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산 회맹

개요[편집 | 원본 편집]

665년 8월(음력, 이하 생략) 신라 문무왕백제 부여융이 오늘날 공주 취리산(就利山)에서 맺은 맹약.

배경[편집 | 원본 편집]

660년 7월 나당동맹군에게 백제가 멸망당한 후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에 오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고 중심이 되는 웅진도독부에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도독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왕문도가 부임하자마자 병사하고 백제인들도 크게 저항하여 지방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자 이를 웅진도독부로 개편하고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실상 당나라의 괴뢰 정권을 세운 것으로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이면서 한때 태자였던 인물이기에 정통성을 갖추었고 백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친당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라는 당나라가 백제를 직접 통치하려는 의도를 꿰뚫어 보았지만 고구려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와신상담할 수밖에 없었다.

663년 백제부흥운동이 낭패로 끝나고 당나라는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명백히 당나라가 백제와 더불어 신라도 제 손아귀에 넣겠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외교관 두상(杜爽)으로 하여금 백제와 신라가 회맹을 맺도록 압박하였다. 신라는 백제부흥군 잔탕을 소탕하여야 한다는 사유로 거절하였으나 끝내 665년 8월 회맹을 맺는다.

경과[편집 | 원본 편집]

가을 팔월에 임금이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었다. 일찍이 백제는 부여장 때부터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우리 강역을 자주 침범하였으므로, 우리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구원을 청하는 길이 연달아 이어졌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고 군대를 돌이키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 임금이 진수사(鎭守使) 유인원(劉仁願), 유인궤(劉仁軌) 등과 함께 여러 해 동안 다스려서 점차 안정되니 고종께서 부여융에게 조칙을 내려 신라로 오도록 하여 잔당들을 무마하고 우리와 화친하라고 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흰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먼저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강과 계곡의 신에게 제사지낸 뒤 그 피를 마셨다. 맹세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은 거스를 것과 따를 것을 분간하지 못하여 이웃나라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였고 인척간에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악한 행동을 일삼아 신라를 침략하여 고을을 약탈하고 성을 도륙하여 거의 편안한 날이 없었다. 천자께서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무고한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였다.

백제는 지리가 험준하고 길이 먼 것을 믿고서 천경(天經)을 업신여겼으므로 황제께서 노하시어 삼가 죄를 묻고 정벌을 단행하였으니 군사들의 깃발이 나가는 곳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평정되었다. 그러한즉 마땅히 궁전을 늪으로 만들고 집터를 연못으로 만들어 후세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겨야 하였다. 하지만 유순한 자는 받아들이고 배반하는 자를 정벌하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도이고 망국을 다시 일으키고 끊긴 대를 잇게 하는 것은 고성(古聖)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이 오랜 서적에도 전하는 바이다. 이에 따라 전 백제 대사가정경(大司稼正卿)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조상의 무덤이 있는 땅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고 기대어 길이 우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각기 지난날의 묵은 감정을 풀고 화친하며 조서를 받들어 영원히 번방(藩邦)으로써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신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노성현공(魯城縣公) 유인원을 보내 친히 권유하고 성지(成旨)를 자세히 선포하노라.

양국은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세로 거듭났으며 희생(犧牲)을 잡아 입술에 피를 바르고서, 언제나 함께 화목하여 재난을 서로 나누고,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 도와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이다. 황제의 말씀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맹세를 한 뒤에는 모두 함께 지조를 지켜야 하리라. 만약 맹세를 어기고 뜻을 달리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살펴보시고 온갖 재앙을 내리셔서, 자손을 기르지 못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며 제사가 끊어지고 남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금서철권(金書鐵券)을 만들어 종묘(宗廟)에 간직하여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감히 어기지 않게 할지어다. 신령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흠향하여 복을 내려 주소서.'

이 글은 유인궤가 지었다. 피를 마시고 제단의 북쪽 땅에 희생과 폐백을 묻고 우리 종묘에 문서를 보관하였다. 이어서 유인궤는 우리의 사신과 백제, 탐라, 왜 등 네 나라 사신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泰山)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秋八月 王與勅使劉仁願熊津都督扶餘隆盟于熊津就利山 初 百濟自扶餘璋與高句麗連和 屢侵伐封場 我遣使入朝求救 相望于路 及蘇定方旣平百濟軍廻 餘衆又叛 王與鎭守使劉仁願劉仁軌等 經略數年 漸平之 高宗詔 扶餘隆歸 撫餘衆及令與我和好 至是 刑白馬而盟 先祀神祇及川谷之神 而後歃血 其盟文曰 往者 百濟先王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託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剽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無辜 頻命行人 遣其和好 負嶮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潴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然懷柔伐叛 前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大司稼正卿扶餘隆 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各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寔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弟兄 祗奉綸言 不敢失墜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背盟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明神監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守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券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敢違犯 神之聽之 是饗是福 劉仁軌之辭也 歃訖 埋牲幣於壇之壬地 藏其書於我之宗廟 於是 仁軌領我使者及百濟耽羅倭人四國使 浮海西還 以會祠泰山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취리산에 모인 문무왕와 제신(諸臣), 부여풍과 유인원 측은 중국 고대의 방식을 따라 제단을 쌓고 흰말을 죽여 천지산천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마시고 맹세하였다. 맹세문은 유인궤가 지었으며 내용은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인궤와 그 무리가 귀국하자 부여융은 이 상황을 언짢게 여기는 신라를 두려워하였고 곧 자신도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668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0년부터 나당전쟁이 시작되자 자연스레 파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