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태종

태종(太宗, 1218년 7월 10일~1277년 5월 5일)은 베트남 쩐 왕조의 초대 황제(재위 기간 1225년~1258년)다.

시호는 통천어극성무원효황제(統天御極聖武元孝皇帝). 휘는 진경(陳煚, Trần Cảnh/쩐까인)[1]이나,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이름은 진포(陳蒲, Trần Bồ/쩐보)였다.

태조로 추존된 진승의 아들로, 종숙부인 태사 진수도의 지지로 황제에 오르고, 여러 정책을 펼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이후 대륙을 평정하고 세계정복의 야욕을 품은 몽골 제국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집안 내력[편집 | 원본 편집]

陳煚的先世是中國閩人,下又附註說「或曰桂林人」 진경의 선조는 중국 민나라[2] 출신이며, 계림인(桂林人) 이다.

— 《대월사기전서》

본디 진경의 선조는 중국 오대십국시대민나라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출신만 전해지지 자세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데, 중국의 야사에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진경의 원래 이름은 사승경(謝昇卿)이며 복주(福州) 락읍(樂邑)에서 왔다가 현재의 광서인 옹주(邕州)를 거쳐 안남으로 들어가 안남의 한 정승에게 사위로 들어가 진(陳)씨로 성을 정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천주진강 안해(安海)에서 바다를 건너 안남으로 이주했고 후에 리 왕조 소황의 국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목조의 안남 이주[편집 | 원본 편집]

그의 고조부 진경[3]은 중국에서 베트남의 묵향(墨鄕) 미록현(美祿縣)으로 이주해 대대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증조부 영조[4]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조부인 원조와 관해 전해지는건 그의 대에 어업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세력을 형성한 원조는 노략질을 하기도 하였으며 묵향에서 세력을 키웠다.

변방의 오랑캐에 불과했던 진씨 가문이 조정과 가까워진건 리 왕조고종의 치세인 1208년 범유(范猷)가 난을 일으키자 당시 고종은 태자 이호참(혜종)과 도망가 원조(진리)의 집에서 잠시 몸을 숨겼다. 이때 태자 호참과 진리의 딸이 맺어졌으며 이 일을 계기로 황제의 사돈이 된 쩐리와 그 가문은 외척이 되어 조정과 가까워진다.

또한 진경의 숙부 진사경(陳嗣慶)은 혜종과 맺어진 여동생이 담태후[5]에게 구박받는것에 불만을 품고 1213년 군사를 일으켜 담태후를 도망가게 만든 후 태위에 임명되었고 혜종이 무능해 정세에 관여하지 않자 대권은 태위 진사경에게 넘어간다.

진경의 아버지 태조는 1223년 진사경의 자리를 계승해 태위를 역임했고 종숙부[6] 진수도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면서 성 내외 군사 전체를 통솔하였다. 진경은 이런 권신들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출생부터 든든했던 일명 금수저였다.

여제의 국서가 되다[편집 | 원본 편집]

진경은 1218년 7월 10일 아버지 진승과 여씨(黎氏) 소생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서에 따르면 진경은 제왕의 용모를 띄었으며 한고조와 닮았다고 전해진다. 진경은 어릴땐 하급 관직을 지내다가 8살 때, 종숙부 진수도의 도움으로 입궁하여 여제 소황을 모셨는데 소황이 매우 좋아했고 곧 소황과 혼인했다.

이 혼인 이야기의 다른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선 혼인을 시킨 명분도 정말 가관인데, 당시 베트남에는 여자가 남자 쪽에 빈랑 열매를 보내 그것을 남자가 받아들이면 혼인이 이뤄지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날 소황이 자신과 친구가 된 진경과 같이 놀다가 우연히 빈랑의 열매가 담긴 수건을 던졌는데, 진수도는 그것을 빌미로 둘의 혼인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어쨋든 일개 외척도 아닌 진경이 국서가 된건 진씨 일가의 찬탈을 위한 중요한 첫 바둑돌이 되는 기점이 되었다.

