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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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秉世.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齊).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27년 6월 2일 한성부 회동에서 홍천현감을 역임한 조유순(趙有淳)과 대구 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6대조는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조태채이며, 5대조 조관빈(趙觀彬)은 관중추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백부 조두순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26세 때인 1852년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간 뒤 1859년 32세의 나이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후 사간원 정언,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장령, 집의, 부교리, 사간원 사감, 응교, 홍문관 부응교 를 역임했으며, 사관(史官)으로 발탁 되어 1864년 고종 즉위 후 실록청 도청 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1865년에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1866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뒤 이천부사, 영광군수 등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양주 조씨 가문을 중용했고, 조병세는 중앙에 복귀하여 그해 9월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었다. 1875년(고종 12년) 함경도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환곡과 전세 문제에 대해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도 암행어사(咸鏡道暗行御史) 조병세(趙秉世)의 별단을 보니, 첫째는 각 읍에서 환곡과 군량미를 다 나누어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매우 소홀하니 어느 아문(衙門)의 곡식이건 막론하고 모두 절반은 남겨두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 나누어주는 것은 원래 법 밖의 일로서 혹은 춘궁기(春窮期)에 백성들의 사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허락하기도 한 것입니다. 각 조항의 공적 용도가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다 나누어 주는 것과 절반을 남겨 두는 것을 때에 따라 변통함으로써 적정(糴政)을 완전하게 하소서.

둘째는, 사향(麝香)을 진상하고 그 밖에 다른 약재를 감봉(監封)할 때 약을 심사하면서 본색(本色)은 퇴짜를 놓고 함부로 대전(代錢)을 받는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읍과 진이 지탱하기 어려우니 규정 밖에 토색질하는 것을 모두 엄히 막도록 하는 일입니다. 진상품을 퇴짜 놓는 것은 나라에 바치는 것을 잘하기 위한 데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지만 끝에 가서는 폐단이 생겨 협잡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봉상(捧上)할 때에는 전적으로 맡기지 말고 직접 살펴 감봉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12년 2월 27일자 기사.

1875년 11월 23일 이조참의로 임명되었으며, 1875년 예조참의, 공조참판, 의금부사, 대사성을 잇달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당시 병조참지를 맡았으며, 이듬해 공조참판, 지춘추관사를 역임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과 동지경연사를 맡아 고종의 측근에서 활동했다. 1883년경 의주부윤에 부임한 그는 여러번 사임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병세(趙秉世)는 정사에서 뚜렷한 업적이 있었으나 여러 번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백성들은 그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고 있으며, 또 통상 사무를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때에 교체하여 생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곤란합니다. 당분간 그대로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0년 3월 5일자 기사.

1883년 12월 이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며, 1885년 예방승지에 임명되었고 1886년 진주부사에 부임했다. 그러나 부임 직후 상소하여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므로, 이중칠(李重七)로 대체되었다. 그해 8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887년 예방승지, 도승지에 부임했다. 그러나 그해 4월 27일 승정원의 가출사령(加出使令) 문제가 불거지면서 파직당했다.

전교하기를,


"각사(各司)의 가출사령(加出使令) 문제에 대해 그전에 여러 번 신칙하였다. 승정원(承政院)은 바로 각사를 호령하는 위치에 있는데, 지금 아직도 가출(加出)이라는 명색이 있다고 하니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우선 승정원에서 각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가출패(加出牌)를 모두 회수하고 각각 금지하도록 하라.

지금부터 해당 각사의 당상(堂上)들에게 일체 원래 정한 인원수에 따라 패를 만들어 서압(署押)해서 내주며, 매번 후임을 차출할 때마다 새 패를 만들어 주고 예전의 패는 도로 회수하여 사칭하는 폐단을 막도록 하라.

이와 같이 신칙한 뒤에도 이전 버릇을 그대로 답습하도록 내버려 두는 경우에는 해당 두목을 즉시 일률(一律)에 처하며, 해당 당상은 엄하게 감률(勘律)할 것이다.

이른바 반가(班家)의 하례배(下隷輩)들이 한 패거리를 만든 명색도 좌변포도청(左邊捕盜廳)과 우포도청(右邊捕盜廳),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모두 다 일체 규찰해서 금지시키도록 하라. 즉시 고치지 않아서 소문이 들리는 경우에는 그 주인을 단연코 엄하게 처벌할 것이며, 포도대장과 법사(法司)의 당상들도 엄한 처벌을 모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분부하라. "

하였다. 뒤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병식(趙秉式)을 엄하게 추고하고 도승지(都承旨) 조병세(趙秉世)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4년 4월 27일자 기사.

그해 윤4월 25일 공조판서로 복귀했고, 뒤이어 동지정사(冬至正使) 겸 사헌부 대사헌에 부임했다. 이듬해 8월 16일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889년 의정부 우참찬, 이조 판서를 잇달아 맡았다.그러나 '관방이 문란하고 임명과 추천이 번쇄하다는 이유로 간삭(刊削)[1]되었다.

