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무

崔文武.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9년생이며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이다. 그는 1917년경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0년 초반 왕청현 춘화향 봉오동에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에 들어갔다. 이후 1920년 3월 26일 대한북로독군부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서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남양면을 습격하고 동년 8월경 대한북로독군부 제1대장으로 무장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했다.

1920년 음력 11월 중에 무장한 3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본부를 출발하여 1922년 음 2월에 이르기까지 간도 각지로 돌아다니며 5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음 3월 상순경에는 재무원 최태여(崔泰汝)와 함께 70여 명의 무장한 부하를 거느리고 음 7월에 이르기까지 역시 간도지방으로 돌아다니며 수천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동년 음 9월 중에 일본 토벌대가 간도에 들어오자 노령(露領)으로 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23년 9월 중순경에 다시 간도로 나와 수십 명의 무장한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관헌의 경비 상태를 탐정하는 동시에 수천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25년에 체포되어 동년 2월 30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았다. 이후 만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2년경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최문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논란[편집 | 원본 편집]

독립유공자 최운산의 손녀이자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인 최성주 씨는 최문무는 최운산이 사용한 여러 가명 중 하나일 뿐인데 국가보훈처의 행정 미숙으로 똑같은 사람을 별개의 인물로 취급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최운산은 명길(明吉), 문무(文武), 만익(萬益), 풍(豊), 빈(斌), 고려(高麗), 복(福) 등 여러 이명(異名)을 갖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며 "최문무는 최운산의 다른 이름일 뿐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최씨는 "보훈처는 최문무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본인을 최문무라고 진술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며 "체포되었을 때 자신의 본명을 곧이곧대로 진술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따졌다.

2019년 6월 14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개최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제4회 학술세미나는 최운산과 최문무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국민대학교 교수 이계형은 "1977년 최운산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시 '최문무'라는 다른 이름을 뒤늦게나마 찾아내 밝혔는데, 30여 년이 지난 2008년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를 발굴한다는 취지로 이명동인에게 포상을 주는 사단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운산이 형 최진동 등의 주도로 도독부가 창설되었을 때 참여했으며, 모연대장으로 군자금을 모으는 데 참여했으며, 1925년에 체포되어 청진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선고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최운산에 대한 자료가 좀더 많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중국 당안자료 확보가 시급하다.


둘째, 봉오동 전투홍범도 중심에서 탈피해 최진동이나 최운산의 관점에서 살피는 연구가 필요하다. 봉오동 전투를 총지휘했던 것은 대한북로독군부 부장이었던 최진동이었다.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게 최운산이었다.

셋째, 최운산 집안에서 내려오는 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국독립운동연구소장 심철기는 최운산과 최문무가 동일인이라고 보기엔 의문점이 있다며 네 가지 사안을 제시했다.

첫째, 결국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했다기보다 유족의 신청서와 독립유공자의 확인서에 의해 포상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당시 5명의 독립유공자가 확인서를 작성했다는 것으로 볼 때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족의 신청서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최문무를 포상할 때 연변에 살고 있는 '최인순'이라는 사람을 최문무 후손으로 인정했다. 최인순의 아들 '유용운'이 중국 당안자료에서 기록을 확인하고 조카가 포상신청을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운산의 유족과 최문무 유족이 공적기록이 어떤 관계로 나타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셋째, 최문무와 최운산이 동일인이라고 생각되는 정황근거는 1925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1]이다. 또 족보상 최운산이 최태여와 가까웠다는 것도 근거로 제시되었는데, 이를 가지고 동일인이라는 증거로 제시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최운산은 1923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길림감옥에 투옥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1925년에 또다시 청진지방법원에 회부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넷째, 최운산과 최문무의 활동을 비교해 두 분이 동일인이라고 확인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론에서 얘기했듯이 최운산에 대한 자료, 특히 당안자료 중 어떤 종류의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지 여쭙고 싶다.

이렇듯 최운산과 최문무가 동일인물이라는 논란은 지속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1925년 3월 30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선고받은 최문무가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