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군

창녕
Changnyeong fields.jpg
지역 정보
종류
군수 한정우 (국민의힘)
국회의원 조해진 (국민의힘) (밀양·의령·함안·창녕)
행정구역 2 읍, 12 면
인구 63,534 명
면적 532.72 km2
웹사이트 http://www.cng.go.kr/

창녕군(昌寧郡)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중북부에 있는 이다. 군청 소재지는 창녕읍이고, 행정구역은 2읍 12면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녕 지역은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영남 내륙 평야 지역 중 하나로 경지가 많고 땅이 비옥하여 일찍이 사람들이 정착하고 거주하여 가야 시대 유물부터 출토되고 있다. 신라 시대의 이름은 비자화군(比自火郡) 또는 비사벌이었다. 555년(진흥왕 16년)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565년에 폐지되었다. 757년 신라 경덕왕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개명하였다. 이 때, 현효현(玄驍縣)을 속현으로 두고 있었다. 940년 고려 태조가 현재의 이름인 창녕군으로 개명하였다. 현효현은 현풍현(玄風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창산(昌山) 또는 하산(夏山)이라고도 불렸다. 1018년 창녕군과 현풍현이 모두 밀성군(밀양)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 창녕현에 감무가 파견되어 주현으로 승격하였다.

오랜 역사에 걸맞게 창녕은 고려·조선 시대에 많은 충신과 대학자들을 배출한 지역이며 학문의 고장이다. 조선 시대에는 현재와 같이 경상남·북도로 행정지역을 나눈 것이 아니라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나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좌(江左 낙동강 왼편-현재 안동지역), 강안(江岸 낙동강 인접지역), 강우(江右 낙동강 오른편-현재 지리산 인근지역)으로 나누어지고 창녕은 강우와 강안을 통상 지칭하는 경상우도 지역 문화권에 속하였다. 특히, 성주, 고령, 현풍, 창녕, 영산, 의령, 합천, 밀양 등 강안지역은 농지가 많고 비옥하여 경제적으로 풍요하여 인재가 많고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다. 고려 충신 두문동 72현[1] 중 한 명인 정절공(貞節公) 성사제(成思齊),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의 관향이 창녕이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아들인 김언상 선생이 창녕 고암에 거하였으며,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여 지역인 성천기(成天祺)[2]와 함께 8서재[3]를 지어 더욱 학문을 고양한 역사가 있다. 이와 같은 학문의 뿌리로 인해 조선 4대 성리학파인 남명학파, 퇴계학파, 우계학파, 율곡학파 중 두 학파 남명학파와 우계학파의 창시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본관이 바로 창녕이다.

창녕을 비롯한 강우·강안의 영남우도 지역민들은 의(義)와 예(禮)를 숭상하는 기질이 강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령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창녕의 성천희(成天禧),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고령의 김면(金沔) 등이 대표적 이 지역 의병장들이다. 특히, 곽재우와 성천희는 창녕지역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고 곽재우가 여생을 마친곳이 현재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있는 망우정(忘憂亭)[4]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낙동강·남강을 도하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이 지역 의병들이 낙동강·남강을 방어선으로 하는 항전으로 저지하고 일본군의 낙동강 병참선을 차단하여 임진왜란 초기 열세에 몰린 조선에 승리로의 반환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5], 임진년 왜군에게 빼앗긴 국토 중 최초로 수복한 곳이 바로 창녕 영산[6] 현풍현이다.[7] 정유재란 시에도 전라도를 통해 북상하려는 왜 좌군과 경상도를 통해 북상하려는 왜 우군 중 가토 기요마사모리 데루모토가 이끄는 왜 우군 6만 명과 최초의 전투가 일어난 곳이 바로 창녕이다. 성천희의 건의로[8] 창녕과 인근 지역민들의 힘으로 쌓은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성안의(成安義)[9]의 지휘로 의병 1천 명, 영산 보림사 스님들을 비롯한 승병 1천명 총 2천명의 의·승병들이 모두 목숨을 건 항전으로[10] 왜 우군 6만 명을 막아내 일본군의 경상도를 통한 북진을 원천 차단하여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구국의 역사가 있다. 정묘·병자호란 당시에도 밀양의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선생이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해산하였다. 양대호란 이후 호란을 야기한 인조를 대신하여 유능한 광해군을 복립시키기 위해 창녕인 성지도(成至道), 고령인 박희집(朴禧集), 합천인 정한(鄭澣) 등이 광해군 복립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한 역사가 있으며, 19세기말 일제의 침략 시에도 1915년 묘지계출 반대운동(성근호), 항일의병 (노승용, 노응규, 우재룡), 항일 유림운동(노상직, 노도용, 성순영, 이정후, 강신혁), 3.1 운동 창녕 24인 결사대[11] 등 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우석 성재경 선생이 농업 근대화를 위해 일제강점기 양파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해 재배 성공한 지역이다. 그리고, 창녕을 비롯한 강안·강우 지역 인물들은 현대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에도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연혁[편집 | 원본 편집]

15면 - 읍내면, 고암면, 성산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대지면, 창락면, 남곡면, 장마면, 부곡면, 영산면, 길곡면, 도천면, 계성면

지리[편집 | 원본 편집]

창녕군은 경상남도 중앙 북단에 위치하며 북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상북도 고령군과 인접하고, 동쪽은 산악을 경계로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의 밀양시가 접해 있으며, 서남쪽은 낙동강을 사이로 합천군, 의령군이 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함안군, 창원시와 접하고 있다.[19]