전교하기를,


"도목 정사(都目政事)는 나라의 큰 정사이다. 인재를 선발하여 격려하는 과정은 정사가 잘되고 못되는 문제에 관계되니 응당 자세히 살피고 또 신중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의 도목 정사는 갓 지나자마자 여론만 떠들썩할 뿐 아니라, 관방(官方)이 문란하고 임명과 추천이 번쇄하니 역시 심히 놀라운 일이다. 그럭저럭 살피지 못하였다고 핑계를 대니 그것도 잘못이지만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것은 또 무슨 의도인가? 나라의 기강과 사체로 보아 그대로 두고 넘길 수 없는데, 입을 다무는 것이 버릇으로 되어 경계하는 말을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으니 역시 한심한 일이다. 그날 사무를 맡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병세(趙秉世)에게 간삭(刊削)의 벌을 시행하라."

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6년 3월 4일자 기사.

이후 대간이 조병세를 유배보낼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나라에 큰 범위의 도목 정사는 한 해에 두 번 있는 것인 만큼 업적을 잘 살펴 승급과 강직을 시키고 선발을 신중하게 하여 공평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전조(銓曹)가 맡은 일입니다.

이번에 도목 정사가 있은 이후에 관리들의 규율이 문란하여 여론이 좋지 못한 것은 전관(銓官)된 자가 잘 살피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혹시 알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 죄를 논한다면, 간삭에 그칠 수 없습니다.

그날 같이 참가한 전관으로서 서로 충고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거의 방관한 사람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 이조 판서(前吏曹判書) 조병세(趙秉世)는 찬배(竄配)[2]하고, 참판(參判) 김종한(金宗漢)은 간삭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야 비로소 이렇게 말하니 대간(臺諫)의 원칙이 이러한가?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26년 3월 6일자 기사.

1889년 3월 28일, 조병세는 파직된 지 20일만에 고종의 특명으로 이조판서로 복직되었다. 이후 한성부 판윤, 사헌부 대사헌, 예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 7일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조병세가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이 답했다.

"나라에서 재상을 두고 적임자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은 나라의 안위(安危)가 매어 있고 고락을 나라와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기가 없으니 내가 옆자리에 두고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적임자를 구하려고 생각한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러하겠는가? 이번의 임명은 마음속에서 특별히 선발한 것이고 역시 여론을 따른 것인데, 이것은 경을 잘 알고 경에게 간절히 기대하기 때문이니 경은 반드시 이 지극한 뜻을 이해하고 사양하지 말 것이며 즉시 일어나 명에 부응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하라."

- 고종실록 고종 26년 10월 7일자 기사.

그러나 조병세가 다시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이 재차 답했다.

"내가 진심으로 하유한 뜻을 경도 의당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편에 부쳐 보낸 글을 보니, 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리저리 그 의도를 궁구해 보았지만 경의 취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고 물러가겠다는 구실로 맡긴 자리에 앉지 않으려는 것인가? 경은 훌륭한 조상의 자손으로서 임금을 도우면서 나랏일을 적절하게 처리하는 정승의 도리를 틀림없이 충분히 강구했을 것이다. 또 평소에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아끼는 경의 정성과 오늘날 간곡하게 부탁하는 나의 뜻이 이처럼 심하게 어긋나서는 안 될 것이다.

겉치레를 높이고 사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자중하고 겸손하는 것인가? 현재 시국의 어려운 상황이 날로 급박해져서 그저 늦출 수만은 없으니 이것이 또한 벼슬자리를 결코 오래 비워 둘 수 없는 점이다. 내가 무슨 많은 말을 하겠는가? 경은 틀림없이 마음으로 깨닫는 점이 있을 것이다. 바라노니 경은 곧 조정에 나와서 한결같이 기다리는 나의 생각에 부응하도록 하라."

- 고종실록 고종 26년 10월 9일자 기사.

하지만 조병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사양했고, 고종은 세번째로 관직을 받을 것을 권고했다.

"나의 말이 역시 여러 번 반복되었으니 경이 마음을 돌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계속 고집하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내가 경을 등용하려고 한 지 오래 되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벼슬하는 동안에 업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의 업적에 대해서는 여론의 칭송이 있으니 우의정에 취임하는 것도 들어서 놓았을 따름이다.

《서경(書經)》에, ‘임금이 공포하여 하려는 일에 대하여 뜻을 숨기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경이 속에 포부를 숨겨두고 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의분(義分)에서 어떠하겠는가? 나는 그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다. 경도 차마 옳다고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니 어찌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반드시 깊이 헤아리고 속히 등대(登對)하여 조정과 재야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하라."

- 고종실록 고종 26년 10월 12일자 기사.

조병세는 이후에도 우의정을 사임한다는 상소를 네 차례나 올렸지만, 고종은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1889년 10월 22일, 조병세가 고종을 소견하여 아뢰었다.

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전혀 온당치 않기 때문에 네 번이나 상소를 올려 외람되게 전하를 번거롭게 해 드렸지만 비답을 내려 타이른 것이 전에 없이 절절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명을 어기고 맞서는 것을 일삼고 날마다 번거롭게 대응하는 것은 신하의 의분과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 비로소 명에 부응하여 전하 앞에 나왔지만 더욱 황송하여 어떻게 아뢸지를 모르겠습니다.


재상의 직책은 나라의 안위와 관계되므로 위에서 어찌 누구에게나 줄 수 있겠으며 아래에서 어찌 누구나 다 받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근심을 맡아야 할 책임이 큰데, 어찌하여 지금 재상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이 미천한 신에게 미치는 것입니까?

