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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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諸葛亮
Zhuge Kongming Sancai Tuhui.jpg
인물 정보
출생 181년
서주 낭야(琅邪)군 양도(陽都)현
사망 234년
옹주 오장원(五丈原) 촉군 본영
국적 후한촉한
배우자 황씨
가족 자녀: 제갈첨
제갈교[1]
제갈근
제갈균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공명(孔明). 촉한승상이자 상국으로 정사 삼국지에선 오나라의 육손과 함께 단독열전이 할애되어 있는 두명의 신하 중 하나이다. 한 사예교위 제갈풍(諸葛豐)의 후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출사전[편집 | 원본 편집]

부친은 제갈규로 한나라 말 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냈는데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이에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수습하여 키웠는데 이후 제갈현이 원술에 의해 예장태수로 임명되자, 제갈량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를 에장태수로 뽑아 제갈현을 대신하게 하자 제갈현은 친분이 있던 유표의 도움으로 형주로 이전하였으며 제갈량은 그곳에서 학문을 익혔다. 한편 형인 제갈근은 제갈현을 따르지 않고 양주로 이주하여 양주를 다스리던 손씨 가문의 신하가 되었다.

제갈현이 죽고 청년이 된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다. 제갈량은 신장 8척으로 늘 자신을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기주 박릉군 출신의 최주평, 예주 영천군 출신의 서서(자 원직)들만이 그를 인정해 주었다.

삼고초려부터 유비 황제 즉위까지[편집 | 원본 편집]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그를 군사에 임명하여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한실을 부흥할 수 있을지 물었고 제갈량은 손권과 동맹하고 형주익주를 얻어 국력을 닦고 중국을 침범하는 오랑캐들과 화친하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중원의 변란을 틈타 형주에선 한명의 상장으로 진군하게 하고 익주에선 유비 본인이 진천(관중)을 노려 진군하여 천하를 평정할 것을 진언하니 이 계책이 후세에 유명해진 천하삼분지계이다.

이를 듣고 유비가 마음에 들어하여 그를 신하로 삼아 중히 여기니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였는데 유비가 다독이며 공명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것과 같다하니 이들이 불평을 멈추었고 이를 후세에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불렀다. 이후 유표의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진 유표의 아들 유기가 목숨을 구할 계책을 얻기 원하자 제갈량이 살 방법을 알려주고 유기는 이를 따라 강하 태수가 되었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유종은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이때 서서도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으니 서서가 어쩔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떠났다. 이후 유비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손권과 동맹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 손권도 유비와 동맹할 목적으로 유비에게 노숙을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노숙과 함게 동오로 떠나 같이 손권을 설득하였다. 결국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 싸우길 결의하였다. 이후 유비와 손권 동맹군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유비는 이때 형남 4군을 취했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자 유비가 떠난 형주를 관우와 함께 다스리면서 후방을 지켰고, 손부인유선을 데리고 동오로 떠나는 것을 막았다. 유비가 가맹관에서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유비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이후 후한이 멸망하자 유비가 황제에 오르라는 제신들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제갈량이 황제에 오를것을 권하였고 유비는 황제에 올라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엔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223년 봄,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일으켰던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유비는 영안(永安) 백제성에 머물다가 병이 깊어져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으며 제갈량에게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니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신하로서 헌신하여 유선에게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한다. 이에 유비는 유선에게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여기라는 말을 남기고 승하한다.

남만 정벌과 북벌[편집 | 원본 편집]

유비가 죽은 이후 촉한은 유비의 입촉 이후 잠잠했던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이중에선 익주 남부 여러군이 일으킨 반란의 규모가 컸다. 이에 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으며 남만으로부터 군수물자가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이에 군무를 다스리고 병사들에게 무예를 닦게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이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가 죽은 227년에 제갈량은 마침내 북벌을 결심하고 촉한의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출사표(出師表)이다.

신 량은 아뢰옵니다.

선제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 존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지키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임금께서 귀를 열어 널리 들으시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총언과 간언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과 관부는 모두 한 몸이니 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 시랑인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진영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을 화목하게 하고 그 우열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이 바로 전한이 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무명옷을 입은 평민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이름이 알려져 등용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분주하게 힘쓸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 21년이 지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악한 흉적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옛 수도(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책과 본분이며, 손익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제갈량,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1차 북벌[편집 | 원본 편집]

그리고는 출병하여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228년 봄, 제갈량은 야곡도를 거쳐 미성을 취하려 한다고 일부러 소문내고 조운, 등지를 속이는 군사로 삼아 기곡을 점거하게 하여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을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이 기회를 틈타 제갈량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는데, 군진이 정돈되어 가지런하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이 분명하니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나라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여 관중이 진동했다.

