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원

북한 원
Chungangeunheng NK.jpg
중앙은행 CI
화폐 정보
사용국 북한
ISO KPW
기호 [1] (KP₩)[2]
보조단위
1/100 전 (Chon)[3]
지폐 ₩5, ₩10, ₩50, ₩100, ₩200, ₩500, ₩1000, ₩2000, ₩5000
동전 ₩5, ₩10, ₩50, ₩100, ₩500, ₩1000
(사실상 비통용) 1전, 5전, 10전, 50전, ₩1
중앙은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은행[4]
인쇄처 (외주 추정)
조폐국 (외주 추정)
환율 약 5,100원/US$ (2021.10.29 시장값)
1,050원/USD※사용하지 않음 (2015년 공식값)
100원/US$ (간이 환율)[5]

조선 원kp, DPRK Won/North Korean Wonen[6]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북한 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법정 통화이다.

남한에선 대개 "북한 원"이라 칭하지만, 북한이 스스로의 국호로 "북한"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므로, 공식적 약칭은 "조선 원"이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돈으로 혼동할 여지도 있겠으나, 일상적으로도 "내화 ○원"이나 "조선 ○원" 등으로 부르고 있으니 실제 혼란의 여지는 낮다. ("공화국 원"이나 "인민 원" 등으로 칭하지는 않는다.)

다만 본 문서에서는 아무래도 문화어 화자보다 표준어 화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므로, "북한 원"으로 가급적 통일하여 서술한다.

환전 및 사용[편집 | 원본 편집]

베일에 싸인 국가라는 별명처럼, 발권은행인 조선민주주의인민중앙은행도 거의 비공개 상태인지라 북한 원화의 통계 자체를 잡을 수가 없다.

북한 원화는 당에서 북한식 사회주의 경제 특수성을 이용하는 목적으로 만든 통화라[7] 원칙적으로는 환전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외국인이 절대 쓸 수 없는 것은 아닌데, 장기 체류하는 신분이 아닌 이상은 근본적으로 구하기가 어렵다. 뭣보다도 환전을 하려면 옆을 계속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안내원부터 멀찍이 떼어놔야 한다(...)[8] 그렇다고 인근 국가에서 북한 원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이는 북한돈이 무역용 화폐로 쓰이질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예 안 퍼지는 것은 아니다. 주로 빳빳한 신권들은 그 자체를 상품(商品)으로서 중국과 홍콩 상인으로부터의 수요가 조금은 있기에 자주 유출되었고, 이 경로를 통해 해외로 퍼져나갔다.[9] 중국 베이징, 센양 등은 몰론, 국경도시인 단둥이나 지린과 같은 곳에서는 특히나 기념품으로 내놓은 것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중국 바깥에서 출몰하는 북한 원화는 주로 이런 경로를 타고 온 것이다. 이후 북한 당국에서도 외화벌이를 위해 작정하고 기념품이나 재판본을 찍어서 수출한 경력이 있기에, 생각보다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10] 다만 한국에서 구하기는 조금 까다로운 편인데, 정말로 갖고 싶다면 이베이를 이용하거나 한국은행 인근의 화폐상 등지에 들러보자. 북한 돈도 위폐가 있을까 의문스럽겠지만, 은근히 중국산 위폐가 있기는 있기 때문에(!), 가급적 단둥 길거리 등지에 세트로 모아놓은 것 같은 건 구매하진 말자.

행여나 북한 돈을 소지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는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현행법상 단순 소지만으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용하게도 관봉을 구해다가 북에 도로 뿌리는 단체도 있는 마당에 전 국민을 상대로 전수조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만 인터넷 등에 자료를 게재하면 다소 의혹을 받을 수는 있고, 할 일 없는 담당과에서 소환을 요구하는 사례도 없지는 않으니 너무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긴 하다. 이와 관련된 법원 판례도 존재하는데, 요약하면 북한 상인에게 직접 대금을 주고 직수입한 것이 아니라면 위법 사유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여튼 그리하여 외국인은 북한에서 주로 미국 달러, 중국 위안[11]을 사용한다. 기존에는 외화와 바꾼 돈이라 하여 태환권이 있었으나 2002년 7월의 상징적 고정환율제 폐기 이후로 서서히 사장되어, 현 시점에서는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달러와 위안 외에도 일본 엔이나 유로, 영국 파운드같은 것이 쓰이기도 하는데, 2014년경 부터 적극적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정책이 시작되면서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어째 점점 아프리카의 모 나라와 닮아가는 것 같다 다만 북한에 체류비자를 받아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멀쩡히 조선돈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현지인과 마찬가지로 구매 장소나 목적에 따라 외화를 적절히 섞어서 쓴다.

환율 추이[편집 | 원본 편집]

공식적으로 조선중앙은행에서 발표하는 환율이 있지만, 실제로 이 가격을 신용하는 사람은 내국인을 포함하여 아무도 없고, 시장환율(장마당환율)을 절대 신뢰하고 있다. 덧붙여 동년도(2015년) 기준으로 9,000원(KP)/USD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별도로 조선무역은행에서 발표하는 무역환율이 존재하는데 2010년대 들어 무의미해지고 시장환율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으며, 중국산 쌀 가격에 쉽게 좌우되는 편이다. 이 장마당환율은 데일리NK 홈페이지에 자주 업데이트 되고 있으니 관심있으면 참고하길.

