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마르 알 카다피

(카다피에서 넘어옴)

무아마르 알 카다피(아랍어: معمر محمد أبو منيار القذافي)는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카다피는 1942년 6월 7일 리비아 중부 해안도시 시르테 인근 유목 베두인족의 일파인 가난한 카다파 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참고로 모친이 이스라엘계(카다피 할머니가 이스라엘인)였다고 한다.

그가 10살 때인 1952년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이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

1963년 벵가지리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벵가지 소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왕정 타도를 위해 동료 생도들과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그는 1965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동안 영국으로 파견 근무를 나갔다 귀국해 진급에 진급을 거듭했다.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 중 동료 장교들과 함께 친(親)서방 성향의 왕정을 무혈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리비아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1]

그러면서 그는 1974년 정치이론 연구에 몰두해 '그린북'(The Green Book) [2]을 창시하고 1977년에는 사회주의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면서 42년간 전제 권력을 강화했다. 카다피는 이집트의 친이스라엘 장책에 반발하여 국기 까지도 바꿨다.

물론 그는 집권 초기엔 경제 발전과 군사력 증강을 위해 애썼다. 그래서 이집트·시리아와 함께 아랍공화국연방 창설을 시도했다. 실제로 그는 리비아 대수로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반서방 성향이 있어서 미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이탈리아인·프랑스인 등을 추방하고 외국 자본, 외국 석유회사, 도로·항만·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국유화 혹은 국영화했다.

이로 인해 19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발사건으로 미 병사가 사망하자 당시 로널드 레이건(1911~2004) 미 대통령은 리비아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해 트리폴리벵가지 공습에 나섰다. [3]

1988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미 팬암 여객기가 폭파돼 탑승자 259명 전원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1년 미국·영국은 리비아의 정보요원이 팬암기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유엔은 리비아 제재에 나섰다.

게다가 여성 경호원 간 성폭력 문제로 문제가 되었다. [4]

결국 2011년 2월 중동·북아프리카 민주화 시위로 약 8개월 만에 고향 시르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각주

  1. 이로 인해 당시 집권한 국왕은 망명 갔다.
  2. 엄격한 이슬람 율법, 금주, 독자적인 직접민주제가 ‘그린북’의 요체다
  3. 이 때 '중동의 미친 개'라는 별명이 생겼다.
  4. "카다피, 여성 경호요원들 성폭행", 연합뉴스, 2011. 0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