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철도

조선철도
朝鮮鐵道
법인 정보
종류 주식회사
산업분야 철도사업, 자동차운수업, 창고업 등
창립 1923년 9월 1일
해산 1946년 5월
이전회사 조선중앙철도 외 5개사
본사 조선(일본령)→대한민국
자본금 7,200만 엔

조선철도(朝鮮鐵道)는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사설철도 회사이다. 약칭으로 조철(朝鐵)이라 불렸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조선철도 주식회사(이하 조선철도)는 강점기 당시 조선반도 각지에 입지해 있던 사설철도 회사들의 합병을 통해 설립된 사설철도 회사이다. 당시 조선에 있던 6개 회사들이 자금조달의 편의 차원에서 합병을 추진, 1923년 9월에 상당한 난항 끝에 합병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경과[편집 | 원본 편집]

조선철도는 당시 존재하던 조선의 사설철도회사 11개사 중 건설선을 다수 보유했으나 자본 모집의 어려움을 겪던 조선중앙철도㈜, 남조선철도㈜, 서선식산철도㈜, 조선산업철도㈜, 양강척림철도㈜, 조선산림철도㈜의 6개사가 총독부의 행정지도 하에 합병을 단행하여 설립한 회사이다.

당시 1차대전으로 인한 전시호황효과로 자본투자가 활성화되어 있던 차에 조선에서 철도사업 면허를 받아 이를 근거로 사철을 설립하겠다고 면허가 남발되었는데, 이후 1920년에 급격한 불황이 벌어지면서 자본모집이 어렵게되고 사실상 사업의 존속이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사철합동", 즉 사철들을 여럿 묶어서 하나의 기업으로 전환하면 규모가 커지니 자본금의 모집이 용이해지고 동시에 신용도가 올라가 사채발행이나 차입금 확보가 용이해질 것으로 기대를 하였고, 이를 총독부와 보조금 등의 행정지원을 교섭한 결과, 1923년 9월에 합병을 완수하게 되었다.

사업내용[편집 | 원본 편집]

조선철도는 당시 가장 방대한 철도망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설립 시점에서 사철 노선의 60% 상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대 사업자였다. 따라서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국철선 다음가는 노선망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국철선이 "선철(鮮鐵)"라 불리우던데 대해서, 조선철도는 "조철(朝鐵)"이라 불리웠다.

철도사업[편집 | 원본 편집]

합동 각사가 가지고 있던 노선들은 조선철도가 대부분 그대로 인수하였고, 건설면허선 또한 함께 인수하였다. 이에 따른 노선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합병당시 현황[1]
피합병회사 노선명칭[2] 구간
()는 미개통구간
개통연장 미개통연장 총연장
조선중앙철도 경동선(慶東線) 대구 ~ 학산
서악 ~ 울산(~ 동래)
(울산 ~ 장생포)
92.0mile
(≒148.06km)
39.7mile
(≒63.89km)
131.7mile
(≒211.95km)
충북선(忠北線) 조치원 ~ 청안(~ 충주) 29.0mile
(≒46.67km)
28.6mile
(≒46.03km)
57.6mile
(≒92.70km)
남조선철도 전남선(全南線) 송정리 ~ 담양(~ 진주) 23.7mile
(≒38.14km)
66.9mile
(≒107.67km)
89.6mile
(≒144.20km)
경남선(慶南線) (마산 ~ 원촌) - 114.0mile
(≒183.47km)
114.0mile
(≒183.47km)
서선식산철도 황해선(黃海線) 사리원 ~ 신천(~ 저도)
상해 ~ 은산[3]
화산 ~ 미력(~ 해주)
(신원 ~ 하성)
(신천 ~ 용당포)
(이목 ~ 장연)
36.2mile
(≒58.26km)
126.3mile
(≒203.26km)
162.5mile
(≒261.52km)
조선산업철도 경북선(慶北線) (김천 ~ 경북안동) - 72.3mile
(≒116.36km)
72.3mile
(≒116.36km)
평북선(平北線) (맹중리 ~ 희천) - 77.0mile
(≒123.92km)
77.0mile
(≒123.92km)
조선삼림철도 함남선(咸南線) 함흥 ~ 오로(~ 후주고읍)
(장진 ~ 만포)
오로 ~ 풍상(~한대리)
풍상 ~ 장풍
17.7mile
(≒28.49km)
256.1mile
(≒412.15km)
273.8mile
(≒440.64km)
양강척림철도 함북선(咸北線) (길주 ~ 혜산진)
(합수 ~ 고무산)
- 205.0mile
(≒329.92km)
205.0mile
(≒329.92km)