2020년 세계적 유행병이 큰 위협으로 느낀 것인지 그간 적극적으로 달러를 갈취벌어오던 상황과는 반대로 완전한 쇄국[12]을 시행하였고, 내외국인 가리지 않고 북한 내의 모든 거래에서 외화 사용을 사실상 전면 중단시켰다. 그렇게 대내외 무역길이 완벽히 막혔으니 자연스레 생필품 물가는 폭등, 달러의 인기는 급감하여 환율도 동년도 10월 후반에 8,000원/$가 깨진 것을 시작으로 20% 가까이 크게 떨어졌다. 내화로 저축하다가 화폐개혁으로 망한 사례는 있어도 외화 저축이 되려 독이 되버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지라 평양 민심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이에 분노한 김정은이 환전상을 본보기마냥 처형시키는 등으로 진화[13]에 나섰다.

2021년에도 유행병이 잦아들지 않고, 북중미 갈등에 대북경제제재까지 덮쳐서 달러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2021년 정초무렵엔 이미 6천원 미만으로 낮아지고, 10월 말에는 5100원을 기록하여 향후 5천원/USD 선 마저 위협하고 있다.

특성[편집 | 원본 편집]

조선돈 속도 (급진적인 화폐개혁)[편집 | 원본 편집]

북한 원은 2017년 현 시점까지 2차례의 디자인 변경과 2차례의 통화개혁(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였다. 통상적으로 단위값이 변경되는 화폐개혁을 단행하면 ISO 4217 코드도 바뀌기 마련이나, 1차 개혁 당시는 50년대라서 그렇다 쳐도, 2차 개혁때(2009년) 조차도 북한 원의 코드가 바뀌지 않은게 의아하다. 시스템이 막장인데 바꿀 필요까지 있을리가.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권을 내놓으면 짧아도 1~3년 정도는 교환을 위해 유예기간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14] 반하여, 위대한 쑤령님께선 언제나 게릴라급으로 내놓고는 딱 1주일 가량의 여유만을 주셨다. 교환기간 이후에는 얄짤없이 완전 폐기크리.

보통 이렇게 빡빡한 규정을 들이미는 경우는 위폐가 급격히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나 은닉된 현금(지하경제)을 축출하기 위한 초강수인데, 그걸 한 번도 아니고 4차례나 똑같은 만행을 벌였다. 때문에 북한 원화의 신용도는 내국인들에게 조차도 외면당하는 신세이고, 외부기관에서는 더 이상 신용도의 측정 자체를 하지 않는 정도로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 취급을 하고있다.

애매한 통화 가치[편집 | 원본 편집]

앞서 언급한 신용도 문제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쓸모없는 통화에 자주 거론되는 것이 이 북한 원화이다. 이것보다 더 쓸모없기로 정평난 것이라곤 끽해야 소말리아 실링 뿐일 정도이다. (다만 이는 주변 국가들이 워낙 잘 나가는 것에 대비되는 작용도 들어가있긴 하다. 저명도가 희박한 통화들은 예외로 친다.) 심지어 이라크 디나르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 짐바브웨 달러조차도 북한 원보다는 원활히 유통되고 있고, 비슷한 사정인 쿠바 페소나 가치폭락으로 고생하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이란 리알 조차도 북한 원에 비하면 가치가 명확하다.

이렇게까지 대우가 안 좋은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북한 원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인데, 북한 자체에서 엄격한 쇄국정책을 펴는 것도 그 이유이고, 그렇다고 딱히 북한산 상품의 수요가 많은 것도 아니고, 국제적 교류활동도 희박하기 그지없으며, 무엇보다도 나라 자체의 경제 및 정세가 불안정하고 정치성향 자체가 지나치게 호전적이라 이 나라에 무언가를 투자하기엔 불안감이 너무 큰 데다가 국제깡패 미국에게 심히 적대적인 문제까지, 온갖 투자 디메리트를 명절선물세트마냥 알차게 꾸려놓아서 외국인 그 누구도 안전한 통화라 여기지 않는 까닭에 있다. 본국 현지인들도 꺼려하는 마당에[15] 뭐... 당연한 결과지만.

대개 북한 원 만큼이나 인플레가 불안정하거나 국제신용도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아예 해당국 경제부서에서 자국통화를 임시로나마 폐지하는 방향[16]으로 노선을 잡는데, 북한 당국은 찰거머리처럼 그 존재를 내려놓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시장경제체계 자체를 거부하는 북한이 명목이라도 시장경제의 상징물을 채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배급제마저 중단한지라 돈을 만들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고 만 것. 이런 현실은 사실상 개점휴업중인 국영상점의 공시물가와 장마당 물가의 괴리감에서부터 바로 드러난다. 예로 2010년 5차 통화개혁 직후 쌀 1kg가 국정가격은 44원, 장마당가격은 1,000원에 달했다. (양쪽 모두 신권 기준) 그 이후 장마당 쌀가격은 당연하듯 폭등하여 2015년에는 6~8천원선까지 상승한 상태.

