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이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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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붕(崔以鵬, 1897년 11월 6일~1973년 7월 13일)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최봉설(崔鳳卨), 이명은 최계립(崔溪立), 최웅렬(崔雄烈), 최일륜(崔一崙), 호는 이붕(以鵬).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7년 11월 6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연길현 지인향 와룡동으로 이주했다. 그는 창동학교를 다녔고, 1916년 하규(金河奎)의 딸인 김신희(金信姬)와 결혼했다. 1919년 이동휘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 할 때 모금위원으로 활동했고, 3월 13일 용정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대한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에 참여했으며,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 박웅세, 김준(金俊) 등이 결성한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담했다.

이후 서성권(徐成權)ㆍ김정(金精)ㆍ강백규강상모김강과 함께 청년회(靑年會)를 조직하여 일제기관 및 일본회사 등에 취직한 교포들에게 동맹 사직하고 항일운동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러던 1919년 9월 간도 와룡동에 소재한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을 방법을 논의했다. 이때 김하석이 조선은행 화령지점에서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시 송금하고 있다며, 이를 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철혈애국단원 동지들과 함께 송금하는 일시를 알아낸 뒤 이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충당하기로 결의하고, 조선은행 회령 지점원인 전홍섭을 포섭하여 동지로 가입시키고 박웅세, 김준(金俊) 등을 새 동지로 포섭했다.

1920년 1월 4일 임국정ㆍ윤국회ㆍ김준(金俊)ㆍ한상호ㆍ박웅세(朴雄世) 등과 함께 권총과 철봉 등으로 무장하고 수송차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1명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사살하고 현금 15만원을 탈취하여 노령 해삼위(海蔘威)로 가서 체코제 무기를 다수 구입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제공하였다. 1920년 12월 밀정 엄인섭[1]의 밀고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탈주에 성공했다.

그 후 국내에 잠입해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을 구출하려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해주로 돌아간 그는 1921년 가을 연해주 이만에서 적기단(赤旗團) 창단에 가담해 단장 겸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삼차구ㆍ밀산ㆍ영안ㆍ액목ㆍ장백ㆍ돈화ㆍ연길ㆍ호림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군사행동을 위하여 단원의 무장을 촉진하였으며,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의 선전사업에 주력하였다. 1925년에 적기단이 해체되자 러시아로 돌아가 연해주 추풍지역에 있는 그라데고보에서 안드레이예브카 콜호스 회장으로 일하였다. 1926년 4월 30일 단장 이하 최고간부들의 협의에 따라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앙아시아우즈베크공화국의 호레즌 갈대밭으로 이주당했고, 그곳에서 콜호스 회장으로 일했다. 1959년 정월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출간했으며, 1973년 7월 13일 우즈베키스탄 침켄트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이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95년 10월 14일 그를 비롯하여 계봉우, 강연상, 강상진의 묘소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되었다.[2]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일제 정보기록에는 단지 '우리 밀정'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엄인섭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황상으로 볼때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던 그가 밀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2.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199510140093605694 애국선열 4위 묘소 찾았다. 계봉우ㆍ최이붕ㆍ강연상ㆍ강상진 선생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