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형

최익형.jpg

崔益馨.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1월 25일 황해도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등이 신민회를 창립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1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지만 1911년 9월 4일 경성공소원에서 공소 기각되어[2] 5년간 복역하다 가석방되었다.

1921년 처남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적십자사장인 안정근으로부터 임시정부 자금 모집을 의뢰받고 나태섭 등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해 일부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냈다. 그러나 1921년 8월에 또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4년 비밀리에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임시정부로부터 김구의 가족을 상하이로 보내라는 의뢰를 받고 귀국하여 안악군에 거주하던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아들들을 김선량(金善亮)으로 하여금 호송하도록 자금을 제공했다.

이후 교육사업에 종사하면서 청년들에게 일제에 의한 고문담을 서슴없이 들려주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서울을 방문한 재중 청년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줬다. 이로 인해 조선 총독부로부터 탄압받자 1940년경 황해도 장연으로 옮겨 본당에서 회장으로 일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신자이며 지주라는 이유로 북한 정부로부터 탄압받자 1948년 백령도를 거쳐 황해도 웅진으로 월남,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웅진중학교에서 근무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웅진에서 체류했다. 이때 국군 수명을 은신시켜 주었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1950년 10월 15일 웅진탄광으로 끌려가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익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