위나라의 2대 황제 명제 조예는 이에 장안에 머물면서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이에 제갈량은 요충지인 가정을 먼저 선점하여 마속에게 요충지를 지켜 장합과 싸우게 했는데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요충지를 버리고 산에 올라 장합을 상대하는 바람에 대패했다. 제갈량은 천수군 서현의 천여 집을 뽑아[2]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으며 유선에게 표를 올려 자신의 벼슬을 깎았다.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 행승상사로 삼았다. 이때 투항자중에 강유가 있었으니 제갈량은 휘하의 장완, 장예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유를 '양주 최고의 인재'라고 평가하며 중하게 썼다.

2,3,4차 북벌[편집 | 원본 편집]

이해 12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는데 조진이 이를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여 퇴각했다. 위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2차 북벌)

바로 다음해인 229년 1월에, 제갈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 음평을 공격하고 위의 옹주자사 곽회를 격파하니 마침내 두 군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은 두군을 점령하고 저, 강의 이민족과 서로 통했으며 촉한의 방위와 위나라 진출의 교두보를 닦은 공으로 다시 승상이 되었다. (3차 북벌)

이후 230년에는 위군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위군이 별 소득 없이 불러가자 위연과 오반을 보내 위군을 다시 격파하였다. 231년 2월에,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병했다. 목우(牧牛)로 군량을 운송하면서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이 옛 북지의 석성에 도착해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기산 북동쪽인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곽회와 비요의 위군과 조우해 그들을 격파하고 보리를 대거 수확했다. 그러나 보리의 손실을 우려한 사마의의 본대가 급진해 험준한 곳에 이르자, 양군은 각기 진채를 정비하며 대치했다. 이후 촉군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자 위군이 이를 쫓아가 5월 10일 경, 노성 부근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이, 기산 남부에서 장합과 왕평이 크게 싸웠는데, 노성에선 제갈량이 사마의를 대파했고, 기산에선 왕평장합을 격퇴했으며, 이에 위군의 두 지휘관이 퇴각하여 본진을 지켰다.

이후 이엄의 거짓보고로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릴수밖에 없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을 추격하게 했고 제갈량은 장수 장합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제갈량이 돌아온 이후 이엄의 속임수가 밝혀지고 이엄은 파직되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4차 북벌)

5차 북벌 및 죽음[편집 | 원본 편집]

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수 남쪽에서 대치했다. 이후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사마의가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다리를 만들자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했다. 한편 제갈량은 동서로 우회기동하여 위군의 허를 찔렀으나 위군에서 유일하게 제갈량의 기동을 파악한 곽회의 기지로 인해 저지되었다. 이후 사마의가 교전에 응하지 않고 굳게 지키니 전장은 대치 국면에 접어들었다.

