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종교 개혁(宗敎改革, 영어: Reformation)은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내부 개혁 운동이다.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 질서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은 사건으로, 유럽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일반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된 사건을 기준으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은 통일된 교회가 기독교적인 서양에서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만든 사회 운동이다. 이단재판을 통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로마 교황의 의도는 종교 개혁 운동에 동조하는 군주들의 반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교회는 개혁적인 사고를 금하고, 그런 내용의 서적을 불태움으로써 새로운 물결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결국은 조소와 풍자만을 거두어 들였다. 새로운 것이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모순적인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이 때 옛 교회의 붕괴를 야기시킨 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저항감을 불러일으킨 교회적 일상생활의 타락현상이었다. 맨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성직체계는 희망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은 자성과 깨달음의 장소인 수도원의 문 앞에서도 멈출 줄을 몰라 뭇사람들의 이야기거리가 되고, 성직자들의 애정행각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담은 책자풍자적인 글들이 만들어져 나왔다.[1]

원인[편집 | 원본 편집]

교회 권위의 하락[편집 | 원본 편집]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막을 내렸지만,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이후 아비뇽 유수 등으로 교회와 국가의 세력 다툼에서 교회가 결과적으로 국가 권력 아래에 놓이게 되는 등 교회의 전반적인 위상 자체가 하락하게 되었다. 또한 흑사병과 같은 대규모 유행병 상황 아래서 교회가 민중에게 아무런 실질적인 구원이 되지 못하는 등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입구로 여겨지던 교회의 위상이 흔들리게 된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독신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성직자들의 타락과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등(아예 교황의 사생아가 있었을 정도였다) 가톨릭교회가 유럽에서 더 이상 제대로 된 정신적, 종교적 지도력을 행사하기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르네상스[편집 | 원본 편집]

오직 종교만이 존재하던 중세 시대가 끝나고, 14세기부터 르네상스(문예 부흥 운동)가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다채로운 문화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서유럽이 점점 세속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늘었던 것도 종교 개혁의 원인 중 하나다.

교회의 면죄부 판매[편집 | 원본 편집]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로 인해 재정이 부족해진 교황청에서 면죄부[2]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대해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자신이 교수직을 맡고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 반박문을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시발점으로 본다.

진행[편집 | 원본 편집]

루터 이전의 흐름[편집 | 원본 편집]

존 위클리프[편집 | 원본 편집]

영국의 교구장이었던 존 위클리프는 당시 교황청의 권력과 당시 가톨릭 교리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 그는 교황만이 성서를 사유하면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반박하면서 당시 라틴어로만 쓸 수 있었고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 금지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으며 신앙의 유일한 표준은 교회가 아니라 성서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성찬례에서의 화체설을 정면 부정하고 임재설을 주장하였으며, 교황의 사면권(면죄부/면벌부)를 비판하면서 교황은 신의 대리인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다를바 없다는 혹평까지 하는 등 이후 종교개혁에서 나오게 되는 주장들의 기본적인 내용들은 거의 다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는데, 그 당시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

얀 후스[편집 | 원본 편집]

얀 후스는 보헤미아(현 체코 지방)의 종교 개혁자로, 앞서 서술했던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를 강조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멈추고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가톨릭교회를 지적했다. 그는 또 체코어와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하여 지금까지 내려져 오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편 1414년 스위스에서 종교 회의가 열렸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그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며 회의에 참석하라고 권유했고[3], 후스는 이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미리 황제가 파놓은 함정이었는지, 그는 오자마자 체포되고 갇혀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버리지 않아 결국 화형당한다.[4] 여기에 이미 죽어 무덤속에 있던 위클리프도 같이 부관참시 당한 뒤 시신을 불태워버린것은 덤

에라스무스[편집 | 원본 편집]

루터의 종교개혁[편집 | 원본 편집]

면벌부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여러 가지 가르침에 순종할 수 없었던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난했다. 또 이와 동시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펼쳐 일반 농민들도 성경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했다.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한몫을 한 것이다.[5] 그를 저지해야 했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하이델부르크에서 열릴 예정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 초청하여 그의 독자적인 신학을 주제로 토론을 시킬 예정이었는데, 오히려 그는 하이델부르크 논쟁에서 더욱 강하게 자신의 주장들을 밀어붙여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 다음엔 라이프치히 논쟁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루터는 주눅 들지 않았다. 결국 교황 레오는 1520년 루터에게 60일의 기간을 주며 이 기간 내에 자신의 주장을 전부 철회하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루터는 보란 듯이 교서를 불태워버린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개신교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고, 오직 적대 관계만이 남았다. 가톨릭교회는 그를 교회에 대한 맹세를 저버린 파렴치한 이단자로 보지만, 어찌 됐든 간에 종교 개혁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신학자임은 분명하다.

다른 국가의 종교개혁[편집 | 원본 편집]

스위스[편집 | 원본 편집]

츠빙글리[편집 | 원본 편집]
칼뱅[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 출신의 종교 개혁자였던 그는 제네바에서 루터보다도 더 강경한 개혁을 해 나갔는데, 구원을 얻는 것은 연약한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가능하다는 독력주의(예정설)[6]를 강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그는 1536년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저술하여 가톨릭 교회에 큰 충격을 줌과 동시에 종교 개혁에 큰 사상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 덕분에 개신교 신학의 이론적인 부분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그의 신학을 교회의 기본 교리로 삼는 교회는 장로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다.

영국[편집 | 원본 편집]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여파[편집 | 원본 편집]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토마스 뮌처", 클라우스 에버트
  2. 정확히는 죄에 대한 벌을 면제해 준다는 면벌부
  3.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100% 계획된 함정이지만, 후스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4. 후에 그를 따르는 일명 '후스파'들은 동료 후스파들을 체포한 시 의회 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지는 프라하 투척사건이라는 사건을 저질러 30년 전쟁에 불을 지핀다.
  5. 순서로 따지면 존 위클리프가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지만, 그의 신학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탓에 우리는 보통 종교개혁 하면 루터를 먼저 떠올린다.안습
  6. 후에 존 웨슬리는 이를 부정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소망할 자들을 미리 예지하고 계신다라는 예지예정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따르고 있는 교회는 감리교회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