또한 이 애매한 가치에 대해서는 김정은 시대부터 급격히 늘어난 외국인 도촬 촬영 영상에서 짐작할 수 있다. 2015년 평양 기준, 국영상점에 가까운 성격인 이딸리아 료리식당에서 전량 수입품으로 만드는 '삐쨔' 한 판에 700원~1,000원정도 하는 것에 반해[17] 길거리에서 사먹는 조선 김밥 한 줄이 2,000원에 달하는 비상식적인 물가를 보여준다. 조선제는 품질이 비상식적으로 좋은 모양이다. 그런데 더 괴상한 건, 공식 지급되는 로동자 월급도 1만 단위를 잘 넘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한의 통일부한국은행이 북한 원화의 가치평가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통일이 이뤄진 이후 통일비용이 얼마나 될 것이며, 남한 원화와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시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서독동독의 통일 과정에서도 자칫 통일이 도로 깨질뻔한 이유 또한 환율값이 고작 3:1의 차이에 불과했음에도 불구, 동독 마르크를 잘못 다뤄서 동독의 대규모 몰락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북한 원의 끝없는 추락은 재앙에 가까운 난제라 할 수 있다. 혹자는 남한이 주도적으로 통일할테니 패배국 취급하듯 모두 무효로 처리하면 간단하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남한이 북한 2천만 주민을 모두 식민지 주민으로서 수용하여, 그 관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과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그것 나름대로 대재앙이다.

의외로 산재한 위조지폐[편집 | 원본 편집]

기본적으로 북한 원화는 외부 반출이 허용되지 않은 돈이고, 북한 스스로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지라 그 발권은행인 조선중앙은행이 예금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시행하는 한편, 행정부(조선로동당)의 간섭이 매우 심하여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까닭에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확히 어디서 조폐하고 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기계를 수입하여 자체적으로 찍어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질이 판번호에 따라서도 차이점이 보일 정도로 균일하지 않고 들쑥날쑥한 편.

김정일 시대까지는 중국 단둥으로 유출되는 물량이 제법 되어서 '누가 이런 걸 위폐로 만드나'싶을 정도로 유통량이 많았는데, 2009년 개혁을 거쳐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부터는 새로운 외화벌이로 각광받은 것인지 조선중앙은행에서 직접 기념 첨쇄를 찍어다 수출하게 되어서 유통권은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18] 이를 노리고 (주로)중국에서 자체 제작(?)한 짝퉁 조선돈이 관광객이나 대(對) 외국 판매용, 한국인 사업가에게 사기거래로 넘겨져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다만 그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거의 파악되지 않고 있다. 특히나 북한 스스로가 정보제공에 매우 폐쇄적이고, 남한에서도 북한 원화 소지를 암묵적인 사회 룰로서 매우 금기시 하고 있기 때문에, 위폐구분방법 등의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찰 시리즈[편집 | 원본 편집]

동전[편집 | 원본 편집]

북한 동전은 건국 초기 당시, 천리마 운동을 업고 산업 활성화가 막 진행되려던 1959년에 기존 소액전 지폐(15전, 20전, 50전)를 대신하는 3종 구성(1전, 5전, 10전)으로 시작하였다. 세 동전 모두 앞면에 국장, 뒷면에 액면을 넣은 간소한 모양으로 찍어내었다.

그러다 1978~1979년 재정비를 위한 신권 발행 당시 50전 지폐를 대신할 50전 동전이 추가되어 4종 구성(1전, 5전, 10전, 50전)이 되었다. 다만 이 50전 동전은 다른 세 동전과 달리 국장과 액면을 앞면에 몰아넣고, 50년대부터 진행된 천리마 운동의 성과를 과시하려는듯 천리마 동상의 모습을 뒷면에 큼지막히 찍어내었다. 이후 1987년에 인민대학습당을 넣은 1원 동전을 추가하여 5종 구성이 되었다.

2002년에는 명목상으로 유지하고 있던 환율(2.14원/USD)이 폐지되면서 북한 원화의 가치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신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고액권 지폐(5천원까지)가 발행되면서, 원래 교체 목적으로 찍어두었던 10전(진달래)/50전(김정일화)/1원(김일성화) 주화 신권의 발행이 2009년(제 5차 화폐개혁) 이후로 미뤄졌다. 기존 천리마 50전 주화와 비슷한 사양으로 하되 뒷면은 모두 꽃을 한 송이씩 담아내었다. 다만 채고조넘의 이름이 들어간 50전과 1원에는 각각 불멸의 꽃이라는 수식어를 추가로 덧붙였다(...) 2008년에 1전(철쭉)과 5전(목란)도 마찬가지로 꽃으로 바꾸어 찍었으며, 이 또한 2009년 개혁 이후에 처음 배포되었다.

그 사이 2005년에, 그 북한의 신 경제정책이 효과가 거꾸로 들었는지 대미 북한 원화 시장 환율이 끊임없이 올라가 김일성이 들어간 돈[19]이 아니면 쓸데가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고, 때문에 푼돈의 기준도 달라져서 5원/10원/50원/100원 네 종류의 지폐를 대신할 동전을 급하게 발행하였다. 기존 전화 동전들처럼 국장과 액면만 덩그러니 찍힌 단순한 모양의 값싼 알루미늄화이다. 허나 이 당시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북한 원화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기어가고 있던 탓에 제대로 유통되지는 못했으며, 2009년 개혁과 함께 유통 중단 조치되었다. 하지만 조치된 사항과는 별개로 실제 유통은 암암리에 이루어졌고, 2020년대에 들어선 되려 고액권인 500원화 및 1000원화가 동일한 패턴으로 추가 발행되었다.