오장원에서 촉군은 수비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나 위군이 교전에 응하지 않으니 촉군은 오장원에 눌러 앉는다. 평소 제갈량은 늘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오장원에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는데 이로서 제갈량은 위수 남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촉군의 둔전이 시작되고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위나라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제갈량은 사마의 진영에 여성의 복장과 장신구를 보내 도발하였는데 사마의가 분노하여 싸우기 위해 명제 조예에게 청하니 조예는 신비에게 부절을 딸려보내면서 싸우는 것을 막았다. 이에 강유가 저들이 싸우지 않으려 할 것이라 탄식하니 제갈량은 '본디 사마의는 싸울 마음이 없고 단지 황제의 지지를 받아 장수들을 진정시키려는 것'이라 평했다. 한편 사마의는 제갈량이 식소사번[3]한다는 것을 전해 듣고는 제갈량의 몸이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여겨 수비를 굳건히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9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이를 후세에 추풍오장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이를 추격하다가 퇴각을 맡던 강유가 군을 돌려 공격할 태세[4]를 취하니 황급히 후퇴하는데[5] 이런 모습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내좆았다는 의미로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된다. 이후 사마의는 후퇴한 촉군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이후 사마의는 촉군의 영채에서 많은 책서와 양곡을 노획하는데 본디 사마의의 전략은 국력이 강한 위나라를 상대로 제갈량과 촉한이 속전속결로 성과를 얻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을것이라 평가하고 촉군이 항상 보급에 문제를 겪는다는 점을 간파하여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는 것으로, 제갈량의 도발에 길길이 날뛰는 휘하 장수들을 진정시키면서 수비를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촉군은 몇달을 버티면서 상당한 양곡을 비축하고 있었으니 사마의는 강유의 기지에 걸려 촉군을 놓친것과 더불어 은근히 속이 쓰렸을만 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5차 북벌을 호로곡 전투라는 이름으로 각색하였다. 제갈량의 화공에 넘어가 위기에 처한 사마의가 때마침 내린 비로 인해 살아나가니 제갈량이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을 꾸미는 건 사람이나, 성사되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라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제갈량은 한중 정군산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 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을 쓰지 말도록 했다. 유선은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제갈량이 죽기전에 표를 올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려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후주 유선은 제갈량의 죽음에 대해 비통한 심정을 내비치며 승상 무향후의 인수와 충무후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훗날 사람들은 제갈량의 언급할 때 제갈무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며, 현재 중국 쓰촨성의 성도인 성도에는 제갈량을 기리는 무후사가 있고 유비의 혜릉이 인접하고 있어 삼국지 팬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장소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비통해하던 유선은 이후 제갈량의 사당을 지어달라는 민중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고 미적거렸으며, 이에 백성들은 사사로이 제단을 차려 제갈량을 기렸다고 하며, 주변 오랑캐들 마저 제갈량의 제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를 보다못한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사사로운 제사를 한데 모아 제갈량의 묘소와 인접한 면양에 사당을 지어줄 것을 간언했고, 그제서야 후주는 이 말을 따라 사당을 지을 것을 허락했다 한다. 후주의 선황인 선주의 유언에서도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받들며 따르라고 하였고, 실제로도 제갈량은 삼국중 국력이 열세인 촉한을 부흥시켜 오히려 강대국인 위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감행하면서도 내치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니 나라의 아버지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드높은 제갈량의 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망설인 후주의 범용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제갈량은 후사를 염려하여 후주 유선에게 표를 올려 후임자로 장완을 천거했으며 이후에는 비의가 그 역할을 이어받는다. 강유는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한중에 주둔하며 군사를 조련했다. 제갈량 사후, 양의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다 숙청당하고, 위연 역시 병권을 두고 제갈량의 유지에 반기를 들며 내분을 일으키다 진압되어 제거당했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촉한 입장에서 제갈량 사후 이러한 유능한 인재들이 스스로 무너지는 등 촉한에는 불운이 계속되었다. 이후 유비와 제갈량이 남긴 인재인 장완, 비의, 동윤, 강유, 왕평, 장억, 장익, 요화 등이 의지를 이어 분골쇄신 하긴 하였으나 끝내 한실부흥과 천하평정을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제갈량은 촉한의 상공업,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도강언을 수리하여 생산력을 높였다. 한중에서 둔전하면서 북벌하는데 한중을 배후기지로서 향상시켰고 촉한의 경제는 넉넉해졌으며 수공업은 소금업, 제철업과 비단직조업이 가장 발달하였다. 제갈량은 기계에 능하여 무기를 개량하고 화정(火井, 천연가스)을 이용해 소금와 철의 이익을 향상시켰다. 촉한의 비단과 화폐는 위나라, 오나라등에도 통용되었고 제갈량은 촉금(蜀錦)을 국가의 중요 물자라고 인식하였으며 촉금의 아름다움과 질을 향상시켰다. 남중에서는 금, 은, 단, 칠, 밭갈이 소 등이 공품으로 들어와 촉한의 군비에도 다소 공급되었고 국가를 부유하게 했다. 촉한이 망할 당시 관부에는 금, 은이 각각 이천근이었다. 수도 성도도 당시의 상업도시라 여겨진다.

군사에 있어선 성정이 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포원등의 대장장이를 시켜 각종, 무기 연노를 개량하고 목우, 유마를 개발하여 촉군은 강한 군대를 키울수 있었다. 또 병법에 있어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후일 서진의 장군 마륭이 팔진도를 사용하여 독발수기능의 난을 물리칠수 있었다.

제갈량의 말과 교령, 서신, 상주문에 볼만한 것이 많으므로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따로 하나의 문집을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오늘날 전편이 전하지는 않고 있으며 여기저기 흩어진 글로 확인할 수 있을뿐이다.

