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게임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세븐에 묘사된 치킨 레이스 (45초 부터)
이판사판, 너 죽고 나 죽자

유례[편집 | 원본 편집]

1950년미국 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게임으로, 영어권에서 겁쟁이를 (chicken)에 비유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치킨 게임이 유행하기도 했다. 게임 법칙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비범한데, 일정 거리를 두고 2대의 차량(A와 B)이 마주보고 달려오다 마지막 순간의 결정에 따라 게임의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결과[편집 | 원본 편집]

A와 B 모두 회피
게임의 승패가 가려지지 않는다. 둘 다 목숨은 구하겠지만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될 수 없으므로 게임을 하나마나한 상황이 된다. 또한 회피를 한 A와 B 모두 겁쟁이가 되어 주변의 조롱을 받는다.
A와 B 둘 중 하나가 회피
승자는 용감하게 직진을 선택한 사람이고, 패자는 겁먹고 회피한 사람이 된다. 승자는 용자 취급을 당하며 주변의 추앙을 받지만, 패자는 겁쟁이 취급을 당하며 패자 자신의 자존심 붕괴는 물론이고 주변의 철저한 냉소를 감내해야만 한다.
A와 B 모두 직진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다. A와 B 모두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며, 게임의 승자는 없다.

게임 이론[편집 | 원본 편집]

게임 이론에서 치킨 게임은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둘 다 파국을 맞는다는 극단적인 이론이다. 만약 상대방이 물러서는 상황이면 승자는 모든 이득을 취함과 동시에 상대방을 철저하게 매장시켜버릴 수 있지만, 치킨 게임 양상이 벌어지는 상황 자체가 양쪽의 극단적인 의견대립으로 양보나 타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양측이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사례[편집 | 원본 편집]

냉전
전 세계를 멸망시킬수 있는 수준의 대량의 핵무기를 보유한 미국소련이 벌였던 군비경쟁을 치킨 게임에 비유하기도 한다. 즉 누군가 먼저 핵을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상대방도 핵을 사용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둘 다 패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상대방을 아예 확실하게 지워버리기 위하여 두 나라는 엄청난 국방비를 지출하면서 핵무기를 비롯한 엄청난 군비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모순을 견디지 못한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 치킨 게임의 승자는 미국이 되었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선거
1987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치킨 게임 양상이 벌어졌다.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여 오랜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하던 민주화 운동의 쌍두마차인 김영삼김대중은 모두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결심했다. 원래 두 사람은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대선 후보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예고되었다. 후보 단일화를 놓고 한치의 양보 없이 치킨 게임을 벌이던 두 사람은 결국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며 독자적으로 대선에 나서게 되면서 파국을 맞이한다. 결국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민주화 진영의 분열을 야기하며 표가 갈리게 되었고[1], 결국 노태우가 어부지리격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무리한 가격 경쟁
예를 들어 A라는 PC방의 업주가 시간당 1,000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옆건물에 새로운 PC방 B가 개업했다. A와 B는 타협을 통해 서로 시간당 1,000원의 요금을 받기로 했으나, B는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시간당 700원으로 가격을 내린다. 이에 반발한 A도 B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시간당 500원의 출혈경쟁을 시작한다. 결국 B역시 시간당 500원으로 맞불을 놓는다. 하지만 PC방 사업에서 시간당 500원은 본전도 못뽑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A와 B는 누군가가 자본금이 바닥나서 장사를 접기 전까지는 쉽게 요금을 정상적으로 돌리지 못한다. 결국 한계점을 맞이한 B가 PC방을 접었다고 한다면, A는 B의 손님들을 끌어모을 수 있겠지만 출혈경쟁을 한 기간동안의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며, 결정적으로 가격이 내려 싼맛에 찾던 손님들이 대부분이라서 쉽사리 요금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결국 버티다못한 A도 PC방을 접으면서 결과적으로 A와 B 모두 폐업한게 된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당시 김염삼과 김대중은 각각 600만표 수준의 득표율을 보였고, 노태우는 800만표의 득표율을 얻었다. 이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기록을 남겼다. 만약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가 단일화를 이뤘다면 선거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