김정일 후반/ 김정은 시대 : 5차 발행 (2009 ~ )[편집 | 원본 편집]

2009년 11월 30일에 도입되어 동년도 12월 6일에 대체가 완료(?)된 현행권. 교환 비율은 1/100 ~ 1/1000 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자금회수를 목적으로 한 탓에 너무 혁명적(?)으로 진행되어서 전 세계에 북한의 막장행보를 광고하는 꼴이 되었다.

조금 상세하게 쓰면 처음 교환시 세대당 구권 10만원의 제한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예금해야 했었으나 이미 주민들이 4차 개혁(1992년)때 보기좋게 당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서[20] 갖은 수를 써서라도 예금만은 피하려 했었다. 당국도 이런 현상을 재빨리 파악하곤 1인당 5만원 추가교환을 허가하였다. 이 정도면 잉여재산이 거의 없는 일반 가정에선 그래도 별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으나[21] 평소에 예금을 불신하던 일반 상인계층에겐 여전히 어림 반푼 없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북한 당국은 강제로 구권유통을 금지시켰고, 장마당을 불법으로 간주하여 모조리 폐쇄시키는 바람에 열심히 모은 재산이 모두 휴지가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 수많은 장마당 상인계층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결론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몰론 인간존엄이고 사회도덕이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에 먹을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게 문제. 근본적으로 국영시장에 풀린 식량만으로는 도저히 모든 인민들을 먹여살릴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마당 시장이 활성화 된 것인데[22] 강제로 장마당을 몰락시켰으니 말 그대로 진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자 당국에선 부랴부랴 김대장하사금도 뿌리고 임금도 100배나 인상하여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였지만 그래도 민심이 사그라들지 않자 결국 1~2달만에 로동당이 직접 사과를 하고 통제를 푸는 등의 패배선언(실패선언)을 하고 만다.

Choseon 5th Series (2009)
5원 인민공돌이의 과거와 미래 과학자와 대학생 10원 조선인민군 3군 (공/해/육) 50원 인민 3대 로동계층
Nokwon501.jpg파일:2002-5won-2.jpg Nokwon502.jpg파일:2002-10won-2.jpg Nokwon503.jpg파일:2002-50won-2.jpg
수력발전소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공식명칭) 조선로동당 창건기념탑
100원 목련화 (목단)[23] 200원 천리마상 (평양) 500원 개선문 (평양)
Nokwon504.jpg파일:100 вон КНДР.jpg Nokwon505.jpg파일:Nkorea08-200b.jpg Nokwon506.jpg파일:500 вон КНДР-р.jpg
(뒷면 도안없음)
1,000원 김정숙 생가 2,000원 백두산 비궁 (김정일 생가)[24] 5,000원(구권) 김일성
Nokwon507.jpg파일:Nkorea08-1000b.jpg Nokwon508.jpg파일:2000 вон КНДР.jpg Nokwon509.jpg파일:Nkorea08-5000b.jpg
삼지연 백두산 천지 만경대(구권)
50,000원(2022년 임시화폐) (돈표)" | 5,000원(2021년 임시화폐) (돈표) 5,000원(신권) 만경대
Nokwon510.jpg파일:2013 - 5000won-2.jpg
국제친선관람관(신권)
  • 왜 돌연 5천원권에서 김일성 초상을 빼버렸는가에 대해 추측만이 나돌고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북한 원화의 가치하락으로 험하게 쓰여지면서, 덩달아 김일성 초상화가 찢기고 더렵혀진 채로 곳곳에 나뒹구는 꼴을 보기 불편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 시리즈에 각종 선전문구를 담은 도장이 찍힌 기념권이 존재하는데, 정말로 기념해서 발행했다기보다는, 중국발 수요를 맞추고자 불법유출 대신 수출시킨 통화로, 북한 국내에서 통용되지 않도록 식별의 목적으로 찍은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반 일련번호 권종에 찍힌 '견양'도장 또한 그런 의도라는 것. 워낙 대량으로 유출된 탓인지 이쪽은 거의 염가로 팔려나가고 있다. 그 문구들의 종류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등장순)
    • 견본
    •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탄생 100돐 (1912-2012) / 전 권종 (구형 5000원권 포함)
    • 조선로동당창건 70돐 기념 / 5000원권
    •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 탄생 100돐기념 (1917-2017) / 5000원권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70돐 (1948-2018) / 50, 200, 500, 1000, 2000원권
    • 조중외교관계설정 70돐 (1949-2019, 中朝建交70周年) / 5000원권
      • 후술할 3차 및 4차 발행권과는 달리 5차 발행권은 위 기념문구를 박아넣은 가짜 아닌 가짜 지폐 말고는 씨가 말랐나 싶을 정도로 유통화=통용권[25]을 구하기가 어려운 편인데, 이는 그동안 북한 돈이 외부로 유출되는데 있어 북한 내부 고위층과 중국계 홍콩 셀러들이 맞장구치는 공이 컸기 때문이다. 나름 그럭저럭 호형호제를 외치긴 하던 2000년대까지와는 달리 2010년대의 북중관계는 어딘가 떫떠름한 관계가 지속되어 홍콩 셀러들의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고, 특히 북한쪽에서 유통화 유출을 철저하게 관리하게 된 까닭에, 유입단계부터 말라 비틀어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는 2021년에 발행된 돈표가, 2년이 지난 2023년에도 구경조차 힘든 것으로 간접증명을 하고 있다.
  • 2021년 9월 경에 태환권과 유사한 형태의 5천원권[26]을 찍어낸 것이 밝혀졌다. 다만 기존에 있던 '외화'라는 표현을 삭제하고 단순히 "돈표"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대외무역환경이 매우 열악해지자 상대적으로 쓸모가 줄어든 외화들의 값이 반값으로 주저앉았고, 이 틈을 타 주민들의 외화보유량을 늘리게 될 것을 정부측이 우려한 것인지, 외적으론 외화가치의 안정을 국가가 보증하는 수단, 내적으로는 달러를 국고로 긁어오려는 목적으로 다시 찍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한편으로 동년도 10월 경부터는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로 인해 은행용지 수입에 차질을 빚자, 북한 국내산 용지를 사용하는 돈표 그 자체를 화폐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2003년 이전 사담 후세인 정권 말기의 이라크 디나르의 행보와 같다. 그러나 그 '돈표'마저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이듬해 4월 6일 전후로 신 고액권인 5만원권(!)을 내놓았다.
 발권은행 정책에 따라 폐기되거나 시중에서 사용이 중단되어, 국내외 환전도 할 수 없는 통화입니다.
 해당 국가 방문시 현금거래 중 받지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김정일 시대 : 4차 발행 (1992~2009)[편집 | 원본 편집]