당나라 중기 시성 중 하나인 두보가 사천 땅에 머물 무렵 성도의 무후사에 들러 촉상(蜀相)이라는 시를 지은바 있다.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두 대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 두보, 촉상

만두의 발명자라는 설이 있다. 송나라 신종 시절의 서적 사물기원(事物紀元)에 다음과 같은 기원이 적혀 있다. 맹획을 굴복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여수(또는 노수)의 물살이 너무 거칠어 도저히 건널 수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제갈량의 정벌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원혼이 한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결책은 오로지 원혼을 달래기 위해 토착민들의 풍습대로 사람의 목을 베어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는데, 무고한 인명을 희생할 수 없었던 제갈량은 밀가루로 반죽하고 그 안에 고기를 채워넣어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제물을 바쳤고 강물이 잠잠해져서 무사히 건넌다. 여기서 유래한 음식이 만두라는 설화가 전해진다.

제갈량의 부인인 황씨는 외모가 못난것으로 전해진다. 오죽하면 그녀의 아버지이자 제갈량의 장인이 되는 황승언이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자 한 말 가운데 내게 못난 딸이 있는데, 노란 머리에 얼굴이 검지만(黃頭黑色) 그 재주가 서로 배필이 될 만하다고 말했을 정도. 이를 두고 사람들은 공명이 부인 고르는 것은 배우지 마라. 아승[6]의 못난 딸을 얻으리라라고 말했다 한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진수, 배송지의 평[편집 | 원본 편집]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으며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로 관중, 소하의 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를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 배송지,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주석

다른 학자들의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한 나라의 정치를 섭행하고 범상한 임금을 섬기면서 권병(權柄)을 오로지하였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임금의 일을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법을 행함이 근엄하여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고 백성들의 힘을 쓰되 그들의 힘을 다하게 하였으나 아래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군사를 출동하여 적국에 갔을 때도 규율이 엄하여 행인이나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본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용병(用兵)함에 있어서는 중지하면 산처럼 중엄했고 진퇴할 때는 풍우(風雨)와 같았으므로, 천하가 진동해도 인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주(周) 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듯 노래하며 사모하고 있다. 법령(法令)이 엄명하고 상벌(賞罰)이 미더웠으므로 사졸들이 명령에 복종하여 위험(危險)한 데에 달려가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수십 만의 군대가 이룩한 공(功)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영루(營壘)를 설치할 때는 우물, 부엌, 울타리, 장색(障塞)을 모두 법대로 만들었으므로 한 달 간 있다가 떠날 때도 처음과 같았다. 게다가 촉(蜀) 사람들은 용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부릴 수 있었다.

실(實)을 힘쓰고 명(名)을 힘쓰지 않았고, 뜻이 크고 바라는 것이 위대하여 관부(官府), 차사(次舍), 교량(橋梁), 도로(道路)를 잘 수리했으며, 소국(小國)은 어진 인재가 적기 때문에 존엄(尊嚴)하게 하고자 했다. 농지(農地)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채웠으며, 기계를 편리하게 수리하고 저축을 넉넉하게 했다. 따라서 조회(朝會)는 검소하게 하고 도로에는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근본이 확립되었으므로 끝이 잘 다스려졌으며 여력(餘力)이 있은 뒤에 작은 일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을 권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제갈량은 근본을 준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술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히 자신의 단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한몸에 구비하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 서진 원준, 원자
"물고기와 물이 세번 만나 합치니 사해(四海)에 풍운이 이는구나!"
— 당나라 이백
"나는 매양 진수(陳壽)의 삿됨과 고루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는 무후(武侯)의 경략(經略)의 차제와 사전에 조짐을 알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한 것과 군대를 부리고 통제하던 요점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전기(傳記)와 배송지(裵松之)의 주(注)에 뒤섞여 나타난 사실이 있어서 주워모았는데, 감히 말을 수식함으로써 사실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 남송 장식
"난국(亂國)을 다스리는 데는 준엄한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원자(袁子)의 의논이 공명(孔明)의 뜻과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바가 조리 정연하여 규도(規度)가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그러나 ‘임기 응변하는 것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 한 것은 대체로 진수(陳壽)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 조선 이덕무, 청장관장서