신은 대대로 나라의 은덕을 받았으니 무슨 일인들 감히 회피하겠습니까? 그러나 무능하고 못난 사람으로서 일찍이 큰 죄를 짓고 스스로 조심한다는 뜻을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 보통 임무를 맡겨도 감히 받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남의 모범이 되고 모두 우러러 보는 자리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신 자신이 전도(顚倒)하여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으니, 백성과 나라가 낭패스러운 처지에 놓이리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얼굴을 들고서 등대(登對)한 것은 오로지 직접 아뢰어서 요행히 면직해 주는 은혜를 받기를 바란 것인데, 총리(總理)에 새로 임명되기에 이르니 명분으로 보아도 감히 바라지 못할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이미 명에 응하였으니 당연히 명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모든 벼슬에서 체차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하고 저의 분수를 보전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고종이 답했다.

경을 재상으로 선정한 것은 오히려 늦었다고 하겠다. 나도 만족하게 생각하고 여론도 흡족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나간 일을 끌어내서 의리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다. 꼭 다시는 제기하지 말고 영의정(領議政)과 함께 서로 한마음으로 협력하면서 날마다 정사를 바로잡을 대책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서 백성과 나라를 다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크게 기대하는 바이다.

조병세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자, 고종은 "경은 지방관으로서 벌써 훌륭한 공적을 세웠으니 이처럼 해 나간다면 재상의 직책을 수행하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답했다. 이에 조병세가 아뢰었다.

대신의 직책은 원래 중대한 것이니 중앙이나 지방에서 두루 쌓은 업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등용하는 데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은 지방관으로서 조금도 성과를 거둔 일이 없으니, 밤낮 생각하여 보아도 스스로 부끄럽고 두려운 점이 많습니다. 설사 칭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정승을 임명할 계제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신은 이조에서 옛날에 실패한 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잊을 수 없는데, 그것이 한 관직이나 한 가지 사무에 불과해도 오히려 그러한 것입니다. 아무리 허물을 포용하고 씻어주는 전하의 지극한 사랑과 훌륭한 은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공론에서 용납하기 어렵고 역사책에 오점을 끼치는 것이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에 고종은 "네 번의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지나간 일을 하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경은 경의 집안 선조 이우당(二憂堂)의 충직한 절개를 가지고 있는데 경이 또 나를 섬기게 되었으니 어찌 오늘 크게 기대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 조병세는 이에 대해 "신은 무능하고 못나서 조상에게 누를 끼친 일이 많은데 어떻게 감히 조상이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그대로 하기를 바라겠습니까?"라며 사양했지만, 결국 고종의 뜻을 꺾지 못했다.

1889년 11월 묘호도감(廟號都監)과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의 도제조(都提調)를 겸임하여 영조정성왕후, 정순왕후의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하는 일을 맡았다. 이듬해 1월에는 숙종,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거행했다. 1890년 3월 조병세가 또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할 뜻을 알리자, 고종이 비답했다.

경이 이 임무를 맡은 후로 나는 경을 늦게 만났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계책으로 곤란을 타개할 것을 기대했는데, 품은 재능을 발휘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사직하는 상소가 올라온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현재 걱정스러운 형편은 진실로 하루아침에 생겨난 일이 아니다. 경이 말한,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고 법도가 날마다 바뀌어서 하나도 믿을 만한 일이 없고, 한 군데도 병들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한 것은 진실로 경의 말과 같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단지 정승에게 있으니, 비유하면 마치 수레를 밀고 음식물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경이 또 잘 비유하였다.


이런 때이므로 책임이 더욱 중하고, 오직 경이기 때문에 기대고 바라는 것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더구나 경은 대대로 충성을 지켜왔고 나라와 고락을 같이한 의리가 있는데, 어찌 차마 무관심하게 나를 버려두고 갑자기 손을 놓으려고 하는가? 이것은 실로 말이 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니, 어찌 내가 번거롭게 말을 되풀이하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경은 서로 공경하여 정사를 도울 방책에 더욱 힘써서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공손히 하고, 성과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라. 실로 구구하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 고종실록 고종 27년 3월 22일자 기사.

이후 고종은 재차 비답을 내려 재상의 직책에 더욱 힘쓸 것을 권고했다.

지난번 비답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타일렀으니 다시 더 말할 것은 없으나 기대가 지극한 만큼 자연히 번거롭게 말을 되풀이하는 것도 꺼리지 않게 된다. 경은 생각해 보라. 오늘날 나라를 위한 계책과 백성의 일에 대해서 고식적으로 인습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반드시 맹렬히 힘을 써서 분발하고 노력을 기울이며 야박한 것을 되돌려 순박하게 하고 위급한 형편을 전환시켜 안전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은 반드시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경은 사려가 깊고 후덕하며 의지가 확고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는 데는 평소부터 위엄과 명망이 있고, 평소에 뜻을 세움에 굳세고 과감하여 지조가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고 곧은 지조와 나라 일을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듣고 주시한 지 오래이다. 상앗대를 잡고 있으면서 훌륭한 뱃사공을 사절하며, 약에 대해 물으려고 하면서 뛰어난 의원을 쫓아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경의 갑작스런 사직을 듣고서 허락할 수 있겠는가? 경도 반드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단지 번거롭게 응답만 하는 것은 결코 서로 믿는 뜻이 아니다.

