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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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구 대월)의 3번째 장기 집권 왕조다. 중국의 체제를 본따 유교를 장려하였으며 1527년 막당중의 찬탈로 인한 멸망과 1789년 민제의 도주로 인한 멸망 두 사건을 기준으로 초여조, 중흥 여조로 나누어서 본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건국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초대 황제인 태조(太祖)가 제국을 선포한 시기는 1428이나 왕조의 역사는 14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418년은 대우 황제인 호계리-호한창 부자가 명나라의 침략에 패배하여 처형당해 베트남은 일시적으로 명에게 복속당했다. 황제로 즉위하기 전 여리는 자신을 평정왕(平定王)이라 칭왕하고 각 지방의 호걸들을 끌어모아 세력을 불리고 명에게서 항명전쟁을 펼친다.

여리군(軍)은 베트남 지리의 특징(습하고 길이 험한)을 이용해 자신들보다 숫자가 몇배나 많은 명군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결정적으로 1426년 10월 ~ 11월 사이(진줄동 - 축동 전투, 陣崒洞 – 祝洞)에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 세력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혀 당시 명 황제인 선덕제는 대월 복속을 포기한다. 이후 여리는 명에게 정식으로 안남국왕에 책봉되어 통치권을 얻고 자신이 세웠던 진가의 후예로 추정되는 진고(陳暠)를 시해한 후, 재건 대월의 남제(南帝)로 즉위한다.

초기(1428 ~ 1527)[편집 | 원본 편집]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국가 정보
初 黎家
국호 대월(大越)
영토
존속기간 1428년 ~ 1527년
성립 이전 중국의 4차 지배기
멸망 이후 막 왕조(북조)
중흥여조(남조)

1428 ~ 1527. 막당중에 의해 일시적으로 멸망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초대 남제 태조는 유교를 장려하여 유교화를 꾀했고 중국의 제도를 본따 과거를 시행했다. 또한 율령을 제정했고 균전법, 국군의 구성 방식을 새로 맞추었다.[1]

태조 사후에는 무신 세력의 득세와 권신 여찰의 만행으로 잠시 혼란기가 찾아왔다. 태조의 뒤를 이은 태종의 의문사가 이와 관련이 있는데, 태종은 청화 지방의 호족들의 영향권을 제한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태종은 은퇴한 개국공신 완채의 사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급사하였는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느나 태종의 정책으로 권한이 약해진 청화 호족들이 앙심을 품고 태종을 암살했을거라 추측하는 경향이 많다.

건강하던 황제가 급사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자 생후 2살도 되지 않은 태자 여방기(黎邦基, 인종)가 황위에 오르고 선자태후가 섭정하는 방식으로 조정이 구성되었다. 선자태후는 과거 제도를 수정하고 법률 14개조를 제정하였으며 참파를 쳐 참파왕 마하 비자야를 생포하는 치적을 보였다. 그러나 공신 여가(黎可)를 숙청하는 등 신하들과 거리감을 두는 정치적 행위를 벌였다.

이런 국정에서 여의민(黎宜民, 전폐제)[2]의 쿠데타라는 변수가 일어나자 어린 인종과 선자태후는 여의민의 쿠데타군에게 살해당하고 그들을 죽인 여의민이 황제로 등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등극한 여의민은 1년만에 폐위, 시해당했고 공석이 된 옥좌는 태종의 4남 여사성(黎思誠, 성종)이 신하들에게 추대받아 즉위한다.

소릉(昭陵)의 성세[편집 | 원본 편집]
  • 소릉은 성종의 무덤이다. 치세를 논할 땐, 묘호 대신 능호를 쓰는 경우도 있다.[3]

앞의 혼란기가 일어난 시기 대월은 어지럽혀져 있는 조정을 확고히 할 명군을 요구했다. 성종은 즉위 후 부왕의 행적을 따라 청화 세력을 배제하고 태조때 행해진 유교 정책을 다시 확대해 유교 이념을 확고히 하였다. 내정에선 6부를 만들었으며 전국의 교통을 증진시키기 위해 13도로 나누었고 중앙집권의 중요성을 인지해 토지, 호적 대장을 만들었다. 또한 이민족 문제도 해결해 그들을 여씨 대월 세력권 안에 포함시켰다.

성종 역시 중국의 법률을 본따 만든 흥덕형률(洪德刑律)을 만들어 반포했고 이외에도 성리학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현대 베트남의 제1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가 편찬된 시기도 성종 때이다. 그리고 참파와 라오스를 쳐서 메콩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히는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전성기도 여기까지였다. 성종의 죽음 이후 헌종과 숙종의 요절과 폭군들의 즉위로 인해 다시 대월은 성종의 즉위 이전처럼 혼란기에 빠진다.

