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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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允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8년 3월 24일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3월 29일경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에서 이무종(李武鐘)에게 "지금 각지에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이 개시되고 있으니, 울산군에서도 4월 2일 언양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다수 인을 선동하여 운동하자"는 제의를 받고 이규인(李圭寅)·이성영(李成榮) 등과 함께 찬동하여, 극비리에 태극기 42개를 제작하고 거사 당일인 4월 2일 예정대로 언양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거행했다. 그는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1천여 명의 군중이 함께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으며, 시위를 탄압하는 일경에게 돌을 던졌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헀지만, 1919년 5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1] 이후 중국 봉천으로 망명갔다가 안동현으로 이주하였으나, 1934년 7월 14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윤봉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 1일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최윤봉의 아들 최경식 옹은 "매년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는데, 씁쓸한 마음은 해가 갈수록 커집니다. '국경일이 아니라 그저 공휴일이 됐구나'하는 생각 때문입니다."라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1시간짜리 기념식이 끝나면 광복절의 의미를 생각해 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부 후손만 모여서 그 의미가 퇴색될까 봐 전전긍긍하죠. 고층 아파트만 봐도 내걸린 태극기를 찾아보기 어려워졌어요."라면서, 사람들이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새겼으면 좋겠다고 밝혔다.[2]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