기대고 바라는 마음 간절하여 특별히 이렇게 선유(宣諭)하는 것이니, 경은 부디 앞으로 상소를 올리는 일을 속히 그만두고 더욱 독실하게 보좌하는 일에 힘쓰며, 정승의 직책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백성과 나라를 위하는 데 마음을 쓰기 바란다."

- 고종실록 고종 27년 3월 27일자 기사.

조병세는 이후에도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고종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1890년 10월 26일 조병세가 또다시 체직을 청하자, 고종은 결국 그의 뜻에 따라 체직해주었다. 하지만 다음날 곧바로 판중추부사(判中樞部事)로 임명했다. 이후 1892년 6월 우의정에 복귀하자, 그는 또다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이 이를 계속 받아들이지 않자, 조병세는 고종을 소견하여 자신의 뜻을 밝혔다.

신이 연전(年前)에 한번 임명에 응한 것은 자신을 헤아리지 않고 헛된 명예로 세상을 속인 일이 진실로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헛된 명예까지도 없으면서 세상에 없는 전하의 특별한 대우를 외람되이 받아 정승(政丞)의 자리에 발탁되어 열 달 동안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어찌 일찍이 한 가지 지혜로운 생각이나 한 가지 말할 만한 주책(籌策)이 있었습니까? 본색만 다 드러내고 비천하고 용렬함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해와 달과 같이 밝으신 전하께서 이미 환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반성해 보건대, 부끄럽기만 하고 면목이 없어 나타날 수 없어서 평상시 묵묵히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으로 부끄러움이 많아 높은 관리로 자처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지를 받들고 선대의 무덤에 고하는 것을 일반 사람들은 지극한 소원이 되지만 신은 아직까지 남과 같이 할 수 없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신이 만일 명령을 받드는 것만 일삼고 자기의 직책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신을 그 선조의 후손이라 할 수 있겠으며 훗날 죽어서 지하에 들어가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만나보겠습니까? 신이 여기까지 말하였으니 밝게 통찰해 주소서."

- 고종실록 고종 29년 윤6월 5일자 기사.

이에 고종이 "경이 물러난다면 내가 장차 위에 홀로 서서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도모하겠는가?"라고 묻자, 조병세가 아뢰었다.

연이어 전하의 하교를 받드니 더욱더 황송하고 답답하지만 신의 지금 사정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형세가 딱합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무슨 말을 감히 숨기겠습니까? 사실대로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연석(筵席)으로 말하면 체통이 엄한 만큼 감히 장황하게 말할 수 없으므로 내일부터 계속 정사(呈辭)하여 말미를 청하려고 하니, 부디 은혜로이 양해하여 주기를 매우 간절히 바랍니다.

고종이 놀라 반문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지나치고 또 지나치도다. 언제나 타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정사하여 말미를 청하는 것이다. 경에게 무슨 말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조병세가 답했다.

정사하는 것은 바로 병을 고하고 사직하는 것입니다. 사직하는 데에 무슨 타당한 이유가 있고 말고 하겠습니까? 신은 본래 이유 없이 그저 사직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후 조병세는 시국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아뢰었다.

신이 이제 물러가려고 하면서 구구한 소회가 있어 감히 황송함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합니다. 오늘날 시국에 대한 걱정과 백성들의 곤궁이 어찌 이와 같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니 일마다 한심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밤낮으로 정사를 잘 하려고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좌우에서 모시는 신하들은 그저 순종하는 것을 위주로 삼고 임금의 뜻에 거스르려 하지 않으며, 조정의 관리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고질로 되어 바른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상황에서 비록 정사의 잘되고 잘못되는 것을 듣고자 하나 가능하겠습니까?

이에 고종이 "내가 언제 바른말이 들어오는 길을 막은 일이 있었는가? 신하들이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또 무슨 까닭인가?"라고 묻자, 조병세는 "죄인을 다루는 옥사(獄事)는 임금의 위엄을 보이는 기본 수단이니 진실로 함부로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중한 죄를 범하여 응당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니, 법의 기강이 어찌 해이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들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그는 이밖에도 국정의 문란을 강하게 비판했다.

"현재 나라의 일에서 가장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은 지방 관리들이 공무를 빙자하여 탐오(貪汚)를 일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팔도(八道)의 백성들이 하루도 편안하지 못한데 방백(方伯)의 전최(殿最)가 엄하지 못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의 조사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지금 삼남(三南)의 수령(守令)이 모두 선정을 하고 있지만, 규탄하여 내쫓을 자가 어찌 그저 지극히 쇠잔하고 궁핍한 작은 고을의 수령뿐이겠습니까? 잘 다스리고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곧 가릴 수 없는 소문이 있을 것인데 마땅히 내쫓아야 할 자를 내쫓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에 떳떳한 형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나라를 경영하려면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녹봉을 주어야 하고 일을 시킨 사람에게 요미(料米)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에는 달마다 내주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유사(有司)가 된 자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 조처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다만 나라의 체면만 훼손시킬 뿐만이 아니라 녹봉(祿俸)을 받고 요미를 받는 사람들이 장차 어떻게 입에 풀칠이나 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사가(私家)에서 주인이 종에게 월급은 주지 않고 그저 일만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명분과 의리가 엄격하여 힘써 일은 하지만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 이것도 급선무에 속하는 것입니다."

