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

정중부(鄭仲夫, 1106년~1179년)는 고려의 무신으로 무신의 난을 일으켰다. 무신 정권의 두 번째 집권자이며 본관은 해주이다.[1]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무신정변 이전[편집 | 원본 편집]

고려사》에 따르면, 정중부는 생긴 모습이 현걸차고 네모진 눈동자에 이마가 넓었으며, 피부가 맑고 수염이 아름다운데다 신장이 7척이 넘어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밧줄로 묶여 끌려간 것으로 보아 군역을 지는 일에 거세게 저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상 최홍재는 정중부의 범상치 않은 용모를 보고 결박을 풀어준 뒤 공학군[2]에 편입시켜주었으며, 인종 대에는 견룡대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섣달 그믐날 조정에서 나례[3]를 열고 연회를 즐기던 중, 내시 김돈중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는 일이 일어났다. 노기가 치솟은 정중부[4]는 그 자리에서 김돈중을 붙잡아 욕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 고려는 문신들이 무신들에 비해 훨씬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데다가, 김돈중의 아버지가 당시 문신들의 우두머리였던 김부식이었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펄펄 뛰며 정중부를 매질하라고 요구했고, 그의 요청을 거절할 힘이 없었던 인종은 이를 수락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정중부를 총애하고 있었기에 몰래 도망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 일은 정중부가 김돈중과 문신들에게 앙심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인종 사후, 그 아들인 의종 초에는 교위가 되었다. 당시 어사대가 왕의 지시에 따라 수창궁의 북쪽 문을 폐쇄하고 멋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정중부는 산원 사직재와 함께 멋대로 문을 열고 출입했다. 어사대에서는 정중부를 문초하도록 건의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고, 이후 정중부는 여러 차례 관직을 옮기다 상장군까지 승진하였다. 정중부의 수려하고 위풍당당한 용모 때문이든, 혹은 그 나름의 인간적 매력 때문이었든 인종과 의종에게 상당한 총애를 받았던 듯하다.

무신정변[편집 | 원본 편집]

의종은 주색에 빠져 문신들과 함께 산천을 유람하며 노는 일이 잦았는데, 이 때마다 무신들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호위해야 했다.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면서 문신들이 술마시며 노는 꼴을 지켜보아야 했던 무신들은 피로감과 불만이 폭발할 지경까지 쌓여갔다.

1170년, 왕이 화평재에 행차해 놀고 있을 때, 견룡행수 이의방이고가 소변을 보러 간 정중부를 따라가, 역모에 동참할 것을 은밀히 제의했다. 아직 계급이 낮은 이들로서는 상장군으로서 무신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고 영향력이 있는 정중부의 협조가 필요했던 듯하다. 곧왕이 연복정에서 흥왕사로 행차하자,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를 불러, '왕이 곧 환궁한다면 참는 게 좋겠고, 다시 보현원으로 이동하면 거사를 실행하자'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의종은 보현원으로 행차하던 길에 오문(五門) 앞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를 하게 하였다. 무신들의 불만이 쌓여가는 것은 의종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고, 수박희를 기회로 무신들에게 후한 상을 내려 그들을 달래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 수박희 도중 대장군 이소응이 패배하여 달아나는 일이 일어났다. 비록 이소응은 무신이라고는 하나 체구도 작고 나이도 예순에 가까워 수박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던 문신 한뢰가 나서 이소응의 뺨을 후려치자, 이소응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임종식과 이복기 역시 이소응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모욕을 주었으며, 의종은 신하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분노한 정중부가 '이소응이 무인이라곤 해도 관직이 3품인데, 어찌 이처럼 심하게 욕을 보이는가'라고 외치며 한뢰를 꾸짖자, 당황한 의종은 몸소 정중부의 손을 잡고 그를 달랬다. 이고는 칼을 뽑아들고 정중부에게 눈짓을 보냈으나, 정중부가 제지했다. 의종 딴에는 수박희를 통해 무신들의 불만을 잠재울 생각이었으나, 그 정도로 잠재워지기엔 무신들의 불만이 너무 강했을 뿐더러, 한뢰의 뻘짓과 이를 보고도 박장대소를 한 의종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날이 저물어 어가가 보현원 근처에 이르자, 이의방과 이고는 왕의 명령을 빙자해 순검군을 집합시킨 뒤 난을 일으켰다. 이소응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임종식과 이복기를 시작으로, 한뢰, 이세통, 이당주, 김기신, 유익겸, 김자기, 허자단 등 왕을 호종했던 문관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정중부의 원수였던 김돈중은 미리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가는 데 성공했으나 아랫사람의 밀고로 붙잡혀 처형당했다. 난을 일으킨 이들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복두를 벗는 것을 서로를 알아보는 표식으로 삼았기 때문에, 복두를 벗지 않아 적으로 몰려 살해당한 무신들도 많았다.

