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潤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1년 6월 26일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 주운리에서 출생했다. 1928년 삼척청년동맹에 가입한 뒤 1930년 6월 삼화리 지부 간부로 활동하며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4월부터 1년간 북삼면 함화리 소재 명화학원의 교사로 종사하며 계몽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 9월 박래빈(朴來賓)·최춘희(崔春熙) 등과 함께 비밀결사 북삼농민조합조직위원회를 결성하고 여운리 책임을 맡았으며, 1933년 10월 초순에는 최대희(崔大熙) 등과 함께 농민운동을 통한 민족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여운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중앙부 및 교양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아울러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공산단체인 K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10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3년 11월 1일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박래빈 등 3명과 함께 금광사무소를 습격하여 금괴 283돈과 현금 63원을 탈취했다. 이로 인해 1934년 6월 일경에 체포되었고, 1935년 10월 31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37년경 또다시 체포되어 1937년 9월 30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재정 통산 100일)을 선고받았지만, 1938년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이유 있다는 판정을 받고 무죄 선고를 받았다.[1] 1970년 6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윤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