김일성의 말년기인 1992년에 시행된 화폐개혁의 골자는,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말년기인 2009년에 시행된 화폐개혁과 판박이로 닮았었다. 작정하고 재정회수를 위해 자행한 화폐개혁은 이때가 시초이다. 당시 구권과의 교환비는 1:1로 고시하였으나, 실제 교환 시 1인당 399원까지[27]만 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전량 은행으로 강제 저금시켰다. 그리고 주민들은 그 돈을 다시는 구경할 수 없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김일성과 김정일, 둘 다 화폐개혁 시행 후 2년 뒤에 사망한[28] 공통점이 있다.

북한 이외 지역에서는 오히려 현행권(5차)보다도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리즈인데, 이 때는 북한이 겉으로나마 남측과 화해모드를 열었기도 하거니와, 외화벌이 목적 추정으로 북한에서 홍콩 셀러를 통한 통화 유출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2002년에 시행된 새로운 외환법의 영향으로 기존의 태환권이 사라지고, '조선돈(내화)'의 통화량이 급격히 팽창한 것도 유출량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의 북한은 점점 소련(동유럽)의 지원이 줄어드는 와중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정책과 부패하는 사회 시스템과도 싸워야 했다. 거기에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남한이 주류 세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나타나자 김일성은 속으로라도 성과에 안달을 내기 시작하였고, 그 눈치를 보는 지배 계층은 과대 포장된 성과로 달래었으며, 수뇌부는 다시 그 과대 포장된 성과로 이어지는 무리한 계획을 짜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살벌한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어진 지배 계층은 정직하게 살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기에 횡령으로 연명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당연히 그 부작용은 생산계층으로 떠넘겨져 불안정한 배급과 공급으로 인해 생산 동력을 잃어버렸으며, 그 결과는 경제적 파국이었다.

1994년 7월 정치적 지주인 김일성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김정일이 수장이 되었는데[29], 김정일은 1970년대부터 북한 정치판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공포정치(선군정치)를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95년부터 3년 정도 대규모의 홍수와 가뭄이 들어 농업 전반을 망가트렸는데, 애당초 소련의 붕괴 때문에 압도적인 화력에 눈이 돌아간 정황상 경공업 투자에 소홀했던 환경까지 겹쳐, 나라 전체가 극심한 식량 부족 상태에 빠지고 만다. 배급은 완벽히 중단되고 도리어 물자를 바쳐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로동자 월급조차 노동의 산물을 일부 받는 현물 지급으로 바뀌어 장마당(시장경제)가 강제로 활성화 되면서 북한 원의 가치는 철저한 시장원리로 결정되어, 이윽고 큰 가치 폭락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이 시기 전후로 태어나거나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단 한 번도 국가 배급을 받아본 기억을 갖고 있지 않는 세대를 '장마당 세대'라 하며, 이들은 겉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따르면서 속으로는 자본주의에 철저히 물들여진, 북한 수뇌부로서는 잠재적 폭탄으로 작용하게 된다.