무능한 황제들의 즉위와 멸망[편집 | 원본 편집]

뒤를 이어 즉위한 헌종과 숙종이 요절하였고 숙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숙종의 형 여준(黎濬)이 즉위하였다. 여준은 천성이 포악하고 무분별한 숙청을 시행하여 결국 여형(양익제)에게 폐위당했다. 그러나 양익제 역시 얼마 못가 폭정을 저질러 신하인 정유산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찐주이산은 다시 목의왕[4]의 아들인 여광치(黎光治, 중폐제)를 세웠으나 재위 3일만에 정유산의 형 정유대가 여광치를 납치해 시해하는 약 20년의 치세동안 3명의 황제가 폐위되는 혼란기가 벌어진다.

자신이 세운 2명의 황제들이 폐위되자 정유산은 성종의 증손자 여의(黎椅, 소종)을 세운다. 이 시기 대월은 진고(陳暠)[5]의 황제 참칭, 신하들의 권력다툼이 있었기에 이 시기의 대월도 명군을 요구했다. 하지만 소종은 무능하진 않았으나 성질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어 황제로썬 적합한 인물은 아니였다. 후술하지만 소종은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고 자신의 제위와 목숨마저 막당중에게 빼았겼다.

황제를 참칭한 진고의 반란은 진진(陳眞)과 완홍유(阮弘裕) 등이 진압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반란을 진압한 공신들인 진진과 완홍유가 권력싸움을 벌이고 권력싸움에 승리한 진진이 권신이 되버린다. 소종은 무언가를 직감하고 진진을 암살하여 찬탈의 가능성을 막았다. 그러나 진진의 잔당들이 여방과 여유를 옹립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피난하고 막당중과 완홍유에게 반란 진압을 명했고 이 반란 역시 막당중이 진압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막당중이 권신으로 득세했다. 득세한 막당중은 진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만함[6]을 보였고 이는 소종의 시기와 찬탈의 불안감을 안겨주게 했다. 소종은 막당중을 죽이기 위해 정수(鄭綏, 정유산과 정유대의 조카다.)와 연합해 정수의 거처로 이동했지만 그곳에서도 정수와 대립하여 막당중 토벌 계획을 세우지도 못한다. 결국 정수는 막당중에게 패배하여 처형당했고 소종 역시 탕롱으로 압송되어 1527년 시해당한다. 최소한 허수아비도 아니였고 황실을 살리기 위해 권신들을 견제하는 등 유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인간성으로 인해 패배했고 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꼴이였다.

소종의 죽음 이후 그의 동생인 여춘(공제)가 즉위했으나 막당중의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고 마침내 1527년 막당중의 강요와 압박으로 인한 양위로 초여조는 멸망하였다. 동시에 공제는 잠시동안 태상황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막당중에 의해 자진하였다.

역대 황제[편집 | 원본 편집]
왕명 재위
1. 태조(太祖) 1418 ~ 1428(평정왕)
1428 ~ 1433(황제)
여리
2. 태종(太宗) 1433 ~ 1442 여원룡
3. 인종(仁宗) 1442 ~ 1459 여방기
4. (묘호 없음) 전폐제(前廢帝) 1459 ~ 1460 여의민
5. 성종(聖宗) 1460 ~ 1497 여사성/여호
6. 헌종(憲宗) 1497 ~ 1504 여쟁
7. 숙종(肅宗) 1504 여순
8. (묘호 없음) 위목제 1504 ~ 1509 여준
9. (묘호 없음) 양익제 1509 ~ 1516 여형
10. (묘호 없음) 중폐제 1516 여광치
11. 소종(昭宗) 1516 ~ 1522 여의(黎椅)
12. (묘호 없음) 공황제(恭皇帝) 1522 ~ 1527 여춘
중흥여조(1527 ~ 1789)[편집 | 원본 편집]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국가 정보
中興 黎家
북조(北朝, 1527 ~ 1592)
국호 대월(大越)
영토
존속기간 1527년 ~ 1789년
성립 이전 초 여조
막 왕조
멸망 이후 떠이선 왕조

1527 ~ 1789. 일시적으로 계통이 끊어졌지만 곧 부흥군과 완감, 정검의 힘으로 다시 재건되었다. 1789년 마지막 황제인 민제가 도주하여 멸망하였다.

