편집]

형인 브와디스와프 3세가 자식도 남기지 못한 채 바르나 전투에서 어이없게 전사해버려 1447년 폴란드 왕위도 얻게 된다(...) 어찌 되었든 왕위에 즉위한 카지미에시는 그동안 숨기던 송곳을 드러내며 권력을 강화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1454년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애 엘리자베트와 결혼한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와 결혼 생활 중 무려 13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는다. 이 또한 그의 정통성과 권력을 강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튜튼 기사단을 복속시키다[편집 | 원본 편집]

그리고 결혼식이 이뤄진 1454년 카지미에시 4세는 프로이센 내의 반 튜튼 기사단 세력과 동맹을 맺고 튜튼 기사단을 공격해 단치히를 포함한 서부 영토를 모조리 얻는데에 성공하고 남은 기사단도 보호국 식으로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1492년 현 벨라루스 지역의 어느 성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그 시체는 크라쿠프의 대성당에 안치된다.

대중문화 속의 카지미에시 4세[편집 | 원본 편집]

관련 문서[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