숙부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다[편집 | 원본 편집]

쩐 왕조(이하 진조)의 월사략(越史略)에 따르면, 이소황이 진경에게 양위한건 그녀의 아버지 혜종의 뜻이라고 전해진다. 상황 혜종은 태위 진승의 아들 진경이 어린 나이에도 풍모를 갖추고 있어 제세안민 할것이라 여겨 소황과 혼인시키려 하였다.

「以一陰而御羣陽,衆所不與,必致悔亡」,他見「太尉(陳承)仲子某(指陳煚)年雖沖幼,相貌非常,必能濟世安民,欲以為子而主神器,仍以昭王配之」

일음(一陰)[7]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더이상 후회가 없도록 하기 위해 태위(진승)의 아들 경이 어리지만 용모가 아릅답고 제세안민에 기여할 것 같아 주신[8]의 그릇으로 삼으려 한다. 그래서 소왕(이소황)과 맺었다.

진승은 듣고 망설여 혜종의 말을 떠볼까 주저했으나 진수도는 혜종의 말을 기회라 여기고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今以無嗣,欲擇賢而付之,此乃上王遠法堯舜之真讓,又何疑哉?」

후사가 없어 현명한 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란 건데, 이는 요순이 행한 유서깊은 행위인데, 무슨 의심이 있겠나이까?

대월사기전서엔 1225년 진경이 소황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진수도가 쿠데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소황은 자신이 여자라 역량이 부족하다는 등, 조칙을 내려

「今朕反獨算,惟得陳煚,文質彬彬,誠賢人君子之體,威儀抑抑,有聖神文武之資」

지금의 짐은 사리에 어두우나, 문질빈빈(文質彬彬)[9]하고 성현인 군자(君子)의 몸은(진경을 말한다) 신과 같고 자질이 있다.

그리하여 진경에게 양위하였다. 이렇게 리 왕조가 멸망했으며 진경이 즉위한 후, 진수도를 국상부(國尙父)에 임명했고 생존해 있던 아버지 진승을 태상황에 봉하였다.

황후 폐위와 진류의 난[편집 | 원본 편집]

한편 폐위된 이여제 소황은 진경의 황후가 되어 소성황후(昭聖皇后)가 되었다. 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1237년 소황의 언니 순천공주(順天公主)를 황후로 삼고 소황을 공주로 강등시키고 신하인 여보진(黎輔陳)에게 시집보냈다.

본래 진경이 새로 맞이한 순천공주는 본래 진경의 형 진류(陳柳)의 아내였는데 진류는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자 난을 일으켰다. 진경은 그가 난을 일으키자 수도를 떠나 안자산(安子山)에 잠시 머물렀다. 이후 난이 진압되자 진수도가 진경을 호위하자 다시 궁궐로 돌아왔다.

자새한 내막은, 결국 힘에 부친 진류가 어부로 가장한 뒤 배를 타고 진경을 찾아 항복하자 형제는 서로 눈물을 흘렸고 진수도가 칼을 빼들어 진류를 죽이려 하자 진수도를 막고 진류와 화해한 다음 형에게 봉국을 주고 그를 안생왕(安生王)으로 봉했다는 이야기이다.

용상에 올라 기반을 다지다[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진경은 8살 아이에 불과했기에 그는 아버지 진승과 종숙부 진수도의 정치적 개입(섭정)이 잦았다. 대월사기전서에는 태종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모두 진수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이다.

장적제도(帳籍制度) 정책[편집 | 원본 편집]

진경은 리 왕조때의 장적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장적제도는 나라의 모든 문무관, 서리, 군사, 16세 이상의 남자, 노쇠한 자, 이주자 및 유랑자가 얼마나 되는지 현지의 관리들이 모두 장적(호적)에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적 기록에 따르면 관직은 자손이 계승할 수 있고, 부유하나 관작이 없는 자는 군 복무를 해야 했다.

