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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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靑日戰爭 / First Sino-Japanese War)은 1894년에 발발한 전쟁으로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일본제국간의 전쟁이었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강경한 쇄국정책을 추구하던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1873년에 실각한 뒤 일본의 치밀한 각본 하에 발생한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1875년 조선의 최초 근대적 외교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행위와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882년에 임오군란을 계기로 하여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파괴되면서 일본은 이를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종주국을 자처중이던 청나라 역시 일본보다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의 후원 아래 감행된 갑신정변은 김옥균의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으며 이후 1885년 텐진 조약에 따라 청, 일 양국은 조선에 파병한 군대의 공동철수와 차후 조선에 파병할 경우 사전에 통고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894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의 확산에 따라 조선 정부가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그 해 6월 9일 3천명의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도 조선 거류민 보호라는 명목하에 7천명의 병력을 인천을 통해 상륙시키기에 이른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어느 정도 평정되자 청은 일본에 대해 동시 철병을 제안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도 동시 철병을 지지하였음에도 일본은 이번 기외에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청의 제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은 그와 같은 제안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일부러 충돌을 야기시켜 정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전환시키고자 했던 일본은 청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7월 29일 성환에 주둔중이던 청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게 되었다.

전쟁 발발[편집 | 원본 편집]

7월 29일의 성환 전투를 통해 일본이 선빵을 날리면서 청일 양국은 8월 1일 상호간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일단 선빵부터 날리고 선전포고하는 건 일본 종특인 듯[1] 동시에 청은 압록강을 거쳐서, 일본은 일본과 부산을 거쳐 각각 조선으로 증원군을 파병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일본군의 일방적인 공세로 진행되었다.

전쟁 초기 양측 주요 세력 및 작전계획[편집 | 원본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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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해군은 당시 서양식 해군으로 조직된 북양, 남양, 복건 및 광동 수사(함대)를 두었다. 이 4개의 함대 가운데 북양함대는 청 해군의 정예 함정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7,350톤급의 전함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을 비롯하여 경원(經遠), 치원(致遠)등 10척의 순양함이 배속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에 참가한 것은 북양함대 전부와 이후 광동함대에서 지원된 주력함 3척이었다. 이 중 정원함과 진원함 두 전함은 1881년에 독일에서 건조된 함선은 당시에는 구식이었지만 주포로 12인치 함포를 각각 2연장 포탑 2기로 4문을 탑재중이었고, 14.5노트의 속력이었다. 이외에 육군 세력으로 청의 북양군이 참전하였다.

청군의 작전계획은 일본 본토에 대한 침공할 의도는 없이 청의 해군[2]으로 발해만 근해의 제해권을 확보한 뒤육군의 해상수송을 호송하고 한반도에 주둔중인 육군과 호응하는 한편, 육군은 병력을 평양에 집중시켜 일본군을 축차적으로 한반도에서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일본[편집 | 원본 편집]

일본의 해군은 여러 차례의 함정 건조를 통하여서 23노트의 속력을 가진 4,200톤급의 장갑함 마쓰시마를 기함으로하여 동급의 장갑함 이구스시마, 하시다테 등이 참전하였으며, 4,200톤급의 속사포 순양함 요시노와 3,700톤급의 방호순양함 나니와 다카지호, 아키스시마 3척, 2,400톤의 방호순양함 지요다와 구식 장갑함 2척 등이 참전하였다. 이외에 육군으로 일본군 5사단 12만명이 참전하였다.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크게 2기로 나누어서 제해권의 확보 여부에 따라서 지상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먼저 1기는 제해권 확보와 관계 없이 5사단을 한반도에 파견하여 청군을 이 방면에서 견제하고 국내에 있는 육군과 해군으로 수비를 하면서 출정을 준비하는 한편, 함대를 출동시켜 청의 해군을 격파하고 황해와 발해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2기 작전은 갑, 을 병 3개의 작계로 수립되었는데 갑작전은 청의 함대를 격파하고 제해권을 확보하였을 경우 발해만에 육군의 주력을 상륙시켜 야전에서 결전한다는 계획이었으며, 을작전은 발해만 일대의 결정적인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하였을 경우 육군의 주력을 한반도에 상륙시켜 한반도를 방어한다는 전략이었으며, 병작전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으로 청에게 제해권을 털렸을 경우 육군의 주력을 일본에 주둔시켜 청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전투[편집 | 원본 편집]

결과[편집 | 원본 편집]

황해에서 제해권을 빼앗기고 요동반도의 여순항까지 함락당하면서 청나라는 전쟁에서 제대로 패배하고 만다. 전쟁의 주력이었던 북양함대의 기지가 점령당하고 함대와 북양군 자체도 와해되어 버린 것.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청에게서 요동반도, 팽호제도, 대만을 받아내었으며 청은 한반도에서 병력을 철수하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게 되며 동시에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 다만 요동반도는 이후의 삼국간섭에 의해서 중국에 돌려주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청과 조선에 미치게 되면서 이후 러일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참고로 이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졌던 여순항을 손쉽게 점령한 일본군은 여순항의 요새를 우습게 보고 이후의 러일전쟁에서 거한 삽질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의 경우 청에 의지할 수 없게 된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일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영향력을 막아보려고 하였으나 이는 을미사변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청은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와 봉건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으나 서태후를 비롯한 구집권 세력의 방해로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되었고, 이후 의화단 운동신해혁명으로 이어지는 사회의 혼란상이 이어지게 되었다.

각주

  1. 이 전투는 청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였으나 지휘관의 무능으로 패배. 이로인해 평양성에 집결한 청 육군은 근대화된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2. 해군은 위해위요새를 본거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