사회주의경제가 작동하지 않자 기존의 100원권(1998년 기준 500원권)[30] 만으로는 화폐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며, 때문에 남한과 기존 제1세계로부터 지원을 받아서라도 급한 불을 끄고자 하는 방향의 정책이 수립되어, 2002년 정초에 경제 정책도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급하게라도 고액권(1천원/5천원)이 인쇄되었고, 외화 상점의 개념이 새로 들어섰으며, 구매권[31] 제도도 이 때 도입되었다.

김정일 시대의 조선돈
1원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 (홍영희)
5원
학생과 지구본평양의 모습에 시민
10원
로동자, 천리마동상,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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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과 선녀 인민대학습당 (평양)[32] 서해갑문
50원
3대 로동계층과 주체사상
200원
목련 (목단)
500원
금수산태양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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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풍경 (도안없음) 금릉 제 2 터널과 청류교
100원/1,000원/5,000원 -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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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대 (김일성 생가, 평양)
  • 1992년 최초 발행때는 100원권이 최고액면이었다. 500원권은 1998년에, 1000원권과 5000원권은 2002년 7월 1일 신 경제정책 개혁으로 거래량이 늘어날 것을 감안하여 찍어낸 권종이며, 중간액면인 200원화는 2005년에 새로 추가되었다.
  • 1998년에 5원권과 10원권은 신판본(위 표의 사진)으로 나왔다. 그러나 급하게 찍은 것이 드러날 정도로 구판(1992년)에 비해 인쇄질이 떨어진다. 다만 북한 조폐국의 기술 자체가 빈말로도 썩 좋다고 못할 수준이다보니, 직접 비교해보지 않는 이상은 눈치채기가 어렵다.

김일성 시대 : 2차/3차 발행 (1959~1992)[편집 | 원본 편집]

1959년 2월 13일부터 동월 17일까지, 공식적인 '중앙은행'이 발행한 신권(2차)으로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직전 구권와 교환비는 1/100이다. 해당 권종은 완전히 내수용으로만 배포되었고, 조중무역이 활발하던 시기도 아니였어서 유출량 자체가 적은 탓에, 잔존수량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하물며 1차 권종(구권)은 북한 당국에서 아예 재판본(리프린트)을 찍어 판매한 전적까지 있으나, 이쪽은 건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960년대의 북한은, 비록 복구 작업이 필요하긴 하나,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마냥 기본적인 공업 시설이 잘 갖춰진 상태에서 소련의 지원[33]까지 듬뿍 받은 덕택에, 대략 1985년 무렵까지 경제적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거기에 인민의 로동력을 전체주의로 버무린 사상으로 쥐어짜는 혁명적인 정책까지 더해져, 북한의 경제성장 속도는 그 이름값처럼 빨랐다. 동시기의 남한은 기반산업시설이 전무하여 그야말로 극도로 빈곤한 농업국가에 불과하였고, 하물며 중국 접경지인 단둥 및 지린에서도 모(毛)씨의 삽질과 더불어 개발이 뒷순위로 크게 밀려있었던 탓에[34] 극도의 빈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말로 먹고 살기 위해 북한에게 손을 벌렸었던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훗날 북한이 조중 접경지역에서 아무리 막장 짓을 저지르더라도 중국 측이 쉽게 내치지를 못하는게, 과거에 북한으로부터 도움 받던 시절을 기억하는 계층이 아직 살아있어서 반발심을 우려하기 때문(=한화(漢化)가 덜 이루어졌다)이 아니겠냐는 견해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후 1979년 4월 7일부터 동월 12일까지 다시 신권(3차)으로 교체가 이뤄졌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아무 이유 없는 신권 발행이다. 다만 전반적으로 천리마 운동이나 혁명등이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어, 아마도 정권 홍보(+우상화) 및 사상 굳히기를 목적으로 바꾼게 아닐까, 정도로는 추측할 수 있다. 김일성의 초상화상판대기가 이때 처음 등재되었다.

참고로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북한 로동자 월급은 평균 100원 이내, 동시기의 남한 원화로 치환하면 약 5만원 정도이며, 남한의 일반적인 비숙련 노동자와 거의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 당시 북한에서의 '월급'은 사회주의경제 특성상의 배급과 별도로 지급되는 잉여재산 재분배에 가까운 개념이었던 반면, 남한에서의 '월급'은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의식주까지 해결해야 하는 근로성 댓가에 가까웠고, 심지어 당시 남한은 직군별 소득 격차가 매우 큰 편[35]에 복지 환경까지 극단적으로 갈린 편이었던 탓에, 소수의 부유층이나 실질적 기득권층[36]을 제외한 대다수의 생활 쾌적도는 여전히 북한보다 한참 미치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이런 양상은 북한이 국가총소득 이상의 지출을 감행하고 있었던 탓도 있어, 1985년 전후부터는 서로의 상황이 급속도로 역전되어갔다.