징세[편집 | 원본 편집]

  • 징세: 남성들이 소유하고 있는 밭의 수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했다. 밭이1, 2면적 이면(畝) 매년 1관(1000)씩 납부했고 밭이 3개에 4면적인 자는 3관, 토지가 없는 자는 면제받았다.
  • 토지세: 개인의 밭의 곡물을 내는 걸로, 국고전(國庫田)과 척도전(拓刀田)으로 나누어 논의 등급에 따라 상중하의 등급을 매겨 징수했다. 또한 민간의 연못과 염전에도 세무를 부과하였다.

그 외에 생선, 새우, 채소, 과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무를 부여했다.

교육[편집 | 원본 편집]

  • 과거 시험 및 교육기관 설립: 태학을 개설해 석차를 나누어 장원(章元), 방안(榜眼), 탐화(探花) 3등급으로 우열을 가렸고 세 개의 과목에 관한 시험이 있었다. 또한 1253년 국학원을 설립해 사서오경을 가르치게 하고 무당(武堂)을 설립해 무술을 연마하게 했다.

관제[편집 | 원본 편집]

진조의 관제는 다음과 같다.

  • 무과는 삼공 - 삼소 - 태위 - 사마 - 사도 - 사공 - 좌우상국 - 수상 - 참지(參知)
  • 문과는 안무사 - 지부 - 통판 - 첨판

문관 분야에는 중앙 각 부에 상서-시랑-랑중-원외-어사-지방 안무사(安撫使) 등을 두었다. 이외에도 무관직인 중앙을 지키는 군사와 지방을 수비하는 군을 두었다.

  • 승진 제도: 진조의 관리는 10년을 채울때마다 1급씩 승진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법률에 대해선, 1244년 형률을 완성했고 절도범일 경우 손, 발을 자르거나 코끼리를 이용해 압사시키는 형벌을 제정했다.

또한 진경의 치세엔 많은 장정들이 군에 입대했고 황족도 군대의 통솔령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군 입대기 동안 황족인 진국준도 군에 입대하였다.

명목상의 양위, 태상황[편집 | 원본 편집]

진경은 1558년 3월 30일 태자 진황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 다만 정세엔 계속 관여했고 아들 성종을 보좌하며 국정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양위는 진조의 역대 군주가 다 행했던 방식인데, 진중김은 진경이 통치 방법을 알려주고 태상황인 자신이 버젓이 살아있기에 형제들의 다툼을 방지하는 좋은 방법이라 평했다. 오사련 역시 이 양위 방식에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自夏禹傳子之後,父崩子繼,兄歿弟承,永為常法。陳氏家法,乃異於是,子既長,即使承正位,而父退居聖慈官,以上皇稱,同聽政,其實但傳大器,以定後事,備倉卒爾,事皆取決於上皇,嗣主無異於皇太子也

하조가 계승한 이후,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물려받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물려받는 것이 상법(常法)이였다. 진씨는 비록 왕위를 계승하고 아버지가 물러났다 해도 상황이 같이 정치를 들었다. 그러나 모든 권한은 상황이 행사했고, 금상[10]은 황태자 신세와 다름 없었다.

대외관계[편집 | 원본 편집]

그의 치세 동안 바로 위의 중국은 몽골 제국의 황제 칭기즈 칸의 정복사업으로 운남의 대리국, 대륙의 제국인 남송까지 무너트렸으며 거리가 비교적 멀던 대월까지 공격하였다.

남송[편집 | 원본 편집]

진조는 남송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고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당시 황제인 송이종이 진경을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정식 책봉했고 명목상의 관직과 식읍을 받았다. 또한 진경은 자신이 아들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남송에게 전하기도 했으며 몽골의 침입이 한창이자 송은 대월에게 충분히 방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진경이 아들 황(성종)에게 양위했을때도 바로 성종을 안남국왕으로 봉해줬고 명목상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남송과 진조의 관계는 우호적인 조공 관계였던 것이다.

