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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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전쟁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6년 10월 29일 ~ 1957년 11월 3일
위치 시나이 반도
결과 이스라엘 시나이 반도 철수
교전단체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이집트

1956년 10월 29일에서 1957년 3월 사이에 벌어진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주된 원인으로 시작된 전쟁.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의 국영화에 반발하며 벌여진 전쟁. 이 전쟁이 유명한 이유는 여태까지 그나마 최강국이대영제국프랑스가 이제는 미국소련의 장기말 똘마니 신세가 되어버린 것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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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 원본 편집]

1956년 7월, 이집트의 대통령인 나세르가 자기 나라의 수에즈 운하를 국영화해버렸다. 이 수에즈 운하의 원소유주인 프랑스와 영국은(정확히 말하자면 이를 소유했단 회사들이 영국과 프랑스 회사였다) 이에 대해 반발하기 위해, 세베르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략한다는 작전, 세베르 프로토콜을 작성한다. 작전대로 전쟁이 흘러가고 막강한 크고 아름다운 화력의 이스라엘이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우세한 수준을 넘어서 이집트를 발라버렸다 ... 이집트는 소련의 동맹국...까지는 아니었지만 소련과 가까워진 상태였고, 이스라엘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 편이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 양쪽 둘 다 서로 제3차 세계 대전을 벌이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었다. 특별히 미국 쪽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이딴 일이 벌여지니 노발대발했다. 그리하여 소련과 미국 둘 다 UN을 통해서 프랑스와 영국을 제대로 비판하고 나섰다. 디스 결국 이스라엘 군이 시나이 반도에서 후퇴하며 모든 것이 종결됐다.

배경[편집 | 원본 편집]

거의 모든 전쟁이 다 그렇듯, 이 전쟁의 주된 원인은 수에즈 운하의 국영화였으나,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이 시대 여러 나라들처럼 소련과 미국을 저울질 해가며 중동 내의 이집트와 자기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아랍 국가주의의 리더로서 보고 있었고, 이렇게 되길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소련의 위성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무기를 수입했고, 미국 측에서 아스완 댐의 건설 비용을 받아갔었다. 하지만 친소련 정책에 반발한 미국은 아스완 댐의 건설비 지원을 아무런 경고 없이 끊어버렸다(!) 근데 이 아스완 댐이 이집트의 대대적이고 위대한 경제적 개혁이 될 것으로 본 나세르는 현실은 시궁창 아스완 댐 건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국영화 시켜버린 것이다.

좀 다른 관점으로부터 설명하자면, 1955년 2월의 급증한 아랍의 이스라엘에 대한 습격이 지속 되면서 벤 구리온 수상은 짜증이 날대로 나버렸고, 이집트의 한 군대가 이스라엘 한 명을 죽여버리자, 가자를 공격하여 38명을 죽여버렸다. 이렇게 돼 버리자, 이집트는 먼저 체코가 아닌 미국에서 무기를 도입 받기를 원하였다. 근데,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간의 무기 제한 협정을 따르기로 하였고, 이를 거절하여서 체코, 즉 소련으로부터 200개의 MiG-15 fighter를 포함한 대량의 무기를 샀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약한 위치에 놓일까봐 걱정된 프랑스는 협정을 무시하고 탱크와 전투기를 이스라엘에게 제공해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전개는 위에 명시된대로이다.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는 세베르 프로토콜을 작성하였다 전쟁 각본. 그 내용을 추리게 되면,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페다이 캠프들을 싸그리 없애기 위한 명목아래에 이스라엘이 우선 이집트의 시나이를 공격, 아카바 만까지 진격하고, 홍해를 이스라엘 선박이 지날 수 있도록 하고,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해 수에즈 운하의 10kM 떨어진 위치까지 이스라엘과 이집트 두 군대가 후퇴하도록 하고, 나세르는 이딴 제안을 받아드릴 리가 없으니, 이를 명목으로 삼아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침공을 감행한다는 내용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 자신들이 군대가 됐든, 이집트의 여론으로 인하여서든, 어떻게든 나세르를 끌어내리고, 수에즈 운하를 수호하는 1석 2조 작전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집어삼키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작전이었으나 차후 자세히 명시되겠지만, 이 작전의 치명적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작전에 대하여 전혀 모른체 셋이서 제멋대로 작성했다는 점이다.

