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 (18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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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浚. 대한민국독립운동가, 기업인,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 가문의 12대 가주였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7월 27일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번지에서 진사 최현식과 풍산 류씨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내윤(乃允)이며, 호는 문파(汶玻)이다. 그의 집안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 중 가암파로, 최치원의 28대손이며, 임진왜란 때 원종공신에 봉해진 정무공 최진립의 11대손이다. 본래 내남명 이조리에 세거하다가 증조부 최세린 때 경주향교 앞 교동으로 이거하였다. 최준은 1898년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에 거주하는 운재 김병황의 손자이자 김정섭의 딸인 김석윤과 결혼하였다.

최준은 일찍이 족속인 최현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최현필은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으나 1895년 갑오개혁이 진행 중일 때 사직하고 귀향하여 김정섭, 조승기, 최익현 등 위정척사파 인사들과 교류했다. 또한 《신장군실기》에 따르면, 신돌석이 경주의 '최부잣집'에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준에게 강한 영향을 준 이는 사촌 매형이자 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위원인 김응섭이었다. 최준은 이들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04년 부친 최현식으로부터 경주 교촌 '최부잣집'의 가산을 물려받은 그는 경주와 서울을 왕래하며 영남 인사들과 교유 관계를 넓혀갔다. 1908년 3월 설립된 교남교육회에 박상진, 김응섭의 소개로 가입하였고, 1908년 11월 숙부 최현교와 함께 대한협회 경주지회를 설립했다. 그는 경주지회 간사원을 맡아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권영택이 설립한 경주흥업의 중역으로 참여하여 경제 활동을 시작했다.

1909년 10월 안희제 등이 교남교육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최준이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아우 최완이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그는 안희제가 독립운동의 정보 연락과 군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설립한 백산무역의 단속역 사장 및 지배인을 맡았다. 또한 1915년 1월 15일 박상진, 김응섭, 남형우 등이 결성한 조선국권회복단에 단원으로 참여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만주 독립군의 양성, 그리고 영남 유림의 파리 장서 사건을 지원했다.

그는 지배인으로 있던 백산상회와 서상일이 운영하던 태궁상점을 이용하여 대대로 물려받은 가산 상당수를 독립운동자금으로 기부했다. 한편 1915년 7월 15일 박상진이 광복회를 결성할 때, 최준은 김재열, 정운일, 이시영, 홍주일 등과 함께 참여하여 재무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1913년 7월부터 대구은행의 발기인을 맡았고 1917년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의 주주로 참여했으며, 1919년에는 개편된 백산무역의 취체역 사장 및 지배인을 역임했다.

최준은 1915년 11월 17일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하여 8천 7백원을 탈취하는 데 관여했다. 그는 우편마차가 경주 관정리를 지난다는 걸 알려줬고, 우재룡, 권영만 등이 매복하고 있다가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탈취했다. 이들은 탈취한 자금을 가지고 박상진의 집으로 귀환하였고, 최준이 자금을 맡아 관리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 대동단이 전협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이승만과 모의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 할 때, 그는 전협이 미국으로 가기 위한 여비를 조달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리의 행동을 찬조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송부해 달라."는 공한을 허형에게 맡겨서 최준에게 전달하게 했다. 허형이 9월 8일 편지를 휴대하고 경주로 내려갔지만, 최준은 부재중이어서 동생 최순에게 전해졌다. 또한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경주군 대표로 서명했으며, 백산상회의 주주이며 대동청년단의 단원인 아우 최완에게 2만 원의 현금을 맡겨 임시정부로 파견했다.[1]

그러나 광복회가 일제 형사들에게 발각되고 일제는 그이를 회유하려 하거나 협박하였다. 1920년 9월 총사령 박상진 등 광복회 핵심 임원 5명이 사형을 언도받았고, 최준은 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면소 처리되었다. 1920년 12월 10일 실시된 도평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기 경상북도 도평의원이 되었다. 이후 식산은행장 아리가 미쓰토요(有賀光豊)에게서 중추원 참의에 임명하겠다는 총독부의 의사를 전달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아우 최윤은 1927년, 1930년, 1933년 경상북도 도의원을 거쳐 1936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식민통치의 하부기구에 참여했다.

최준은 경제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1919년 1월 주식회사 백산무역의 취체역 겸 사장이 된 걸 시작으로, 계림무역, 대동무역, 경북산업, 고려요업, 경주상공회의소, 경주산업조합 등의 회사를 직접 설립하거나 핵심 주주로 참여했다. 또 경남은행, 대구은행, 경성제약은행, 경일은행, 해동은행 등의 이사 및 대주주를 역임했다. 그는 백산무역의 사장을 맡으며 경영 전반을 총괄했으며, 아우 최완과 최순이 잇달아 이사를 맡아 그를 보좌했다.