(중략)

"당장 백성의 병통으로 가장 치유하기 어려운 것은 화폐(貨幣)의 폐단입니다. 1분(分)을 가지고 5분으로 쓰고 5분을 가지고 1푼으로 쓰니 물건 값이 날마다 올라가고 인심이 야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떠도는 소문에는 변고란 변고는 모두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른 국법은 이웃 나라에서 들을까 부끄럽습니다."

(중략)

"우리나라는 전장(典章)과 규제(規制)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기초가 이미 다져져 태평하게 정사를 하여 온 것이 지금 500년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전하께서는 어질고 밝은 덕을 지니셨으니,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려운 성주(聖主)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라의 형편과 백성의 걱정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다는 한탄이 오늘보다 더 심한 때는 없습니다. 만일 혹시라도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면 나라의 장래가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사에 과단성을 발휘하고 한결같이 공평하게 하여 나라의 형세를 공고히 하고 백성들이 안정될 수 있도록 하소서."

- 고종실록 고종 29년 윤6월 5일자 기사.

이후 조병세는 늙고 병들어 정사를 담당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직 상소를 여러 차례 보냈고, 고종은 일곱번이나 거부했다가 8번째 상소가 올라온 뒤에야 받아들이고, 대신 판중추부사에 제수했다. 이후 1893년 좌의정으로 임명되자 사직 상소를 잇달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조병세는 농민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너그럽게 대응할 것을 주장했다.

"저 무리들은 모였다가 흩어졌다 하는 것이 일정함이 없어서 오늘 흩어진 것은 기뻐할 것이 못되고 내일 모일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백성들의 형편이 쪼들리고 억울하여 무리 지어 호소하려던 것이 점점 이렇게까지 된 것인데 언제 한 가지 폐단이라도 제거하고 한 가지 고통이라도 바로잡아서 백성의 실정에 부응한 적이 있습니까?"

(중략)

"오늘 백성들의 실정은 극히 불쌍합니다. 네 칸짜리 초가집이 있는 사람은 1년에 100여 냥(兩)의 돈을 바치고 5, 6마지기 토지를 가진 사람은 4석(石)이 넘는 조세를 바치니 입에 풀칠도 할 수 없게 되어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만일 안착하여 생업을 즐기게 된다면 어찌 뛰어다니며 소란스럽게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만일 크게 고치고 크게 조치를 시행하지 않으면 결국 실제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중략)

"오늘 백성들의 실정은 극히 불쌍합니다. 네 칸짜리 초가집이 있는 사람은 1년에 100여 냥(兩)의 돈을 바치고 5, 6마지기 토지를 가진 사람은 4석(石)이 넘는 조세를 바치니 입에 풀칠도 할 수 없게 되어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만일 안착하여 생업을 즐기게 된다면 어찌 뛰어다니며 소란스럽게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만일 크게 고치고 크게 조치를 시행하지 않으면 결국 실제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중략)

"동학당(東學黨)의 두목이 이미 성명(姓名)이 드러났으니 반드시 체포하여 처단해 버린다면 위협에 못 이겨 추종한 사람들은 마땅히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다 평민이 될 것이니 돌보아 안착시킬 방책을 마땅히 더 잘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 고종실록 고종 31년 4월 4일자 기사.

또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의 병력을 끌어들이자는 소위 ‘차병(借兵)’ 논의에 대해 “병력으로 이를 제압하여도 그 근원을 다스리지 못한즉 국민들 모두가 적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거한 뒤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정계에서 물러나 가평에 은퇴했다. 뒤에 중추원의장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국왕의 고문인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1896년, 조병세는 19개조의 상소를 올려 폐정걔혁을 건의했다. 그 내용은 언로(言路)를 크게 열어 중책(衆策)을 모을 것, 현명한 인재를 널리 구할 것, 재정을 충실히 한 연후에 군대를 양성할 것, 각지의 의병을 효유하되 토벌하지 말 것 등으로 특히 난국을 헤쳐갈 인재의 등용과 재정 안정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거한 고종(아관파천)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신중할 것을 청원했다.

1897년 9월 30일, 조병세는 대신들과 함께 고종에게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했다.

"하늘이 내려 준 지혜와 예지를 타고난 우리 폐하(陛下)는 신묘한 문(文)과 성스러운 무(武)를 지나셨으며 성대한 공덕은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보다 더 높습니다. 처음으로 왕업의 터전이 닦여진 이래로 500년 만에 융성할 좋은 운수를 만나서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대업(大業)을 거듭 밝혀서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하니 이는 우리 폐하가 천명을 받은 때입니다.


예로부터 천명을 받은 임금은 반드시 위호(位號)를 얻는데 자리라는 것은 대보(大寶)를 말하며 칭호라는 것은 황제(皇帝)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써 이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폐하의 높은 공훈과 큰 업적이 선대보다 앞서니 반드시 위호(位號)가 있어야 합니다. 위로는 천심(天心)에 응하며 명당(明堂), 구연(九筵)의 장소, 염폐(簾陛) 등이 다 갖추어진 후에야 여러 국가의 제도에 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라의 예악(禮樂)과 법도(法度)에서 한 나라, 당 나라, 송 나라, 명나라의 것을 가감하여 썼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당요와 우순의 뜻을 이어 그 계통을 받들어 나가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만이 그렇게 합니다.