조선철도는 한편으로는 건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총독부의 노선 매수로 노선을 뺏기는 형태의 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총독부가 사장 자리에 밀어넣은 이리자와 시게마로(入澤重磨)가 선출되지 않는 등 상당한 분규를 거쳤으나[4], 본질적으로 보조금에 의존하는 당시 사철의 체질 상 결국 유착적인 경영이 지속되었으며, 철도국 출신자 기술진을 끌어오거나[5], 철도국 공무과장을 영입하는 등[6]의 당국과의 인적 연계 역시 상당하였다.

노선구성의 변화[편집 | 원본 편집]

조선철도 노선은 일제당시엔 철도국이 적극적으로 매입하는 대상이 되었었다. 이는 조선철도가 대부분 국철을 대행하여 건설된 노선들이 많았기 때문이어서 간선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철도 노선 중 매수된 노선들은 다음과 같다.

  • 1931년 철도국 인수선

노선을 철도국에 넘기기만 한게 아니라 반대로 다른 사철을 추가 합병하여 인수하기도 하였다. 협궤로 부설된 조선경동철도수인선수려선을 1942년에 매수 합병하여 노선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전시체제 하에서 물류관리의 일원화 및 경영안정화 목적에서 단행된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사업[편집 | 원본 편집]

조선철도는 자동차 사업에서 상당한 사업범위를 가졌다. 조선철도의 방계회사인 조선자동차흥헙주식회사를 모체로 하여 16개의 회사를 투자회사로서 거느리고 있었으며, 전국 여객 버스 사업의 약 6할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7]

기타사업[편집 | 원본 편집]

창고, 온천, 호텔 등의 경영을 실시하였으나, 그 상세는 불명확하다.

보유차량[편집 | 원본 편집]

1927년 시점의 보유차량은 기관차 51량, 객차 114량, 화차 485량이었다. [8] 차량구성은 노선에 따라 협궤와 표준궤 차량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사업 성립 이후 꾸준히 동차나 기관차를 신조 도입하는 한편으로, 철도국 인수로 인해 차량을 인계하는 등 꾸준히 그 차량구성이 변화하였다. 특히 차량중 협궤선 쪽은 철도국 인수로 폐차가 발생하는 와중에도, 1930년대에 대대적인 신조 기관차를 도입하여 독자적인 차량형식을 구비하고 있었다.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조선철도는 전시체제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노선망을 철도국에 넘겨주고 사실상 황해도 지역의 노선망과, 충북선, 구 경동철도선 정도만 남은 수준이 된 채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그 임원으로 조선인을 선임하는 등 생존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군정청은 조선철도의 통일 명령으로 조선철도의 노선망을 당시 교통부(이후의 철도청)로 수용하였으며, 기타 사업은 교통부 인수 후 정리되어 민간에 불하됨으로서 해체되게 된다.


각주

  1. 위키백과. '조선철도' 문서의 '합병당시 현황' 표 인용
  2. 조선철도가 정한 노선명칭이며, 합병 이전에는 정식 노선명칭없이 (회사이름)선이라고 불리는게 일반적이었다.
  3. 상해 ~ 은산간 철도는 미쓰비시 제철이 경영하던 것을 1920년 4월에 서선식산철도가 매수한 것이다.
  4. '조철사장문제'. 동아일보 1923년 12월 27일 보도.
  5. '조선철도의 적극적 건설'. 동아일보 1927년 11월 20일 보도.
  6. '사채차체와 자금충실 조철의 적극방침'. 동아일보 1928년 2월 3일 보도
  7. 철도청(1977). "한국철도사", 제3권. pp.381-382.
  8. 朝鮮鐵道(1927). "朝鮮鐵道株式會社業務統計書", 昭和2年上期. pp.4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