여의(黎意)의 부흥군 - 남조(南朝)[편집 | 원본 편집]
대월(1534년).jpg 1534년

막씨 대월(大越, 검은색)
황제: 막태종(莫太宗)

여씨 부흥군(黎氏, 갈색)
수장: 여의(黎意)

막당중이 즉위후 3년이 지나 양위한 1530년, 청화 지역에선 자칭 여씨의 후예인 여의(黎意)가 거병하고 소종의 연호로 개원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여의에게 후여조의 유신들이 붙었고 더이상 여의군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막당중은 거병 소식에 친정하여 여씨군과 대치했으나 패배하고 서도성 지점까지 세력권을 빼앗겼고 태종 역시 탕롱으로 피난했다. 대승을 거두고 재건을 코앞에 둔 여씨 세력이지만 수장 여의는 이때의 승리로 방심하여 막국정(莫國楨)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수장이 사로잡히고 부흥군의 일부가 전사하자 살아남은 완홍유의 양자 완감(阮淦)이 청화에서 소종의 아들 여녕(黎寧, 장종)을 황제로 옹립해 지도자가 없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방지했고 곧이어 완감의 사위 정검(鄭檢)도 장인을 도와 막씨 대월의 3대 황제인 막복해(莫福海)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던 중 장인이 위장항복한 양집일(楊執一)에게 독살당하자 정검은 장인의 자리를 계승하고 장종을 중심으로 1592년 막씨 대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막조의 황제인 막무흡(莫茂洽)을 사로잡아 참수시켜 왕조의 재건을 선포한다.

그러나 대월의 통일은 아주 잠시 동안이였고 여씨 황제들은 정씨들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였으며 나라는 둘로 쪼개지게 된다.

나라가 두 개로 갈라지다[편집 | 원본 편집]

앞서 정검이 장인의 세력을 계승하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방해거리가 되는 처남(완감의 아들) 완황(阮潢)을 남쪽으로 보낸다. 완황 역시 군사력의 열세로 정검을 이길 수 없을을 알고 그곳에서 부춘을 수도로 정한 후 세력을 키운다.

북쪽에는 여씨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한 정검이 조정을 장악, 주도했다. 정씨 일족은 사실상의 황제 노릇을 했고 황제가 암살을 꾀해 권력을 복고하려는 낌새를 보일시 황제에게 자결을 명했으며 강제 폐위 또는 옹립까지 하는 등 황실을 지배하였다. 약 250년동안 정씨 일족이 황실의 권신으로 군림했기에 이후 여씨 황제들은 말기를 제외하곤 별 치적이나 행적이 없다.

정검이 권력을 승계받아 여씨 황족을 꼭두각시로 만든 후여조를 정주(鄭主), 완황이 남하하여 세력을 키운 제후국을 완주(阮主)라고 한다. 이들은 명목상으론 여씨 황제의 신하(제후왕)였기에 따로 국호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묘호와 시호는 사용하였다. 또한 둘은 여씨 황제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서열상으론 완주가 정주의 아래에 있었다.

처음에는 공통의 적인 막씨가 있어 대립이 심하진 않았다. 그러나 막 왕조가 1677년 완전히 멸망하고 정주왕 정장(鄭梉)이 완주왕 완복원(阮福源)에게 조세를 바칠 것을 요구하고 신하 취급을 하는 등 모욕을 계기로 관계가 험악해졌다. 대립 관계는 5대 왕 정작(鄭柞)의 통치 시기에 전쟁이 잦아졌다가 그 뒤를 이은 정근(鄭根)의 치세에 끝이 난다.

대월 후반의 역사는 이 둘이 주도하였다. 완주는 참파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으며 캄보디아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켜 현재의 베트남 영토를 만들었다. 또한 정주도 1694년 란쌍을 공격해 란쌍과 조공 관계를 맺었다.

여씨 황제의 바로 아래 계급이였던 정씨들이 권력만큼은 압도적이였지만 황제를 칭하진 못했다. 바로 아래 광남국(완주)이 있었으며 백성들은 여씨를 군주로 여겼고 청나라의 제후왕 책봉도 여씨에게 하사했기 때문에 감히 민심과 중국을 거역하진 못했다. 정주왕 정삼(鄭森)은 여씨 일족을 비방하고 청에게 안남왕[7]에 책봉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허수아비가 된 여씨 일족[편집 | 원본 편집]

두 제후국이 역사에 족적을 남긴 만큼 여씨 황제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였다. 당연하지만 부흥운동의 주축은 여씨가 아닌 정씨였기 때문에 왕권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여씨 황제들이 가만히 정씨들의 횡포를 보고만 있었던 것도 아니였다. 영종(英宗)과 경종(敬宗)은 정왕 정송(鄭松)을 죽이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그를 암살하려고 하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정송에게 시해당했다. 이후 정왕들은 황제들의 강제 폐위/즉위, 장자의 계승 취소 등 권력 유지에 적합한 자신의 핏줄을 세웠다. 그들에게 황제는 그저 민심 안정, 청나라의 반발과 안정적인 책봉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서산당의 난[편집 | 원본 편집]

1771년 완주의 폭정에 반발한 완악, 완여, 완혜가 서산당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농민들을 구제, 소수민족과 손을 잡아 그 규모가 금세 거대해졌다. 정주 역시 완주를 멸망시킬 기회라 판단하고 서산군과 연합해 여씨 황제에게 항복한 형식으로 완주와 전쟁을 벌였고 결국 완주의 마지막 왕 완복양(阮福暘)이 항복하여 완주는 멸망하였다.