대체로 그 계통을 받들었다면 반드시 그 명위(名位)를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로 정하여야 한다.〔必也正名乎〕’라고 하였으니 명위가 정하여지지 않으면 그 계통을 이어받고 그 일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성철(聖哲) 중에는 예의를 다하여 사양하면서도 물리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폐하가 아무리 겸손하게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려고 하지만 높고 낮은 신민(臣民)들의 여론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명을 듣고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에게서 시작되니 사람들의 마음을 알면 천심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급히 유음을 내림으로써 하늘과 사람들의 뜻을 따르소서. 신 등은 기쁜 마음으로 축원하는 심정을 가눌 길이 없나이다."

고종은 이를 수차례 사양하다가 결국 황위에 오른 뒤 조병세를 의정부 의정 겸 태의원 도제조에 제수했다. 조병세는 이에 대해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병세가 거듭 상소를 올려 사직할 것을 청하자, 고종은 결국 그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1899년 1월, 고종이 대신들에게 서양식 복제를 입을 것을 지시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병세는 상소를 올려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 조정에 복귀하여 궁내부 특진관, 태의원 도제조에 임용되었으며, 1902년 7월 고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 이때 고종은 조병세에게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석과 지팡이는 늙은 몸을 의지하는 것


경에 대한 총애는 진심에서 나왔도다

몸을 돌보는 늘그막에 더더욱 힘쓰라

모진 세파에 믿을 것은 경뿐이거니.

1902년 11월 29일, 조병세는 영돈녕원사 심순택(沈舜澤)과 함께 이용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 저 이용익(李容翊)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 등이 이미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요컨대 이 역적은 이 세상에 용납하기 어려운 자입니다. 폐하께서는 너그러운 덕으로 차마 선뜻 처단할 수가 없어서 아직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천만 번 억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에게 저촉되는 지극히 흉악하고 고약한 말을 하고도 나라의 법망을 벗어난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하는 자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도 폐하만이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다면 폐하께서 온 나라 사람들을 믿지 않고 일개 이용익만을 치우치게 사랑하는 것으로써 공명정대한 도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나라의 법이 한번 무너지면 역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공정한 논의에 대하여 어찌 사사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경(卿) 등처럼 노숙한 견해로 어찌 그에 대하여 참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 등은 이해하고 번거롭게 굴지 말라."

하였다.

- 고종실록 고종 39년 11월 29일자 기사.

조병세는 이후에도 이용익을 거듭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조병세와 심순택이 계속 이용익을 탄핵하자, 고종은 분노하여 "애당초 이처럼 깊이 인혐할 것이 아닌데다가 거듭하여 간곡히 신칙하였는데 또다시 계속하여 버티면서 어찌 명분과 의리가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영돈녕(領敦寧) 심순택(沈舜澤)과 의장(議長) 조병세(趙秉世)를 모두 서임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라고 명령했다.[3] 하지만 다음날 두 사람의 처벌을 면제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대신 향리로 쫓겨났던 이용익을 복직시켰다.

1905년 3월, 조병세는 정사에 대해 논하는 다섯 가지 차자를 올렸다.

지금 강한 이웃 나라가 저렇듯 씹어 삼키려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이렇듯 위태로워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위험이 목전에 닥쳤는데 더없이 훌륭한 덕을 지닌 폐하께서 어찌하여 선뜻 결단을 내려 스스로 개진할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측근자들에게 에워싸여 나라의 계책을 날로 그르치면서 팔짱을 끼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울분의 피가 가슴을 막습니다. 연전에 연석(筵席)에서 아뢸 적에 폐하의 눈물이 줄줄 흐르고 말이 매우 절절하여 지극한 성의가 넘쳐났었건만 끝내 한 가지도 실천한 일은 없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저 백성은 나라에 의탁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는 법입니다. 만약 백성은 백성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위와 아래가 서로 갈라진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른바 일진회(一進會)라는 것이 항간에서 판을 치고 그 사나운 기세가 틀림없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질 지경이어서 수령(守令)들이 감히 단속하지 못하고 호령이 민가에 행해지지 않으니 아! 선왕들이 공들여 키워놓은 보람은 이미 없어진 셈이고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는 백성들의 버릇 또한 자라날 대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극도로 나라의 규율이 해이되고 백성들의 의지가 진정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신이 폐하에게 직접 올린 차자의 다섯 가지 조항은 어느 것이나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폐하께서 보신 다음에 조목조목 착실히 시행하면 거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것으로 될 것입니다.

- 고종실록 고종 42년 3월 7일자 기사.

하지만 비답이 없자, 그는 다시 차자를 올렸다.