이후 무신들이 개경으로 몰려가 문신들을 살육하자[5], 두려움에 휩싸인 의종은 정중부를 불러 난을 멈추도록 설득했으나 정중부는 건성으로 응대하기만 하였다. 의종이 환궁한 뒤 환관 왕광취가 무신들을 토벌하고자 모의하다 들통나자, 정중부는 내시와 환관들을 죽이고 의종을 거제현으로, 태자를 진도현으로 추방하고 태손은 죽여버렸다. 그리고 왕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새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정중부를 참지정사로 임명했다가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시키고 문하평장을 덧붙여 주었으며, 그를 일등공신으로 책봉하고 공신각에 초상화를 걸어주었다. 당시 이고는 남아있는 문신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정중부는 이를 제지했다.

1172년에는 서북면병마사, 판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가 되었으며,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난을 일으켜 의종을 복위시키려 하자, 정중부와 이의방은 이의민, 박존위를 시켜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무신 지도부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져 이의방이 이고와 채원을 차례로 살해하여 권력을 장악하자, 정중부는 이를 두려워해 집에 틀어박혔다. 그러자 이의방 형제가 술을 들고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마침내 부자관계까지 맺었다. 그러나 이의방이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군에 여러 차례 패배하며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승려 종참을 사주해 이의방을 암살했다. 이의방이 죽자 정중부 일가가 온전히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몰락[편집 | 원본 편집]

정중부는 일흔 살이 되고서도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았는데, 낭중 장충의가 그의 뜻에 영합하여 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재상은 일흔 살이 되어도 은퇴하지 않는 법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정중부는 기뻐하며 조정을 움직여 자신에게 궤장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1178년, 일흔셋의 고령인 정중부가 마침내 관직에서 은퇴하자,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이 그 권력을 물려받았다. 이들의 탐학은 극심하였으며[6], 특히 정균은 공주에게 장가들려고 한 일로, 송유인은 당시 문신들의 우두머리 격이던 문극겸과 한문준을 탄핵한 일로 많은 원망을 샀다.

1179년, 이들의 횡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경대승이 정균을 암살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정중부는 변란 소식을 듣자 민가로 달아나 숨었으나, 결국 체포되어 참수되고 그 목은 효수되었다.

그러나 무신정변의 상징적 인물로서 무신들 사이에서 정중부의 위상은 대단했다. 정중부가 죽은 뒤에도 일부 무신들은 "정시중께서 앞장서서 대의를 부르짖으며 문신들을 억누르시어, 해묵은 우리들의 울분을 씻어주시고 무신들의 위세를 펼치셨으니 그 공이 막대하다. 이제 경대승이 하루 아침에 네 분의 대신을 죽였으니, 누가 그를 토벌하겠느냐?"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경대승은 이런 무신들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친위조직인 도방을 조직하고, 거리에 사람을 보내 염탐을 시키거나 유언비어를 듣고 여러 차례 옥사를 벌이는 등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일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압박감 때문인지, 경대승은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꾼 뒤에 병을 얻어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그러나 첫 번째 집권자라고 할 수 있는 이의방을 생략하고 정중부가 첫 번째 집권자로 소개되는 경우도 흔하다.
  2. 고려시대 금군(禁軍)의 일종이다.
  3. 악귀 쫓는 의식
  4. 물론 자기 수염을 불로 그슬려 보기 흉하게 만드는 짓에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앞서 서술했듯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던 정중부로서는 특히 수염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으리라 추측된다.
  5. "문신의 관을 쓴 자는 서리라고 할지라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려라!"라는 선동 문구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6. 물론 권세를 얻으면 극심한 탐학을 부리는 것은, 정중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무신 집권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