여하튼 1956년 10월 29일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황[편집 | 원본 편집]

초기 전황은 볼 것도 없이 그야말로 이스라엘 쪽의 압승. 솔직히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동맹을 이집트가 싸운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세계적인 여론은 반발했고...

1956년 10월 30일에는 UN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는 미국이 주체로 전쟁을 멈추라는 건의를 하였다, 이는 프랑스와 영국이 거절하였다. 그리고 11월 1일의 UN 총회에선 64:5로 즉각 전쟁을 멈추라는 건의가 통과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무시하면서까지 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소련은 자기 자신들이 비록 헝가리에서의 폭동을 진압하느라 바쁘지만,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는 강하게 대처할 것임을 명시하였고,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영국 에덴 총리에게 엄청난 압박, 아니 거의 협박을 걸었다. 그 내용을 좀 들으면, 영국 은행에서의 미국 자본을 모조리 빼버리고, 영국에게 팔던 오일을 전부 다 끊어버리고 심지어 IMF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조차 막겠다고했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되니 영국과 프랑스 결국 11월 6일 후퇴해버린다.

이후에도 벤 구리온 수상은 어떻게든 가자만큼은 확보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으나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이에 대하여 그딴 거 없다를 시전 하였고, 결국 1957년 3월에는 모든 이스라엘 군이 떨어져 나간다.

결과 및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침략 당한 이집트도, 침략한 이스라엘도 아닌 영국과 프랑스였다 지못미. 에덴 총리은 강제적으로 사퇴를 당했고 그의 책임 회피는 영국의 명성을 떨어트리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전쟁을 이후로 중동에서의 영향이 거의 다 없어진다. 특별히 프랑스가 알제리한테 패하고 알제리가 독립하고 나서 부턴 거의 전부 다 잃어버렸다고 보면 된다.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은 이 이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차지된다.

미국은 이 사태를 이후로 중동에서도 자기 자신들의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내세워서 군사적, 경제적 도움을 중동에게도 주려고 노력하면서 '소련의 손이 뻗기 전에 먼저 우리가 손을 뻗어야 한다'라는 논리를 앞세운다. 게다가 UNEF (United Nation Emergency Force)를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버퍼로서 설치하게 된다. 반면에 소련은 이집트의 큰 지지자가 되는 것을 지속하였기 때문에 누구나 아는 이스라엘 편인 빠순이 미국과의 냉전이 중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결과가 되었다.

이스라엘 또한 기이하게도 별로 손해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대신 욕을 다 먹어주었고 ,아, 진짜 영국 프랑스지못미 제1차 중동전쟁 이후로 쭉 게릴라나 불안에 휩싸였던 자신들의 국경선을 UNEF, 즉 세계의 평화를 위한 군대에 의해 지켜지게 된 것이다. 또한 에일랏에서 아카바만으로 가는 것이 가능해져서, 홍해의 항구를 하나 얻게 된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보여준 압도적인 군사적 실력은 그 위상을 알리기도 하였다.

나세르 및 이집트 일행은 결국 전쟁은 진 것과도 같은 결과였지만, 이집트가 얻은 이익이 많았기에 오히려 이득을 봤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은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빼앗았고 지못미 이 문서에선 어쩔 수 없이 프랑스나 영국 관련 내용을 쓸 때 지못미가 많이 붇는 것 같다. 아스완 댐 계획도 계속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이집트는 꽤나 경제적으로 성장 할 수 있었다. 게다가 UNEF 덕분에 자꾸 태클 걸어오는 이스라엘 군대로부터 자연적으로 지켜졌다. 또한 자기가 그렇게 원했던 아랍 국가주의 리더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티란 해협이랑 아카바 만을 이스라엘에게 개방시켜준 것은 배 아팠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이 두 개의 장소가 제3차 중동전쟁의 계기의 핵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