1988년 경, 냉전이 끝나갈 무렵의 북한은 본의가 아니더라도 자립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음을 깨닫고, 세계청년학생축전(1989년 개최)과 같은 국제 행사를 의욕적으로 계획하면서 본격적으로 외국인 및 외국 자본을 맞이할 준비[37]를 하였다. 그 일환으로 외화태환권(※외화와 바꾼 돈표)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며[38], 실질적인 환전 업무의 개념도 이때에 처음 대두되었다. 미세조정이 가능한 계획고정환율제였고, 그 값은 (자본주의 돈표 기준으로) 2.18원/USD으로 책정하였다. 다만 이게 실제 시장물가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로 책정한 것이라 그 값이 거의 움직이지를 않았고, 격동의 1990년대를 보내면서 점점 실제 가치와의 괴리가 벌어지다보니, 2002년 7월에 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진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여행객들의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쿠바처럼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화폐로 바꾸어 받는 '돈표'와 자본주의 국가 화폐로 바꾸어 받는 '돈표'가 구분되어 있었고, 기타 특수 목적으로 제공하는 '돈표'도 따로 존재하였는데, 이는 각 돈표들을 구매하는 환율값이 달랐기 때문으로, 각 돈표들의 가치 자체는 모두 동일하다.[39]

김일성 시대의 조선돈
2차 발행분 (1959 ~ 1978) 3차 발행분 (1979 ~ 1992)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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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비료연합기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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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혁명의 요람 만경대 고향집[40]

쌀 수확하는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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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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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그리고 인민 4대 계층 (군인/농부/노동/정치)

개마고원 호수

과일 수확하는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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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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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 동상 (평양)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남포)

(도안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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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종합대학
5원
공업도시의 학생과 농가처녀

금강산

Nokwon202.JPG고기잡이 배 1원 KPW301.jpg
나팔부는 소년, 꽃 든 소녀, 정복 입은 청년, 후프 든 체조선수, 평양거리, "세상에부럼없어라" (선전문구) 확실히 부럼이 없긴 하지.

혁명가극「한 자위단원의 운명」의 청년 &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의 주인공 꽃분이 / 혁명가극「피바다」의 여성 & 평양거리
Nokwon201.JPG 50전 (미발행)
  • 이때부터 한자표기가 완전히 사라진다.
  • 저액권과 고액권의 크기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인데, 특히 2차 발행분의 100원권은 거의 A5크기와 맞먹는 정도로 큼지막하다.

건국 초기 (0/1차, 1947 ~ 1958)[편집 | 원본 편집]

김일성 및 추존 세력(북조선로동당)에 의해 1948년 9월 9일에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한반도는 두 이념로 갈라선 채 실질적으로는 분단 상태였는데, 이는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이 외세에 의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당시 남측은 미군부가 관리하였었듯, 북측은 소련군부(일명, 붉은군대 사령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당시 북측의 소련군은 조선은행을 장악하여 '계산실'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곤 임시화폐 성격의 지폐 4종(1, 5, 10, 100원)을 발행하였다. 뒤이어 1946년 1월 9일에 자본금 1억원(※조선 원화)으로 소련군부가 통제하는 중앙은행이 설립되었으나, 당시의 복잡한 정세상의 이유로 기존의 조선은행권을 취급하는 민간 기반의 농민은행도 같이 나타나, '붉은군대 사령부'의 화폐와 '조선은행권'이 동시에 통용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경제 이론에 따라 자본의 공공재화 과정의 일환으로 1947년 10월 29일부로 북측 정당이 꾸린 내각이 중앙은행의 전 권한을 이양받았고, 1947년 12월 6일에 본격적으로 중앙은행이 설치되면서 임시화폐와 조선은행권 양쪽을 모두 대체할 첫 공식 통화(1차)가 발행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남북분단이 확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조선중앙은행(北朝鮮中央銀行)'으로서 개업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고 남북분단이 확실화 됨에 따라 정통성을 주장하고자, 1958~1959년 농민은행을 통합하는 안건이 포함된 통화개혁에 맞춰서 '북(北)' 부분을 떼어버리게 된다.

건국 초기의 조선돈
Nokwon100.jpg Nokwon101.jpg
15전 / 20전 / 50전 공통앞면 15전 / 20전 / 50전 공통뒷면
Nokwon102.jpg Nokwon103.jpg
1원 / 5원 / 10원 / 100원 공통앞면