"손권(孫權)이 제갈 무후(諸葛武侯)를 칭찬하기를, '진실함은 음양을 감동시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하였고, 사마의(司馬懿)는 그의 군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으며, 종회(鍾會)는 촉(蜀) 땅에 들어가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 무후가 적국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이겠는가. 무후가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고 이평(李平)이 슬퍼하다 죽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남만(南蠻)의 풍속에 북쪽 문을 모두 낮게 만들어 나갈 때에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하니, 이것은 무후가 가르친 것이다. 항상 북쪽에 머리 숙여 복종하게 한 것인데 이것을 오랠수록 더 잘 준수하여 감히 고치지 않았으니, 그의 신성(神聖)한 위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신이(神異)한 자취가 남만과 촉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이하니, 어복포(魚腹浦)에 돌로 쌓아놓은 팔진도(八陣圖)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아 마치 귀신의 돌봐 줌이 있는 듯하다. 그 외에 사만세(史萬歲)가 그의 기공비(紀功碑)를 넘어뜨린 것과 조빈(曹彬)이 그의 비석에 절한 것, 숙친왕(肅親王)이 비지(祕誌)를 얻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옛사람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는가."
— 조선 성대중, 청성잡기

삼국지연의 속의 모습[편집 | 원본 편집]

정사에 비해 과장된 측면도 많고 민담이나 설화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의 위치는 주인공인 유비와 동급 수준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특히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의 3형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연의의 중심은 제갈량으로 옮겨지고 남만정벌과 북벌과정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있다. 도원결의부터 서진위나라를 멸망시킨 시기까지의 기간을 대략 100년으로 계산한다면, 제갈량이 사망한 시점은 거의 중간 시점에 해당하는데, 연의의 분량은 제갈량의 죽음 이후로는 분량이나 서술이 간략하게 처리되는 경향이 강하다.[7] 혹자는 삼국지연의를 읽다가 세번 집어던진다고도 하는데, 그 첫번째는 관우가 죽었을 때고, 두번째는 유비가 죽었을 때, 마지막으로는 제갈량이 죽었을 때라고 한다. 그만큼 삼국지연의 중후반부를 책임지는 주인공급 캐릭터로서 정사에서 기록된 출중한 능력을 더욱 각색하여 초인적인 전지전능함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언변의 달인[편집 | 원본 편집]

적벽대전을 앞두고 유비는 조조의 대군에 밀려 유기가 지배하던 강하로 피난한다. 풍전등화의 위기속에 마침 손권이 보낸 노숙이 유비를 만나 전략을 의논하는데, 조조의 대군을 막기 위해서는 손권의 군사력이 절실했던 제갈량은 노숙을 따라 아예 손권의 진영에 혈혈단신으로 들어가 손권의 참모들과 설전을 벌인다. 연의속에서 손권 휘하 무관들은 조조와 항전을 주장하였고, 문관들은 항복 또는 화친을 주장하여 서로 양분되는 상황이었고, 손권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제갈량이 당도한다.

제갈량은 이런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온건파인 문관들을 상대로 설전을 벌이는데 당시 손권측의 내노라하는 엘리트들인 장소, 보즐, 엄준, 육적 등을 논파하며 셧아웃 시키는 명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라이벌로 등장하는 주유와의 대면에서 조조가 동작대를 완성하고 읊었다는 시절인 동작대부를 교묘하게 비틀어 손권의 형수인 대교와 주유의 부인인 소교를 농락[8]하는 듯한 내용을 집어넣었다. 이에 발끈한 주유는 중립적인 입장을 버리고 항전을 결의하며, 손권 역시 칼을 들어 탁자의 모서리를 베어내며 누구든 항복을 주장하는 자는 이 탁자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고 일갈하며 제갈량의 의지대로 손권 세력이 조조와 대치하는 국면을 조성했다.

북벌 과정에서는 위나라의 중신인 사도 왕랑이 제갈량에게 설전을 걸어오는데, 이에 응한 제갈량은 수레위에 앉아서 부채질하는 여유를 부리면서 왕랑의 한마디 한마디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궁지로 몰아넣는다. 결국 제갈량의 말솜씨에 격분한 왕랑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분사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그 유명한 출사표에서도 나타나듯, 제갈량은 연의속의 모습처럼 굉장한 언변과 논리를 지녔을 것으로 생각되며, 연의에서는 이런 뛰어난 재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하여 각색을 가미했다고 볼 수 있다.