최준은 회사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장부상 거래의 형식을 취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송달했다. 즉, 중국 등과 무역하기 위해 상하이를 오가면서 자금 일부를 장부상에서 의도적으로 빼돌려 독립자금으로 송부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빼돌린 자금 총액은 백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21년 8월 백산무역이 경영난을 겪자, 최준은 업무를 정리하는 한편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담보로 맡기고 식산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았다.[2]

1921년 9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산업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조선산업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 위원회에 조선인의 요구를 반영시키기 위해 조선인산업대회를 발기하여 서상일, 이영국, 한일동, 이우진, 김홍조, 편동현 등과 함께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7년 10월 16일 민중생활 개선을 통한 경제의 발달을 표방하여 창립한 경제연구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최준은 교육, 언론, 민족 문화 등의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1919년 10월 김성수가 설립한 경성방직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20년 1월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 1922년 중앙학교 재단이사와 보성학교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한편 1920년 경주청년회에 운동장 부지 2천평을 기부하였고, 1930년 경주의 지리서인 '동경통지'의 편찬을 지원하였으며, 경주고적보존회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5년 7월 31일 백산무역 제6차 정기총회에서, 주주와 중역들이 장부조사를 실시하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그해 9월 12일 감사역 문영빈이 취체역 최준, 최순, 안희제, 윤병호, 최태욱을 '사기횡령죄' 혐의로 부산지방법원에 고소했다. 이 일로 최준은 1925년 10월 사장 및 지배인에서 물러났고, 조선식산은행에 근무하던 일본인 진우여길이 신임 지배인을 맡았다.

이후 백산무역은 내홍을 겪다 1928년 1월 29일 파산했고, 최준은 부채 130만원을 떠안았다. 이에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조선식산은행장 아리가 미쓰토요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아리가는 부채를 맡아주는 대신 최준이 소유하던 전답과 가구를 압류하였다. 아울러 그가 소유한 부동산 권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하는 '부동산관리신탁계약서'를 체결시켰다. 이로 인해 최준은 8·15 광복 때까지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총독부의 감시 및 통제를 받았다.

1928년 4월 최준은 박상진의 양부 박시룡으로부터 토지매입에 대한 불복 신청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박상진은 1921년 곡물상 상덕태상회와 포목상 내외물산을 설립하면서, 삼정물산에 토지 등을 근저당했다. 그러나 포목상 경영에 실패하면서 삼정물산에 근저당한 토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최준이 재산처리 문제를 맡았다. 그런데 1921년 8월 11일 박상진이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뒤, 최준은 박상진이 삼정물산에 근저당했던 토지를 매수했다. 이에 대해 박시룡이 1928년 4월 불복을 신청한 것이다.

박상진의 재산관리를 맡았던 최준이 합법적으로 인수한 것인지, 아니면 백산무역의 폐업 등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했던 최준이 가로챈 것인지는 기록이 확실치 않아 현재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독립운동 행적이 저평가되기도 했고, 막대한 재산이 손실되자 더이상 독립운동자금을 대지 않으려 했다가 안희제 또는 박상진이 강도로 위장하여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자금을 내놓았다는 등 부정적인 야사가 나돌기도 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8.15 광복 후, 최준은 일제의 신탁 관리 하에 있던 재산의 1/3을 돌려받았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교육 산업에 전념했다. 1947년 영남 주요 인사들과 함께 민립 대구대학을 설립하고 대표 설립자가 되었으며, 6·25 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경주로 피난 온 교사 및 학생들을 모아 1952년 계림학숙을 새웠다. 종전 후 계림학숙을 대구대학과 통합시킨 뒤, 집안의 남은 모든 재산과 집, 선산, 심지어 경주 교동의 친척 일가의 집까지 전부 대구대학 재단에 기부했다.

이루 대구대학 이사장을 맡아 경영에 관여하다 1964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대구대학 이사를 맡았다. 1967년 12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삼성 그룹이 당시 박정희 정권이 대학운영권을 뒤고 있던 청구대와 대구대를 통합시켜 영남대를 출범하는데 협조하라는 압력에 굴복하자, 이에 격렬히 반발했으나 끝내 막지 못하고, 집안 재산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통째로 영남대에게 넘어가는 걸 지켜봐야 했다.

1970년 10월 13일 경주에서 사망했다. 사후 1983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각주

  1. 1919년 5월 13일 일본 외무성 기밀문서에 "경상북도 경주 부호 최준의 남동생인 최완이 현금 2만 원을 소지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2. 1972년 최부자 고택 사랑채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1922년 작성된 '근저당권설정계약서'에 따르면, 최준이 식산은행에게 저당잡힌 부동산은 경주와 울산의 논과 밭 785필지(220만 제곱미터)에 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