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바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리구리아어] Repúbrica de Zêna
[이탈리아어] Repubblica di Genova
나라 정보
공화국 상위에 있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Respublica superiorem non recognoscens
— 제노바 공화국의 표어

제노바 공화국은 이탈리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중 하나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건국[편집 | 원본 편집]

제노바 공화국은 초기 신성로마제국의 코뮤네[1]로 그 역사를 시작한다. 그 뒤 사라센 해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고, 또한 해적들을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해군을 조직하여 피사랑 같이 행동하기도 했었다. 1015~1016년에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샤르데냐 섬에 확장을 하나, 피사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1087년에는 제노바 함대가 사라센 해적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하나, 이내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으로 후퇴하게 된다.

제노바 공화국은 1097년,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다. 1200명의 병사와 12대의 갤리선으로 이루어진 제노바 군은 안티오키아 공성전에 군수품을 전달하고 해양 봉쇄를 진행하거나, 예루샬렘 공방전에 제노바 석궁병이 참가하는 등, 십자군에 큰 공헌을 해내었다. 또한 1098년에는 십자군에 도움을 준 대가로 팔레스타인의 해양도시에 제노바인 거류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제노바는 더욱 더 성장하여, 라이벌인 피사아말피를 제치고 서지중해의 지배자가 되었다.

13~14세기[편집 | 원본 편집]

1395년 당시 제노바의 최대 판도

한편 십자군에서 제노바가 차지하는 자리는 변하기 시작했다. 제노바의 영원한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제 4차 십자군을 성공시키고 과거 비잔티움 제국땅에 라틴 제국을 세워버린 것. 이에 제노바는 콘스탄티노플을 통한 교역 자체를 못하게 됨으로써, 베네치아와의 격차는 크게 벌어지게 된다. 1262년에는 제노바가 니케아 제국을 지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대가로 레스보스섬히오스섬을 얻어내어 에게 해 상에서의 교역 거점을 만들어 낸다.

또한 피사와 함께 흑해 루트를 개척하기도 하였는데, 크림반도의 카파(현 크림반도 페오도시야)는 이때 세워진 대표적인 제노바 식민지이다. 이때가 바로 제노바의 전성기였는데, 1282년에는 피사가 제노바 령이었던 코르시카섬을 얻기 위해 그 섬의 반란군을 지원하였으며, 제노바의 일부 함데는 피사에 흐르는 아르보 강을 봉쇄하였다. 1284년에는 피사와의 해전에서 승리하여 피사가 가지고 있었던 샤르데냐 섬 북부를 차지하였다.

또한 제노바의 상인들은 새로운 무역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멀리는 사하라 사막까지도 갔으며, 1281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때에는 아라곤 왕국을 지원하여 시칠리아 왕국에서의 자유 무역을 누리었으며, 1347년에는 코르시카 섬을 완전하게 합병하였다.

쇠망[편집 | 원본 편집]

하지만 14세기 말 베네치아와의 전쟁이던 키오자 전쟁에서 참패를 거두게 되었고, 이는 제노바가 쇠망해 가는 길이었다. 이 패배 이후로 제노바는 서지중해에서의 해군 주도권을 상실하였고, 또한 동지중해 교역에서의 쇠퇴 역시 불러오게 된다. 이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 제노바는 교역을 콘스탄티노플로 집중시키고 있었으니 다른 나라보다 더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고, 또한 흑해 교역 역시 줄어들게 된다.

1450년대에서 1460년대에는 이탈리아 반도로 영향력을 끼칠려던 프랑스스페인의 대결에 휩쓸리고 말았다. 1458년에는 아라곤의 협박으로 프랑스에 소속된 제노바 공국이 되었으며, 1461년에는 밀라노 공국의 지원으로 제노바 공화국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러더니 1464년에는 밀라노가 제노바에 손을 떼었고, 제노바는 프랑스 왕의 봉토가 되었다. 1499년부터 1522년은 프랑스의 지배로 인해 제노바 사상 최악의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1522년,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안드레아 도리아는 제노바를 수복하였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게 된다. 스페인의 찰스 5세가 제노바에게 대출을 요청한 것이다.