초인적인 모습[편집 | 원본 편집]

연의에서 제갈량은 밤하늘을 보며 앞일을 예상하거나 중요한 인물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한다. 더욱이 기상의 변화를 활용하여 여러 전투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도 했으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적벽대전을 앞두고 화공을 실행하기로 전략을 수립하지만 마침 계절의 영향으로 북서풍이 불어 전황이 불리[9]한 순간, 제갈량은 자신이 하늘에 빌어 바람의 방향을 바꾸겠다고 말하며 제단을 쌓고 기도를 드리자 거짓말처럼 풍향이 동남풍으로 바뀌어 화공이 성공하고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것이다.

남만 정벌 과정에서는 맹수를 부리는 목록대왕의 군단에 대항해 불을 내뿜는 목상을 활용해 물리치는 장면도 나오며, 주둔지에서 아무리 땅을 파도 식수를 구할 수 없자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에 빌자 거짓말처럼 다음날 구덩이마다 식수가 솟아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북벌 도중 오장원에서 죽음을 앞둔 제갈량은 촉한의 명운을 염려하여 하늘에 자신의 수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위군의 야습에 대응책을 물어보러 제갈량의 장막에 황급히 들어서던 위연이 등불을 꺼버리며 무위로 돌아가고, 체념한 제갈량은 자신의 죽음 이후의 대비책을 전달한다. 특히 사마의도 필시 천문을 관찰하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별이 떨어질 것을 파악하여 공세에 나설 것이라 예상하고, 목숨이 다하거든 자신의 입 안에 쌀알 7알을 넣고 관에 앉혀놓으면 별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강유에게는 퇴각시 미리 준비한 자신의 모습을 닮은 목상을 수레에 태워 사마의의 추격을 막도록 계책을 준비한다.

제갈량의 사후, 그의 예견대로 사마의는 밤하늘의 커다란 별 하나가 떨어지다가 잠시 멈추는 모습에 주춤하면서도 주변 장수들의 권유에 따라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한다. 하지만 매복했던 강유의 군세가 등장하고, 제갈량의 목상을 태운 수레가 등장하는데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사마의는 제갈량이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밤하늘의 별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라며 놀라움과 두려움에 질려 황급히 퇴각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런 모습을 후세 사람들은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달아나게 했다라면서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고사를 만들었다.

대중문화 속의 제갈량[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형인 제갈근의 차남으로, 늦은 나이까지 친자를 보지 못하던 제갈량의 후사를 염려하여 양자로 입양되었다.
  2. 천수, 안정, 남안의 백성들은 촉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서현은 제갈량의 주둔지 인근이니 이들 대부분은 강유나 양서 같은 망명자였을것이다.
  3. 食小事煩, 즉 식사는 적게하고 일은 과중하다는 의미로서 당시 평균수명을 따져보아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닌 늙은 제갈량이 과로하여 스스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외모를 본딴 나무인형을 평소 제갈량이 타고 다니던 수레에 태우고 진군시켜 사마의를 놀래키는 장면이 나온다.
  5. 정사의 기록으론 제갈량 사후 촉군이 군을 정돈하고 퇴각하자 사람들이 사마의에게 급히 알려 사마의가 바로 추격했는데 촉군을 이끌던 강유와 양의가 북을 울리고 마치 공격할 것처럼 대응하자 추격하던 사마의가 군사를 바로 물리고 감히 촉군을 핍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에 촉군이 죄다 후퇴한 뒤에야 후퇴한 촉군의 영채를 살펴보았다고 나온다.
  6. 阿承, 황승언의 애칭
  7. 보통 제갈량 사후 부분은 전체 분량의 15%정도이다. 저자에 따라 이 부분이 더 줄어들거나 아예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8. 대교는 손권의 형인 손책의 부인이며, 손책이 살아있던 시기에는 주유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당시 강동에서 소문난 미녀인 대교와 소교 자매를 각각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결국 조조가 대교와 소교를 차지해 동작대에서 풍류를 즐기겠다는 내용은 손권에게는 친형 손책에 대한 고인드립이자 패드립이며, 주유에게는 부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9. 조조 세력은 적벽의 북쪽에 위치하였고, 손권 세력은 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북서풍이 부는 상황에서 화공을 실행해봤자 불길이 남쪽으로 번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당시 조조측 참모들도 화공을 우려해 조조에게 간언하지만, 오히려 조조가 풍향을 이유로 참모들에게 핀잔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