완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한 서산 삼형제는 각자 영토를 분할해서 통치했고 맏이 완악은 한명밖에 없어야 할 황제를 칭하였다. 이후 1786년 정주의 삼부군의 난과 기아,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로 봉기가 발생하자 그 틈을 타 서산조도 탕롱으로 진격해 정주멸망전을 벌였고 정주의 마지막 왕 정종(鄭棕)이 도주하였다가 완장(阮莊)에게 붙잡혀 서산조에게 압송되자 굴욕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여 황실을 주도하던 정주는 멸망하였다. 그 후 서산의 간부 완혜는 현종(顯宗)의 명으로 제후가 황제를 맞이할 때 앉는, 정주의 왕이 앉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이는 정씨의 자리를 서산조가 차지했다는걸 의미한다.

완전한 멸망 - 민제의 도주[편집 | 원본 편집]

이후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민제(愍帝) 역시 완혜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민제는 서산조가 여씨 황실을 위협할 존재라 판단하고 정주의 잔당들을 모아 복벽을 시도했으나 완유정(阮有整)이 정주의 잔당을 몰아내고 권신 노릇을 하자 완혜가 무문임(武文任)을 보내 완유정을 죽인다. 그 전에 완유정 세력과 도망간 민제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한다. 청의 대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에 서산군들은 놀라 분분히 흩어졌다.

하지만 청군의 수장 손사의(孫士毅)는 음주와 향락만을 즐기고 정세를 신경쓰지 않았기에 분노한 완혜와 서산군은 손사의의 거처로 쳐들어가 무방비 상태의 청군을 쳐버리고 손사의는 청으로 도망간다. 민제는 1788년 청군의 개입을 허락해 청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대월을 공격했으나 완혜의 서산당에게 패배했고 민제가 도망감으로써 360년 명맥을 이어가던 여씨 왕조는 멸망하였다.

역대 황제[편집 | 원본 편집]
왕명 재위
(부흥군 수장, 묘호 없음) 여의(黎意) 1530 ~ 1533 여의
13. 장종(莊宗) 1533 여령
(임시, 묘호 없음) 여헌(黎憲) 1533 ~ 1536 여헌
13(복위). 장종(莊宗) 1536 ~ 1548 여령
14. 중종(中宗) 1548 ~ 1556 여휜
15. 영종(英宗) 1556 ~ 1571 여유방
16. 세종(世宗) 1571 ~ 1599 여유담
17. 경종(敬宗) 1599 ~ 1619 여유신
18. 신종(神宗) 1619 ~ 1643 여유기(黎維祺)
19. 진종(眞宗) 1643 ~ 1649 여유우(黎維祐)
20(복위). 신종(神宗) 1649 ~ 1662 여유기(黎維祺)
21. 현종(玄宗) 1663 ~ 1672 여유우(黎維禑)
22. 가종(嘉宗) 1672 ~ 1675 여유회
23. 희종(熙宗) 1675 ~ 1705 여유협
24. 유종(裕宗) 1705 ~ 1729 여유당
25. (묘호 없음) 영경제(永慶帝) 1729 ~ 1732 여유팽
26. 순종(純宗) 1732 ~ 1735 여유상
27. 의종(懿宗) 1735 ~ 1740 여유신
28. 현종(顯宗) 1740 ~ 1786 여유조
29. (묘호 없음) 민황제(愍皇帝) 1786 ~ 1787 여유기(黎維祁)
(감국, 묘호 없음) 여유근(黎維堇) 1787 ~ 1789 여유근
29(복위). 민황제(愍皇帝) 1789 ~ 1790 여유기(黎維祁)

참고 문서[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2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귀농시켰다. 전 군을 다섯번으로 나누고 한번이 근무하고 4개의 번이 귀농하는 등의 교대방식을 채택했다.
  2. 태종의 장자로 본래 태자였으나 어머니 양씨가 태종의 총애를 잃어 폐태자되었다. 그 일에 앙심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3. 예시: 한명회광릉(光陵)의 은혜를 입은 자로써... 출처
  4. 목의왕은 성종의 손자로 추존황제인 덕종(德宗)의 아들이다. 이름은 여영.
  5. 태조가 폐위한 진고와는 동명이인.
  6. 황제의 수레와 의상을 입고 다녔다.
  7. 대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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