참파[편집 | 원본 편집]

참파인들은 리 왕조가 쇠락할 때부터 그 연안을 약탈하는 세력들이 많았다. 진경은 즉위하자 덕으로 그들을 가르치려 했으나 참파가 불복하고 이전에 뺏긴 영토를 수복하려 하자 진경은 우호적인 태도를 접고 1252년 참파왕 자야 파라메스바라바르만 2세의 왕비와 그 신하들을 붙잡고 회군하였다.

몽골 제국의 침입[편집 | 원본 편집]

1253년 몽골 제국이 운남의 대리국을 멸망시키자 이제 그 근처의 대월까지 정복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곧 1258년 몽골의 장수 올량합태(兀良合台)가 군사를 이끌고 대월을 침략했고 수도 탕롱은 손쉽게 몽골군에게 함락당했다. 진경은 배를 타고 태위 진일교(陳日皎)에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어봤는데 일교는 그저 손가락에 물을 뭍히고 배에다 입송(入宋)이라는 글만 쓸 뿐이였다.

다시 태사 진수도에게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臣首未至地,陛下無煩他慮」

근심할 것이 없사옵니다.

의지가 생긴 진경은 태자 황과 직접 전함에 타 몽골 수군과 싸웠고 결국 그들을 패퇴시켰다. 몽골군은 패퇴할 때도 대월의 백성들에게 공격받았기에 아예 대월땅 자체를 벗어날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을 격퇴한 그는 스스로 소국(小國)을 자칭하여 사신을 파견해 제후로써의 겸손함을 나타냈다. 이름을 광병(光昺)으로 바꾸고 그 이름으로 공물을 보내자 몽골 제국도 그를 인정해 진경을 안남왕에 책봉했고 3년마다 한 번씩 공물을 보내게 하는 조공관계를 갖추었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진경은 1277년 5월 5일에 만수궁(萬壽宮)에서 60세로 사망했다. 묘호는 태종 효황제로 정했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그가 확립한 몽골과의 조공관계는 당분간 지켜졌지만 이후 몽골이 두 번째 침략하자 화친은 깨지고 대월은 몽골과의 대전쟁에 나서게 된다.

가계도[편집 | 원본 편집]

  • 선조(先祖)
    • 고조부: 목조
    • 증조부: 영조
    • 조부: 원조
    • 부황: 태조
    • 모후: 국성황태후(國聖皇太后)
  • 형제
    • 안생왕(진류) - 쩐흥다오의 아버지.
    • 흠천왕 진일교 - 위의 입송 일화로 유명함. 진경의 동생.
    • 기타 형제와 자매
  • 황후
  • 자녀
    • 진정(陳鄭) -태자. 조졸함.
    • 진국강(정국대왕)
    • 성종
    • 진익직(陳益稷) - 원의 배트남 원정시기 황실을 배반하고 원나라에 붙어 대월의 왕위를 노린 매국노이며 진익직의 아들이 진우량이란 설도 있다.
    • 기타 아들과 공주.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중국의 역사서에는 이름이 진일경(陳日煚, Trần Nhật Cảnh/쩐냣가인) 혹은 진광병(陳光昺, Trần Quang Bính/쩐꽝빈)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오대십국시대에 존속했던 10국 중 하나.
  3. 陳京. 한국식 발음은 같지만 한자와 베트남어 표기/읽기(쩐낀)는 다르다. 진경이 황제로 즉위하고 목조(穆祖)로 추존하였다.
  4. 진흡. 영조(寧祖).
  5. 譚太后, 시호는 안전황후(安全皇后). 진씨 일족을 굉장히 싫어했고 그들의 음식에 독을 타는 등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후일 진경이 황제에 즉위하자 이씨 처형식때 같이 처형당한다.
  6. 태조와는 사촌 관계이며 영조의 손자이자 홍의왕(弘義王)의 아들이다.
  7. 건강이 좋지 않음을 말한다. 나라를 잘 못다스렸다는 뜻.
  8. 제단에 모신 가운데서 주체가 되는 신.
  9. 감정과 문식(글을 아름답게 함).
  10. 재위하고 있는 황제.
쩐 왕조의 역대 황제
이조 9대 소황 이불금 1대 태종 진경 2대 성종 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