원오 형제

1원 / 5원 / 10원 / 100원 공통뒷면

선조주민

각주

  1. 실생활에서는 생략하거나 '원'이라는 한글을 더 애용하는 편이다.
  2. 남한 원(KR₩)과의 구분을 위한 기호이다. 하지만 정작 북한 내에서 ₩기호를 거의 쓰지 않아서 유명무실하다.
  3. 동전 자체가 사실상 사장되어서 유명무실하나, 일단 법적으로 통용이 가능한 단위이다.
  4. 정식 영문 표기는 Central Bank of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CBDPRK)출처. 내부적으론 약칭인 '중앙은행(The Central Bank)'으로 불리는 듯 하다.
  5. 원화로 표기하고 달러로 받을때, 카드 결제시 등의 환율.
  6. 북한 관련 물품을 취급할 수 없는 이베이 등에서는 남북한을 직접적으로 식별하지 못하게 그냥 'Korea'로 표기하곤 한다. 허나 그런 예외가 아닌 이상은 남한 원(KRW)이 Korean Won의 디폴트이고, 북한 원(KPW)은 앞에 North를 붙인다.
  7. 본래 취지는 국영시장에서 배급 이외의 물건을 거래하기 위한 용도였다.
  8. 예외적으로 북한여행사를 통해 방문한 여행객의 경우엔 백화점 쇼핑 코스에서 북한 원화를 사용해야만 하는 까닭에 1회 한정으로 환전을 허용해주나, 시간이 끝나면 도로 달러로 환원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검사하진 않는 고로 그냥 도로 들고와도 무방한 모양.
  9. 한국에 들어오는 북한 돈 또한 99.9%의 확률로 이런 경로를 탄다.
  10. 특히 2000년대(4차 시리즈 발행 당시)에 유출이 잦아서, 2020년대인 지금도 구권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은 시대(현행권/5차 시리즈)부터는 유통권의 반출을 거의 못하게 막고 있는 탓에 구경하기가 다소 어렵다.
  11. 본래 중국 위안이 통하는 지역은 북중접경지역 한정이었는데, 북한의 2번째 통화개혁(2009년)이 대실패로 끝나면서 대체화폐로 널리 보급되어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주류 화폐가 되었다. 약칭으로 인민폐(런민비)를 줄여서 '민폐(民幣)'라 부른다.
  12. 무역 거래량이 액수 기준으로 97% 가까이 감소하고, 하물며 중국에서 무상으로 지원해 주겠다는 쌀조차도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3. 억지로 추측하자면 환차익으로 인민의 재산을 독식한다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왜 뜬금없이 환전상을 처형시켰는지를 단정하기 어려운 탓에, 단순한 분풀이라는 의견도 있다.
  14. 설령 통용을 중지시켜도 신권으로 교환기간은 충분히 주는 것이 관례이다. 이는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통화의 신용도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15. 부유층은 향유할 소비거리가 없다는 것에서, 중산층은 언제 털릴지 모를 불안감에서.
  16. 에콰도르 수크레 등이 이와 같은 노선을 미리 밟은 바 있다.
  17. 실제로는 공식환율로 치환한 외화(달러)로 받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사실상 9~10배 정도 값인 8천원 가량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18. 그 영향인지, 기념권과 견양권들이 유통권보다 훨씬 염가에 팔리는 기현상이 일어날 정도이다.
  19. 백원, 천원, 오천원
  20. 하물며 그때는 '민족의 태양'이라 불리는 김일성이 살아있었을 때였다.
  21. 4인가족 기준 30만원까지 교환이 가능한 것인데 당시 가구당 잉여재산이 대략 이 수준이었다. 이 값은 당시 시장환율로 환산하면 대략 미국 50달러 정도였다.
  22. 당연하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가격이 훨씬 싼 국영시장에 물건이 들어왔다면 그게 1순위다.
  23. 북한의 국화이다.
  24. 라고 홍보하는 곳. 사실 저곳은 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꾸며놓은 곳이고 실제 김정일은 러시아 출신이라 보는 시각이 절대적이다.
  25. 대놓고 외화벌이로 팔아먹기 위한 것이 아닌, 실제 북한 주민들에게 공급하려는 목적의 지폐.
  26. 같은 시기 환율로 약 미화 1달러(US$1.00)에 해당한다.
  27. 약 4개월분 월급 상당
  28. 김일성은 1994년, 김정일은 2011년에 사망.
  29. 김일성 사후 3년 간은 유훈통치(기존에 남긴 '김일성 교시'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라 하여 원쑤 자리는 명분상 공석이었으나, 실질적으론 김정일 업적 승계 기간으로 활용되었다.
  30. 둘 다 각 시기별 로동자 1개월 월급 상당.
  31. 북한에서 공식 환율 적용으로 외화상점을 내화(조선돈)으로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권리증, 혹은 유가증권 그 자체를 가리킴.
  32. 대략 북한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한다.
  33. 사실 미국과 직접 대치하는 지리적 사정과 1960년대부터 급격히 냉각된 중소관계의 반사효과 때문인 것에 가깝긴 하나, 결과적으로 중앙아시아 다음 수준의 지원력이 들어간 것은 맞다.
  34. 중국 동북지방, 특히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다른 소수민족 자치구들처럼 한족(漢族)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경제적 지원을 거의 않는 변두리(邊境地) 취급을 했었다. 또한 중국과 소련은 궁극적인 이념 자체는 비슷하였으나, 외교적으로 친분은 커녕, 서로가 뒤로 욕하는 악연 라이벌에 더 가까웠다.
  35.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간 소득 차이가 10배 이상은 기본으로 벌어져 있었다.
  36. 하물며 이 때는 아직 민주화 운동이 달성되기 이전(제5공화국(전두환 정권))이다.
  37. 이 부분이 기존 제 1세계와 다른 점이, 갖은 모든 사업을 국가(조선로동당)가 주도한다는 점에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이 자원 많은 북한에 비유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38. 이전에는 기존 은행권(3차) 뒷면에 첨쇄 처리된 권종으로 지급하였다.
  39. 즉, 북한 태환권 1원을 구매하는데 들어가는 중국 위안화와 미국 달러화의 가치가 동일하지 않았다.
  40. 양면의 문구 모두 실제로 쓰여있는 글귀이다. 아무리 지폐에 독재자가 자주 그려진다고 해도 대개 이름만 새겨넣고 끝이지, 이 정도의 미사여구를 붙여주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자기네들도 이상하다 느꼈는지 이후 발행분부터는 이러한 문구가 모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