지금 간사한 자들이 권력을 가로채 온갖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임금을 속이고도 부족하여 임금을 그르치기까지 하며 나라를 병들게 하고도 그치지 않고 나라를 팔아먹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위험에 직면하였으니 눈썹에 불이 붙은 듯한 화와 살을 깎는 듯한 우환이라는 표현도 절박하고도 위급한 오늘의 형세를 비유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신이 말하지 않으면 진짜로 임금을 저버리고 나라를 잊어버리는 충성스럽지 못한 큰 죄악으로 될 것이니 산다고 한들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서며 죽은들 어떻게 저승에 가서 선왕과 선조들에게 배알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세상의 공정한 논의를 들고 세상의 공정한 울분에 의거하여 폐하의 앞자리에서 다섯 가지 문제를 말씀드리면서 폐하가 한 번 깨닫기를 바랐건만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여보아도 아직 분발하여 실시하겠다는 처분이 없습니다.

아! 그럭저럭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비록 태평한 시기라도 일을 망치기에 충분한 것인데 하물며 이렇듯 위태로워 보존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논어(論語)》에는 이르기를, ‘독한 약은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이롭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나라에는 이롭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신의 말이 비위나 맞춘 것이고 원칙에 부합되지 않으며 나라에 이롭지 않는 것이라면 어째서 신의 죄를 밝혀 처단하지 않습니까?

만일 귀에 거슬리는 말이고 원칙에 가까운 말이며 나라에 이로운 말이라는 것을 안다면 또 어째서 이런 간사한 무리들을 아끼면서 윤허를 하지 않고 깔아두고 끝내 벌레와 같은 두 놈의 죄를 바로잡지 않으며 세상의 공정한 의견을 배제하고 세상의 공정한 울분을 부정하면서 종묘와 사직의 위태로움을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번에 아뢴 것은 비준을 받지 못하고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감히 거듭 말씀을 올리는 것이니 깊이 생각해보고 시원히 시행하여서 공정한 논의를 따르고 공정한 울분을 풀어주소서.

- 고종실록 고종 42년 3월 10일자 기사.

이에 고종은 비답을 내려 "경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려는 노성한 견해를 가지고 조목별로 논한 것들은 모두 지성이 넘치고 적절한 것들이므로 바야흐로 실시하고 있고 모든 관리들에게 신칙해서 각기 자기의 직분을 다하게 하여 감히 그럭저럭 안일하게 지내지 말게 하여서 경의 말이 반드시 뚜렷한 효력을 나타내게 하고 있으니 경은 그리 알라."라고 답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조병세는 급히 고종을 알현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일전에 궐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하여 듣고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 왔으나 정신이 흐려서 말로는 다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삼가 간단한 차자를 지어 아룁니다. 신이 병으로 시골집에 누워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던 와중에 중 갑자기 듣자니, 일본 공사가 다섯 가지의 조건을 가지고 조약을 맺기를 요청하였다는데 이른바 그 다섯 가지 조목은 모두가 나라의 존망과 관련되는 관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위협하고 협박하더라도 폐하의 뜻은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신하들이 감히 사사로이 서로 가타부타하였으며 심지어 외부(外部)에서 조인(調印)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고금천하에 전에 없는 이런 변이 있습니까?


천하라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천하이지 한 개인이나 한 집안의 사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라에 중대한 일이 생기면 존엄한 임금도 위에서 독단(獨斷)하지 못하고 반드시 시임 및 원임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원들,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들과 의논한 다음에 결안(決案)하는 것이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변함없는 법이었습니다. 이번 일본 공사가 청한 5가지 조목은 관계되는 것이 어떠하며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한두 신하들이 폐하의 뜻을 받들지도 않고, 옛 법을 따르지도 않고 어찌 제 마음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나라를 남에게 넘겨준단 말입니까?

임금과 법을 멸시한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주관하고 의견을 제시한 박제순(朴齊純)을 빨리 정형(正刑)으로 다스려서 세상에 사죄하며 그 때 회의에 참석하였던 각 부의 대신들을 모두 우선 본래의 관직에서 파면시키고 법부(法部)에 구류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죄목으로 조율할 것입니다. 그러니 즉시 조칙을 내려 해당 의안(議案)을 무효화시키고 반드시 강직한 신하를 외부의 장관(長官)에 임용하여 그 의안은 시행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각 국 공사관(公使館), 영사관(領事館)에 분명히 밝히도록 하소서. 조칙(詔勅)을 써서 내리기전에 신은 물러갈 수 없으며 처분을 받지 못하면 차라리 대궐 섬돌에다 머리를 찧어서 죽을지언정 의리상 차마 살아서 대궐문 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서 500년 동안 조종(祖宗)이 지켜온 기업(基業)을 보존하소서.

- 고종실록 고종 42년 11월 23일자 기사.

고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임금에게 충성스럽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한 경으로서 어찌 이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번의 일은 과연 졸지에 일어난 일이지만 어찌 조용히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밤공기가 몹시 차서 실로 염려스러운데, 바라노니 경은 즉시 물러가서 나의 마음을 안심시키라.

이후 조병세는 박제순 등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높고 낮은 관리들의 계(啓)가 날마다 올라오니 어찌 공분이 온 나라 사람의 똑같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또 자세히 헤아려야 하지만 헤아려서 조처한 바가 있으니 경들은 이해하고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답했다. 이후 고종은 궁궐을 떠나라고 거듭 지시했지만, 조병세는 이를 불응하고 대궐 뜰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신들이 특별히 칙유하신 것을 삼가 받아보니 말이 매우 엄하고 심지어 명을 어긴다는 말씀까지 있으므로 두려운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랏일이 위태롭고 급해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못되므로 지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호소하옵니다.