우포늪 전망대에서 바라본 우포늪

우포늪은 국내 최대의 자연늪이다.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와 이방면 안리, 유어면 대대리, 세진리에 걸쳐 있으며 습지 면적은 약 2,313㎢정도(70만평)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늪지에는 수많은 물풀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98년 3월 2일람사르 협약》 등록 습지가 되었으며, 1999년 2월 8일 환경부에 의해 습지보호지역으로, 2011년 1월 13일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20]

부곡온천은 옛날부터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부곡이라 불렸고, 마을 (온정리)에 옴생이라고 붙여진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다는 소문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옴 환자들과 나병 환자등 피부질환자들이 떼지어 와서 치료를 하였다하니 부곡온천의 수질이 다른 온천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1973년 신현택옹이 발견한 최고 78℃의 온천수를 하루 6천톤을 채수할 수 있는 유황온천이 오늘의 부곡온천이다.[21]

기후는 비교적 온화하나 평균기온이 여름에는 23.9℃이고, 겨울에는 영하 1.2℃ 정도로서 한서의 차이가 심하며, 여름에는 가뭄과 수해가 잦다.[19]

행정구역[편집 | 원본 편집]

창녕군의 행정구역은 2읍 12면, 139리 775반으로 구성되어 있다.[22] 면적은 532.72㎢이다.[23] 2014년 7월말을 기준으로 인구는 29,843세대, 63,498명이고 그 중 27.1%가 창녕읍에, 19.5%가 남지읍에 거주한다.[24]

읍·면 한자 세대 인구 면적 행정구역지도
창녕읍 昌寧邑 7,295 17,200 61.42 Changnyeong-map.png
남지읍 南旨邑 5,530 12,395 55.23
고암면 高岩面 1,156 2,129 44.48
성산면 城山面 907 1,627 47.03
대합면 大合面 2,085 4,032 46.56
이방면 梨房面 1,351 2,787 46.60
유어면 遊漁面 1,045 1,929 33.29
대지면 大池面 1,187 2,535 17.87
계성면 桂城面 1,313 2,533 27.86
영산면 靈山面 2,809 6,062 29.36
장마면 丈麻面 1,023 1,942 29.99
도천면 都泉面 1,437 2,896 25.45
길곡면 吉谷面 794 1,557 27.57
부곡면 釜谷面 1,911 3,874 27.57

교육[편집 | 원본 편집]

  
  

교통[편집 | 원본 편집]

출신 인물[편집 | 원본 편집]

자매 도시[편집 | 원본 편집]

바깥 고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두문동 72현: 조선의 역성 혁명에 의해 고려가 망할때 고려에 충절을 지킨 72명의 고려 충신들이다. 두문동(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으로 들어가 백이와 숙제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순절하였다.
  2. 덕계 오건의 문인으로 승정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3. 한강 8서재: 1580년(선조13) 창녕 현감으로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창녕의 학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강학(講學)의 장소로 삼은 8서재(八書齋)이다. 8서재는 옥천정(玉川亭),술정(述亭),관산정(冠山亭), 백암정,물계정(勿溪亭), 부용정(芙蓉亭), 팔락정(八樂亭),만진정(蔓津亭)이다. 현재까지도 이 지명들이 창녕에 남아있다.
  4. 곽재우의 호가 망우당(忘憂堂)으로 근심을 잊는다는 뜻으로 이는 그가 늘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5. 임진년 선조 교지 (망우선생문집)
  6. 영산현: 조선 시대에는 영산현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1914년 영산은 창녕과 통합되었다.
  7. 임진왜란 주요 낙동강 좌현 탈환 전투: 곽재우와 성천희를 의병장으로 한 의병들의 현풍, 창녕, 영산현 탈환 전투가 임진년 7월과 8월에 걸쳐 있었다. 이 전투는 낙동강 오른편(의령, 합천)에 머무르던 의병들이 왜군의 낙동강 병참수로를 낙동강 양쪽에서 끊기 위해 주요 좌현들을 탈환하려는 전략하에 전투가 진행되었다. 현재 창녕군 영산면 호국공원에 이때 순국한 의병들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8. 조선왕조실록》 선조/82권|11월 20일
  9. 성안의: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호는 부용당(芙蓉堂)이다. 왜란 후 남원부사를 지낸 적이 있는데 이때 아들 성이성(成以性)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춘향전》이다.
  10. 이때 곽재우와 의병들은 화왕산성내 섶나무를 쌓아두고 성이 함락될 경우 성에 불을 질러 모두 자결할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망우선생문집).
  11. 3.1운동 창녕 24인 결사대: 구중회, 구남회, 구판돈, 구판진, 권점동, 김금영, 김두영, 김찬선, 김추은, 남경명, 박도문, 박종훈, 서점수, 신영락, 이기식, 이수철, 임창수, 장정수 장진수, 조삼춘, 최봉용, 하영규, 하은호, 하찬원
  12. 칙령 제98호 地方制度改正件 (1895년 음력 5월 26일)
  13. 칙령 제36호 地方制度官制改正件 (1896년 8월 4일)
  14.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1913년 12월 29일)
  15. 도령 제2호 (1936년 3월 3일)
  16. 법률 제360호 지방자치단체의폐치분합및구역변경에관한법률 (1955년 6월 29일)
  17. 법률 제538호 읍설치에관한법률 (1960년 1월 1일)
  18. 법률 제1177호 읍설치에관한법률 (1962년 11월 21일)
  19. 19.0 19.1 창녕 기본 현황, 지리, 기후, 2011년 7월 22일 확인
  20. 우포늪, 창녕군 문화관광, 2011년 7월 20일 확인
  21. 부곡온천, 창녕군 문화관광, 2011년 7월 20일 확인
  22. 창녕군 통계연보 2009
  23. http://www.cng.go.kr/statistics/data/2011/2.pdf
  24. 창녕군청 월별인구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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