제노바의 은행가들[편집 | 원본 편집]

그 뒤 제노바의 은행가들은 스페인의 법정을 지배할 정도로 큰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를 보고 프랑스의 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1557년부터 1627까지를 '제노바의 시대'라고 표현하였으며, 또한 '역사학자들이 이를 오랫동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고 조용한 지배'였다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제노바의 교역은 지중해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16세기 중반의 히오스 섬 함락은 제노바에게 크나큰 손실을 끼치었다.

제노바가 은행업을 시작한 것은 스페인의 필립 2세 때의 국가부도였다. 이는 독일 은행가들인 푸거의 종말을 불러왔었다. 제노바는 유동적인 신용과 고정적인 수입을 지닌 합스부르크 시스템을 제공하였고, 그 결과 아메리카에서 실어온 은들은 모험자금을 제공받기 위해 모두 세비야에서 제노바로 배달되었다. 한 제노바 은행가의 경우는 17세기 초 직접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때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7세기 때 스페인이 지속적으로 파산하자, 제노바의 은행가들 역시 대규모로 파산하였다. 1684년에는 프랑스 군에 의해 심한 포격을 받기도 하였다. 1656년에서부터 1657년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전체 시 인구의 절반이 죽었고, 1625년 5월에 프랑스-사보이 연합군이 침공해 오나 격퇴한다. 그 결과로 1684년 프랑스 군에 의해 또 포격을 맞는다.

18세기[편집 | 원본 편집]

18세기에도 제노바는 천천히 쇠망하기 시작했다. 1742년에는 지중해 마지막 식민지였던 타바르카를 상실하였다. 1745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에는 샤르데냐 왕국을 막기 위해 부르봉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원하였으나, 1746년에는 오스트리아 군의 침공으로 항복하였고, 그 해 12월에는 후에 발릴라라 불리는 아이가 오스트리아 관저에 투석을 하는 것으로 반란이 발발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 군은 제노바에서 쫓겨났고, 1747년 제노바 공방전을 통해 다시 되돌아 오게 된다. 그래도 제노바는 엑스라샤펠 조약때 독립을 보장 받을 수는 있었다. 1755년에는 당시 제노바 령이었던 코르시카에서 반란이 일어나 코르시카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1768년에 이 반란을 버틸 수 없었던 제노바는 프랑스에 코르시카 섬을 할양한다.그렇게 코르시카의 꼬맹이가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고....

멸망[편집 | 원본 편집]

그 뒤 1797년 자기네 들이 팔아넘긴 땅에서 살던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당해 리구리아 공화국[2]으로 재편되었고, 1805년에는 프랑스의 일부로 병합된다. 그리고 1814년 다시 공화국을 선포하나 빈 회의의 결과로 샤르데냐 왕국의 영토가 되며, 1815년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영토[편집 | 원본 편집]

제노바의 영토는 초기에는 제노바 시와 그 주변에 해당되었다. 1015년에 리구리아 지방 전역, 1098년 제1차 십자군이 끝난 뒤 시리아에서의 거류구, 1261년에는 스미르네(현 터키령 이즈미르), 1255년에 카파를 포함하는 크림 반도 식민지를, 1275년에는 히오스 섬과 사모스 섬을, 1316~1332년에는 라 타나(현 터키 아조브), 삼순을 개척하였으며, 1335년에는 레스보스 섬을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할양 받는다. 14세기 말에는 키프루스 섬과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콘스탄티노플과 트레비존드에 제노바인 거류구를 설치한다.

물론 15세기에 터키에게 다 빼앗긴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유럽에 그 유명한 흑사병을 끌고 온 자들이 제노바인들이다. 제노바 령이던 카파를 공략하던 몽골군은 생물학전을 펼치기 위해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를 성안으로 투척했고, 이때 살아서 돌아온 제노바 상인들이 유럽에 전염병을 퍼트리는 트롤짓 거리를렸던 것.

유럽에 현존하는 공국인 모나코 공국은 제노바 공화국 내에서 정쟁으로 쫓겨난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관련 인물[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자치 도시
  2. 프랑스 제1공화국이 제노바를 점령하고 그 영토에 세운 괴뢰국가
Wikipedia-ico-48px.png이 문서에는 영어판 위키백과의 Republic of Genoa 문서를 번역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