- 고종실록 고종 42년 11월 27일자 기사.

조병세는 이후 을사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의 목을 벨 것을 호소했지만, 고종은 "어제 내린 비답에 이해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 이렇듯 재차 들고나설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이처럼 크게 벌일 일이 아니고 또 요량해서 처분을 내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고 서로 거느리고 물러나 즉시 집으로 돌아들 가라."고 답한 뒤 그가 계속 명령에 불응하자 궐문 밖으로 내쫒게 했다.

다음날 비서감경 이우면(李愚冕)이 궐문 밖으로 내쫓은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자, 고종은 이를 수락하고 조병세를 용서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있을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조병세는 궐문 밖에 엎드려 재차 상소를 올렸다.

영돈녕사사(領敦寧司事)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이 한 번 죽지 못하고 어제 또 구구한 생각을 호소한 것은 대체로 무익하게 다 죽느니 차라리 이 몸이 더 살아서 다 같이 살 계책을 세우고 망해 가는 종묘사직의 운명을 더 이어 나아가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自强)에 있다.’ 하시고, 이어 서로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신들은 감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역시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인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신들에게 권면하며 신들은 또 어떻게 폐하에게 권면하겠습니까? 그리고 신들은 또한 성상의 뜻이 과연 수성하는 데 있는가 하는 것을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5명의 적신(賊臣)들에게 한 나라의 정사를 전담하게 해서 신들과 몇 만 백성들을 모조리 죽게 하려는 것입니까?

신들이 여러 번 청한 것은 애초에 폐하께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데도 여전히 윤허를 하지 않고 계십니다. 신들이 청하는 것은 폐하께서 쉽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달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대소 신료들을 대궐 뜰에 소집하고 각각 당면한 급선무에 대해 진달하게 하여 가려 쓴다면 역적을 치고 나라를 보존하는 일이 그 속에서 시행될 것이니, 삼가 살피고 서둘러 시행하소서."

- 고종실록 고종 42년 12월 1일자 기사.

그러나 고종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비답만 내렸고, 일본 헌병이 조병세를 강제로 가마에 태워 집으로 보냈다. 이에 조병세는 가마 안에서 독약을 먹었고, 조카 조민희(趙民熙)의 집에 당도한 뒤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이 소식을 접한 고종은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조병세는 끝내 숨을 거두었으니 향년 79세의 나이였다. 사후 조병세의 사위 이용직이 조병세가 남긴 상소를 조정에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늘그막에 죽지 못하여 국가의 위망(危亡)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목격하고, 병든 몸을 끌고 도성에 들어와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면서 그칠 줄을 모른 것은 혹시 일말이나마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변이 끝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침내 외국 군대에게 구속을 당하기까지 하여 나라에 거듭 치욕을 입히고서도 이렇듯 모욕을 참고 구차히 연명한 것은 행여 폐하께서 마음을 돌리시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처럼 수치를 무릅쓰고 백관들의 연명 상소 반열에 서명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논의하는 자들이 죄과를 한층 더 씌우리라는 것을 압니다.


현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임박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지 4, 5명의 역신(逆臣)들과 문의해서 일을 주선하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폐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결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저들의 위협을 받아 잡혀감으로써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크나큰 죄를 자초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을 날이 장차 임박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비단 폐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절개를 지키고 죽은 신 민영환(閔泳煥)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신은 죄가 중하고 성의가 얕아, 살아서는 폐하의 뜻을 감동시켜 역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지 못한 만큼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와 영결합니다.

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 오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國運)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망녕된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신의 몸을 가지고 젓을 담가 역적들에게 나눠주소서.

신은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아픈 마음이 하늘에 닿아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가 계신 곳을 바라보니 눈물이 샘처럼 솟구쳐 흐를 뿐입니다. 오직 성명께서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여 죽는 사람의 말을 채용해 주신다면 종묘사직의 매우 다행한 일이고 천하의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은 피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는 것을 금치 못하며 삼가 자결한다는 것을 아룁니다."

- 고종실록 고종 42년 12월 2일자 기사.

고종은 그의 사망에 크게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조령을 내렸다.

이 대신의 돈후한 천품과 굳은 지조를 두루 중앙과 지방에 시험하니 명성과 업적이 무수히 드러났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모두 그 위풍을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졸(卒)한 특진관 조병세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궁내부(宮內府)에서 1등급의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고, 장사(匠事)는 영선사(營繕司)에서 거행하게 하라. 예식원(禮式院)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정문을 세우기 전에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 정경(正卿)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되 제문(祭文)은 마땅히 친히 지어서 내려 보낼 것이며, 모든 관리들은 나아가라.

졸한 특진관 조병세의 상에 각종 비단 10필(疋), 무명과 베 각각 5동(同), 돈 1,000환(圜), 쌀 30석(石), 전칠(全㓼) 1두(斗)를 특별히 수송하라.

이어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대훈위(大勳位)에 추증하여 서훈(敍勳)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조병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각주

  1. 관직이나 공신의 지위를 빼앗음.
  2. 장소를 정하고 죄인을 귀양 보냄.
  3. 고종실록, 고종 39년 12월 1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